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라한 전태일기념관, 감옥 속에 남겨진 단병호… “천만 노동자는 다 뭐하고 있는가”
1994년 1월 29일, 전태일문학상 시상식이 열린 민예총 강당에는 전태일 열사의 대형 초상화가 정면에 걸려 있어 진작부터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이소선 여사가 인사말을 시작했다.
“전태일문학상 운영위원회의 위원장인 문익환 목사님은 지금까지 다섯번이나 전태일문학상 행사가 열리는 동안 한번도 직접 상을 주지 못하셨습니다. 그때마다 감옥에 갇히셨거나 수배된 상태였습니다. 얼마 전 문익환 목사님이 석방되셔서, 이제야 문익환 목사님이 전태일문학상을 직접 주실 수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문익환 목사님이 단 며칠만 더 살아계셨어도…. 오늘 이 자리에 오셔서 상을 직접 주실 수 있었을 텐데….”
잊히지 않는 그 손길과 몸짓
이소선 여사는 목이 잠겨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했고, 객석에 앉은 사람들도 눈물을 찍어내었다. 수상소감을 말할 차례가 된 나는 나가서 사람들 앞에 섰다. “노동현장에서 피땀을 흘리다가, 징역을 살다가, 죽지 않을 만큼 얻어맞다가, 피가 마르는 토론으로 수많은 밤을 지새운 10여해 세월을 뒤로 한 채, 다시 소시민의 삶으로 돌아간 수만명의 현재와 미래는 지난 시기의 고통스러운 삶과 도대체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요? 우리의 눈물겨운 삶은 지금 잠시 보이지 않을 뿐이지, 거대한 강물로 우리 정서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을 겁니다. 그 물은 언젠가 다시 얼음을 녹이고 출렁이는 강물로 우리 앞에 나타날 겁니다. 앞으로 글을 쓸 기회가 주어지면 그 정서에 다가서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짧은 수상소감을 말하면서 나는 창피할 정도로 내내 울먹거렸다.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내 자리로 돌아오는데 이소선 여사가 통로로 달려나오더니 나를 얼싸안았다. “고생 많이 했어. 정말 고생 많이 했어.” 나의 등을 두드려주던 그 손길과 사람들을 헤치고 달려온 어머니의 그 몸짓을 나는 8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10월18일에 열리는 ‘희망 콘서트, 전태일의 꿈’ 공연과 관련해 전태일기념사업회에서 일하는 후배들과 함께 이소선(72) 여사를 오랜만에 찾아뵈었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사무실에 들어서는 우리들에게 이소선 여사는 “나 요즘 인터뷰 같은 거 잘 안 해. 너희들이니까 하는 거야. 다른 사람들이 인터뷰 하자고 해도 못하게 하라 했더니, 지들이 하자고 하네”라고 하면서도 웃으며 맞으신다. 명색이 노동문제연구소장인 나에게는 당장 불호령이 떨어졌다. “며칠 전에도 단병호 위원장 면회 갔다 왔어. 단 위원장은 자기 걱정하지 말고 어머니 건강이라도 챙기셔서 오래오래 사시라고, 그게 자기 보람이라고 했지만, 나는 단 위원장을 거기 그렇게 오래 놔두는 것이 정말 마음이 아파. 천만 노동자가 다 뭐하고 있느냐고… 쉽게 나올 수 있는 사람을… 정말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못하고… 그것만 생각하면 속이 상해 견딜 수가 없어. 