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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꽃들이여, 평화의 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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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0-2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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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여성들 금강산에서 57년만의 해후… 차이를 뛰어넘는 통일의 디딤돌 다짐

사진/ 남북여성들이 손을 맞잡고 통일을 노래하고 있다. 지난 10월 17일 금강산의 김정숙 휴양소에서 열린 통일대회 폐막식. (통일뉴스 제공)
금강산 한켠 자락에 적막하게 서 있는 김정숙 휴양소는 오랜만에 사람의 온기가 묻어나는 10월을 맞았다. 10월16일부터 17일까지 열린 남북여성통일대회에 남과 북, 해외에서 온 여성 700여명의 웃음과 발길이 북적인 탓이다. 행사는 6·15 남북공동선언 이행과 평화를 위한 여성의 역할을 주제로 해 첫쨋날에는 개막식·토론회·전시회·유희오락경기, 둘쨋날에는 부문별 상봉, 예술공연, 폐막식, 공동산행 등으로 이어졌다.

낯선 만남에 체제의 벽 실감

분단 57년 만에 이뤄진 남북여성들의 해후는 참가자의 규모만큼이나 다양한 감흥을 만들어냈다. 먼저 연설에 나선 북쪽의 박순희 여성동맹위원장은 “지난날 언제나 그늘에서만 살아가던 여성들이 오늘은 당당히 나라의 통일문제 해결의 주인으로 나서 역사의 자랑찬 장을 새기고 있다”고 감회를 풀어냈다. 남쪽의 은방희 회장은 “6·15 공동선언을 이행하기 위해 온 겨레가 끊임없이 노력하는 이때를 여성들이 민족의 화해와 단합에 기여하는 기회가 되게 하자”고 강조했다. 김소자 해외대표는 “봉건의 질곡과 식민지의 멍에, 전쟁의 참화와 분열의 장막 속에서 시달려온 우리 여성들이 오늘은 평화를 위해, 통일을 위해 모였다”며 감격해했다. 토론회에서 특별히 북쪽 여성들은 한반도(조선반도)에서의 새 전쟁을 막고 평화와 안전을 위한 여성들의 노력을 힘주어 강조했고, 남쪽은 ‘평화의 춤을 너울너울’이라는 시로 화답했다.


분단 반세기는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어서 다양한 형태의 만남은 서로 얼마나 많이 달라졌는가, 또는 얼마나 잘못 인식해왔는가를 확인시켜 주었다. 먼저 남북은 체제 차이의 엄청난 벽을 실감해야 했다. 북쪽 참가자들은 그들 특유의 지도자 찬양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곤 해 남쪽 참가자들의 인내심을 자극하고 당황하게 했다. 북쪽이 미국에 대해 강한 반미감정을 품고 있음에도 비교적 많은 외래어를 섞어 사용하는 남쪽 여성들의 표현 방식은 북쪽의 이해를 어렵게 하고 정서를 자극했다.

남북 사이의 문화 차이, 사회발전 단계의 차이 등으로 상대방 문화에 대한 이해에서 문제가 일어나기도 했다. 북쪽 여성들은 여성현실을 고발한 남쪽 여성 미술전의 내용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으며, 남쪽은 사회적 해방을 이룩했다면서도 전통적 현모양처상을 받아들이고 <여성은 꽃이라네>를 노래로 부르는 북쪽 여성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여성문제에 관한 한 남북은 아직 공통 개념이나 의사소통의 코드를 갖고 있지 못했다.

우리는 분단의 세월이 빚어놓은 현격한 차이가 있음에도 여전히 남북은 하나의 단위로 분류될 수 있는 언어와 음식문화, 놀이문화, 정서를 공유하고 있었다. 북쪽 여성들의 세심한 행사준비는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여성의 평화적 힘을 살려내자며 비둘기 날리기 행사를 준비한 북쪽은 비둘기를 안고 있는 남쪽 여성들의 옷을 더럽힐까봐 비둘기 발을 씻기고 또 씻겼다고 했다.

57년 만의 만남은 이렇게 감격과 함께 낯섦·동질감·불편함·안타까움·감동·결의 등이 교차하는 복잡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복잡한 정서는 ‘차이의 존중과 관용’, ‘문화적 특수성의 인정’, 그리고 ‘다른 것과의 공존’이라는 화두와 ‘그것의 진정한 의미의 천착’이라는 진지한 물음 앞에 우리를 불러 세웠다.

비둘기 발을 씻기는 심정으로…

10월17일 저녁 6시, 남쪽 대표단을 태운 춘향호는 북쪽 여성들의 따뜻한 전송을 받으며 남으로 향했다. ‘우리도 분단의 땅에 평화의 작은 길을 내고 간다’는 성취감이 배안의 참가자들을 감싸안았다. 그러나 그 시각 상황실에는 북의 핵개발 계획 시인 소식이 전해지면서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거센 풍랑에 부닥쳐 요동치며 힘겹게 분단의 강을 건너가는 한반도호 돛단배가 연상되었다. 이번 핵사태는 거대한 암초여서 돛단배가 파손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찾아들었다.힘이 빠질 때마다 힘을 주는 경구를 다시 읊조렸다. “불가능한 것을 지향하지 않는 한 가능한 것마저 이룰 수 없다.”(막스 베버)

여성들은 지금 남북여성대회의 결의를 실천해야 할 준엄한 요구 앞에 서 있다. 이번 핵사태가 한반도 전쟁의 불씨가 되기 전에 평화적 해결을 찾도록 시민적 요구를 모을 때다. 여성들은 국내외 시민사회와의 연대를 모색하고 힘을 모아 거부할 수 없는 평화의 물결을 만들어 전쟁을 막는 평화의 힘을 발휘할 때다.

이김현숙/ 2002 남북여성통일대회추진본부 상임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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