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여성의 성적 착취 담은 충격 보고서… 인신매매 소굴로 국제사회에 망신살 뻗쳐
충격적인 보고서 한편이 10월16일 공개됐다. 국제이주기구(IOM) 서울사무소가 IOM 본부에 보낸 ‘한국으로 인신매매된 필리핀 피해자 조사보고서’이다. 보고서에는 4월부터 6월까지 경기도 동두천의 한 클럽에서 노예매춘을 강요당한 필리핀 여성의 증언과 일기가 함께 담겨 있다. 같은날 필리핀 대사관쪽은 피해 여성들을 대신해 업주들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내겠다고 밝혔다.
이미 지난 7월 11명의 피해 여성들은 필리핀 대사관과 IOM 서울사무소의 도움으로 임금을 돌려받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8월에는 이들을 감금한 채 성매매를 강요한 업주 두명이 형사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 사회봉사명령 80일이라는 터무니없이 관대한 처벌결과에 대해 필리핀 대사관쪽은 다시 한번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이번 손해배상소송에는 “성적 학대에 대한 정신적 보상”과 함께 “필리핀 여성들의 인신매매와 인권유린에 대한 경종”을 울리려는 필리핀 정부의 의지가 반영돼 있다. 필리핀 대사관 레이델루스 콘페리도 노무관이 조사한 사실을 토대로 사건의 경위를 소개한다.
노예매춘을 누구도 막지 않았다
지난 5월31일 필리핀 대사관으로 자신을 미스터 임이라고 밝힌 한 남자가 찾아왔다. 그는 필리핀 여성들이 동두천 미군기지촌의 한 클럽에서 노예매춘을 강요당하고 있다는 내용의 제보를 해왔다. 자신은 필리핀 현지에서 그 여성들을 모집한 장본인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클럽 업주와의 갈등으로 대사관을 찾은 것으로 짐작되는 임씨는 그 뒤 증거수집에 협조하지 않고 발을 뺐다. 임씨의 신원과 필리핀 현지 인력송출업체의 관련 여부를 파악한 필리핀 대사관은 한국 경찰청에 요청해 6월17일 밤 10시께 클럽을 급습했다.
피해자들은 여권을 빼앗긴 채 클럽 2층에 감금돼 살고 있었다. 또한 필리핀에서 소개받았던 것과는 달리 본인의 의사에 반해 성매매를 강요당했다. 1층 클럽에서 하루 규정량의 음료수를 팔지 못하거나 손님에게 무릎 춤 등 성적 서비스를 제대로 제공하지 않으면 벌을 받았다. 다음날 아침 8시까지 줄곧 서 있어야 했고 업주는 이들을 때리거나 의자를 집어던지기도 했다. 또한 이들은 2층에 자리잡은 VIP룸에서 성매매를 해야 했다. 영업이 끝난 뒤에는 인근 모텔에서 또 성매매를 해야 했다. 거절하면 곧바로 욕설과 구타가 날아왔다. 이들을 문제의 클럽에 보낸 흥행후원사(프로모션)는 업주와 한통속이었다. 프로모터는 업주의 형이었고 사무실도 클럽의 2층에 자리잡고 있어 이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했다. 밥값으로 일주일에 1만원씩 지불돼 피해 여성들은 쌀과 소시지와 라면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다. 애초 약속한 월 480달러는 지불되지 않았고 화대의 50%를 준다는 말과는 달리 성매매 뒤 한번도 돈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경찰 조사 결과 11명의 여성 가운데 2명은 위조여권을 갖고 있었다. 그 중 한명은 17살로 미성년자였다. 이들을 모집한 프로모션은 필리핀을 피해 타이 방콕에서 비자를 신청했다. 필리핀 정부가 예술흥행 비자(E-6)를 받아 외국으로 나가는 이들을 자격증 소지자로 제한하고 있는데다, 한국의 제3국 재외공관에서는 확인 절차 없이 서류만으로 손쉽게 비자를 발급해주는 탓이다.
