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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리베로의 귀환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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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1-1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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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물’에서 선진축구를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떠난 홍명보, 제2의 히딩크를 기약하다

한번이라도 운동장에서 뛰어다니며 축구를 해본 사람은 안다. 공을 따라 10~20분만 쫓아다녀도 금세 숨이 턱에 차오르고 가슴이 벌렁거린다. 더구나 30대 중반을 넘으면 마음은 아직 차두리지만, 굵은 허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헛발질이 늘어난다.

평소 체력관리를 잘한 축구선수도 30대 중반이면 환갑 나이다. ‘영원한 리베로’ 홍명보(33)가 미국 프로축구(MLS) LA갤럭시로 간다. 고려대 87학번인 홍명보는 69년 2월생이다. 내년이면 우리가 세는 나이로 35살. 비슷한 연배 대졸자들은 대기업 과장급으로 일하고 있다.

‘머리’를 채우지 못한 한국 축구


사진/ LA갤럭시 구단 관계자들이 5일 로스앤젤레스 스테이플센터에서 홍병보의 입단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
월드컵 4강 주역으로 부러울 것 없는 인기와 명예를 누린 홍명보가 마음만 먹으면 국내 대학과 프로팀에서 안정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할 수도 있다. 그런데 다시 낯선 땅에서 새로운 도전에 나선 까닭은 무엇일까.

홍명보는 섭섭해하는 팬들에게 큰물에서 선진축구를 제대로 배워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는 2년간 LA갤럭시에서 선수생활을 하며 영어를 익히고 선수관리·마케팅 등에 관한 공부를 병행할 계획이다. 그 뒤 영국으로 건너가 코칭스쿨에서 지도자 수업을 받는다고 했다. 국제축구연맹(FIFA) 선수분과위원회 위원으로 해마다 두 차례씩 국제회의에 참석하는 홍명보는 영어를 익혀 국제 축구계에서 축구외교까지 대비하겠다는 장기 계획을 세웠다.

홍명보의 해외 도전 배경에는 거칠고 황량한 국내 축구 풍토와 문화가 자리잡고 있다. 현역 축구선수나 축구계 인사 가운데 국제 축구무대에서 의사표시를 제대로 할 정도로 영어를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대부분 축구선수들이 중·고등학교, 대학교까지 수업은 거의 듣지 않고 공만 찼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운동선수를 두고 ‘머리가 비었다’고 빈정거린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축구를 시작한 홍명보도 처음에는 부모의 반대에 부딪혔다. 집안에서는 그가 공부하기를 바랐다.

관행상 중·고등학교나 대학 축구팀에서 잘하는 선수는 공격수, 좀 떨어지는 선수는 수비수를 맡곤 한다. 홍명보는 대학 1학년까지 넓은 시야와 뛰어난 기술을 자랑하는 허리수(미드필더)였다. 홍명보는 대학 2학년 때 졸업한 선배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스위퍼로 갑자기 위치를 바꿔야 했다.

하지만 타의에 의해 수비수로 전향한 홍명보는 상식을 깼다. 자기 편 골문 앞에만 붙어 있는 수비수가 아니라 중앙선을 넘고 골도 넣었다. 90년 1월 태극마크를 단 홍명보는 12년 동안 국가대표 축구팀 부동의 ‘리베로’로 활약했다.

중앙선을 넘나든 부동의 리베로

사진/ 월드컵 8강전 대스페인 경기에서 홍명보가 승부차기 마지막 기커로 나와 4강 진출을 확정하는 골을 넣고 기뻐하고 있다. (한겨레 김봉규 기자)
축구 관계자들은 지난 6월 월드컵의 가장 큰 소득은 한국 축구가 자신감을 얻었다는 것을 꼽는다. 이전까지 국가대표팀이 유럽이나 남미의 강팀들과 경기할 때 한국 수비수 가운데 공을 자신 있게 앞으로 몰고 나오거나 패스하는 선수는 홍명보밖에 없었다. 다른 수비수들은 대개 공을 옆으로나 뒤로 돌렸다. 패스를 앞쪽으로 잘못하다 빼앗겨 개인기가 월등한 상대방에게 돌파당하면 실점 책임을 져야 했기 때문이다.

홍명보가 밝힌 좌우명은 일심(一心)이다. 하나의 일에 집중한다는 뜻이다. 그는 지금까지 축구 외에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린 적이 없다. 축구팬과 축구인들은 남다른 경험을 쌓은 홍명보가 선진축구를 체계적으로 배워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닌 세계적인 축구 지도자가 되기를 바란다. 이제는 거스 히딩크 감독 같은 명장이 국내 축구인 가운데서 나와야 한다. 더 이상 K리그에서 검은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뛰는 홍명보를 볼 수 없어도 슬퍼할 일이 아니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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