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들이 아방궁을 덮쳤다네?
등록 : 2000-10-03 00:00 수정 :
그저 재미난 한판 축제였다. 그러던 것이 투쟁이 돼버렸다.
9월29일부터 사흘간 여성미술인 그룹 ‘입김’이 서울 종묘공원 앞에서 열기로 했던 ‘아방궁 프로젝트’가 전주 이씨 종친회와 성균관 유림들의 실력저지로 무산돼버렸기 때문이다. ‘입깁’의 회원인 아줌마 미술인 여덟 사람은 몹시 열받았다. 그래서 아방궁 프로젝트를 아예 장기화하기로 의기투합했다.
문화관광부의 후원으로 준비된 이 행사는 왕실의 지맥을 이루는 종묘공간을 ‘탄생을 관장하는 자궁’으로 재구성해보겠다는 ‘발칙한’ 시도이긴 했다. 다양한 남녀 성기 모양을 뽑기로 해 먹으며 낄낄 대고, 여성의 몸을 설치품으로 형상화해 보는 사람 무안하게 만들고, 명화들을 여성의 시각으로 패러디해서 헷갈리게 할 뿐만 아니라, 가면댄스파티에 풍선까지 터뜨려가면서 왕실 앞에서 ‘무엄하게’ 굴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름도 ‘아름답고 방자한 자궁’이라는 뜻의 아방궁으로 정하고 오랫동안 준비해왔다. 입김의 회원인 화가 제미란( )씨는 “당연한 듯이 여겨지는 일상과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주류문화를 뒤집어보자는 예술적 상상력이었다”고 기획취지를 설명한다.
그런데 이런 예술이 양반님들의 눈에는 못된 여자들의 해괴망칙한 술수로 보였던 걸까. 200여명이 훨씬 넘는 남자어른들이 몰려와 물감통을 발로 차고, 색실을 끊어내고, 작품을 집어던지고, 작가들에게 삿대질과 욕설까지 퍼부었다.
9월30일 오후 3시 ‘입김’ 회원들은 종묘공원 앞에서 “작품을 훼손하며 작가들에게 정신적인 피해를 입힌 점 등에 대해서는 적절한 법적 조처를 취할 것이며, 무산된 종묘점거 프로젝트는 장소를 이동해 취지가 훼손된 과정을 알리는 다큐멘터리들과 함께 새롭게 진행할 것”이라고 성명서를 발표했다. 제미란씨는 “견고한 물체를 잘랐을 때 드러나는 단면을 본 것 같다. 페미니스트 미술인으로서 세상에 조응해 가는 과정으로 이해한다”면서 “조만간 더 크게 선보일 아방궁 프로젝트 2탄을 기대해달라”고 기염을 토했다.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