다음날 오후까지 꼬박 진행된 경찰 조사 뒤, 필리핀 대사관쪽은 다시 한번 놀란다. 한국 경찰이 이들 가운데 9명은 성매매를 한 사실을 인정했으므로 한국법(윤락행위등 방지법)에 저촉되니 출입국관리소로 가서 추가조사를 받아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필리핀 대사관쪽은 이들은 피해자이지 범죄자가 아니라고 항의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대사관쪽은 부랴부랴 한국 정부에 피해자들을 보호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숨가쁜 시간이 흐른 뒤 필리핀 대사관은 이들을 데려올 수 있었다. 대신 출입국관리소에서 이들을 조사하고자 할 때는 언제든 보낼 것과 필리핀 여성들은 거취와 관련해 세 가지 방법 중 하나를 사흘 내로 택하기로 약속해야 했다.
출입국관리소가 피해 여성들에게 제안한 옵션은 △2주 안에 필리핀으로 돌아가거나 △같은 프로모션 소속으로 비자 만기일까지 다른 클럽에서 일하거나 △2주 안에 다른 프로모션을 찾아 다른 클럽에서 일할 것 등이었다. 세 가지 모두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밀린 임금을 받지 못한 상황인데다 2주 안에 법적 보호를 위한 증거를 마련하기란 불가능했다.
매춘에 관대한 한국 정부의 무관심
업주이자 프로모터인 박씨는 필리핀 대사관으로 찾아와 자신의 프로모션에 계속 소속돼 다른 클럽에서 일한다면 밀린 임금을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돈을 갖고 대사관으로 오기로 한 날 박씨는 교통사고가 났다며 오지 않았다. 필리핀 대사관은 그동안의 조사결과를 검찰에 알렸고,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에서 7월4일 공익소송(소송대리인 이상희 변호사)으로 이를 맡았다. 소송을 제기하자 박씨 형제는 밀린 임금을 갚았고 7월18일 피해 여성들은 본국으로 갈 수 있었다. 업주 박씨 형제는 한달 뒤 성매매 강요로 형사처벌을 받았으나, 결과는 터무니없이 관대했다. 이들은 지금도 동두천에서 영업을 하고 있다.
이번 사건은 복마전처럼 얽힌 국제 인신매매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일 뿐이다. 필리핀 대사관이 발벗고 나서지 않았다면 피해 여성들은 돈 한푼 못 받고 본국으로 추방당했거나 계속 노예매춘에 내몰렸을 것이다. 사건의 경과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한국 정부가 인신매매 피해자들을 구제하고 보호하는 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IOM 서울사무소 고현웅 소장은 “정부 관계자들은 피해 여성들이 속아서 인신매매되고 자신의 의사에 반해 성적 착취를 당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고 소장은 E-6 비자 발급의 관리를 강화할 것과 옛 소련지역에서 한국으로 인신매매되는 여성들의 실태를 조사할 것을 한국 정부에 긴급 제안했다. 이들은 필리핀 여성들과는 달리 영어소통마저 어렵고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어 극단적인 성착취에 내몰릴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2001년 기준 E-6 비자로 한국에 들어온 여성(6971명) 가운데 과반수는 러시아를 포함한 옛 소련계 여성들이다.
사건이 터지고 나자 법무부는 재외공관에서 E-6 비자를 발급할 경우 영사가 당사자를 직접 면접하도록 지시를 내렸다고 밝혔다. 여성부는 11월부터 전국 여성긴급전화 1366에 동시통역시스템을 도입해 운영할 계획이다. 그러나 해외 현지에서 인력을 모집하는 업체와 사실상 이들을 한국의 클럽에 넘기는 프로모션에 대해서는 인신매매 방지를 위한 조처가 내려졌다는 소식이 없다. 이들을 관리감독할 책임은 노동부와 문화관광부에 있다.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사진/ 필리핀 여성들은 예술흥행 비자를 받고 국내에 들어와 노예매춘을 강요당했다.

사진/ 국제이주기구 서울사무소가 작성한 필리핀 여성 인신매매 조사보고서.

사진/ 미군 기지촌에서 성적 인신매매가 공공연히 이뤄지고 있음에도 정부는 관리감독을 소홀히 하고 있다. 기지촌 성매매 근절을 위한 토론회 모습. (박승화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