천만 노동자의 절반만이라도 ‘우리도 같이 단 위원장과 함께 징역 살겠다’고 가서 싸워봐. 우리 모두를 위해 싸우다가 들어간 사람인데, 우리 모두가 하루만 집에서 나오지 말아봐. 당장 해결되지. 우리가 지금 작은 거 생각하느라고 큰 거를 못하는 거야.” 이야기의 화살이 정치인들에게 돌아갔다. “노동자가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나라가 이만큼이라도 큰 거잖아. 그런데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에 놓이니까 노동자부터 해고하고, 그런 상식 없는 정치를 하면 되겠느냐고 막 따졌더니 대통령이 ‘그래도 합법적 단체로 인정은 해줬잖아요’ 하는 거야. 그래서 ‘50년 만에 정권교체를 했다면서 그것 하나도 못한다면 말이 되느냐, 앞으로는 어떻게 도와줄 거냐?’고 물었지.” 내가 “대통령을 청와대에 가서 만나셨어요?”라고 물으니 “가서 만났지 그럼 대통령이 우리집으로 왔겄소?”라며 웃으신다. 대통령을 만나서 따지다
“미우나 고우나 뭔 일이 있으면 가끔 오라고 하잖아. 한번은 가보니까 얘기 다했다고 가만히들 앉아 있기에 내가 ‘대통령, 이리 좀 앉으시오. 이제부터 나하고 담판을 지읍시다’ 하고 대통령 무릎을 돌려 앉혔어. ‘왜 우리 죽은 아이들 명예회복이 안 됩니까? 우리가 농성을 400일이나 했는데도… 힘이 없어서 안 합니까? 해주기 싫어서 안 합니까? 돈이 없어 안 합니까? 미워서 안 합니까? 이승만 대통령이 왜 야자수 그늘 밑에 가서 죽었는지 아시오? 여의도 1번지 한번 가보시오. 김대중 타도 소리가 하늘에 메아리쳐도 누가 말해주는 사람 있습디까? 직속부하들이 눈과 귀를 막았으니 어떻게 알겠소?’ 마구 그랬더니 대통령이 옆에 있는 비서들과 국회의원들에게 ‘당신들은 잘 돼간다고 하더니, 지금 어머니 말씀 들어보면 아무것도 안 돼 있는 거 아니오?’라고 꾸짖더라고. 옆에 있는 실세 한 사람이 ‘예전에 야당 생활하실 때는 어머니라고 불러도 괜찮았지만, 이제 대통령이 되셨으니 어머니라고 부르시는 것은 덕이 안 된다고 봅니다’ 그런 말을 하더라고. 그래서 나는 ‘나 어머니 소리 안 들어도 됩니다. 누가 나더러 어머니라고 하라고 했소? 당신들이야말로 누구누구 국회의원 시킵시다 그딴 거 말고 대통령을 위해서 한 게 뭐 있소?’ 막 해댔더니 대통령이 ‘정말 그러냐? 정말 나에 대한 원성이 하늘에 메아리치고 있느냐?’고 웃으며 묻더라고.”
뒤에서 국회의원들이 “어머니, 이제 그만 하시오. 벌써 45분이나 그러셨소”라면서 옷을 잡아끌었고 그 사건이 있고 나서는 어쩌다가 대통령을 만날 일이 있어도 이소선 여사의 자리는 대통령과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배치되었다.
“그 3일 뒤인 12월28일 국회에서 그 법이 통과된 거야. 민족·민주유공자 묘지도 해준다고 다 다짐을 받았어. 그러고 나서 지금 지역주민들이 반대를 한다 어쩐다 하면서 지지부진한 거지. 지금 정부가 역사의 심판을 제대로 받으려면 임기 끝나기 전에 그거 하나는 정말 제대로 해놔야 돼.”
평소부터 궁금한 것을 나는 결국 뻔뻔하게 묻고야 말았다. “전태일 열사 임종 순간을 좀 설명해주세요.” 이소선 여사는 손사래를 친다. “그 얘기를 하려면, 내 속에 구정물이 가라앉아 있는 걸 다 헤집어서 퍼내야 하니까 머리가 다 돌아. 그러면 나는 또 며칠 동안 잠을 못 자.” 몇번이나 망설이다가 말을 꺼내셨다.
“태일이가 ‘나는 절대로 살아날 수는 없어요. 5분 있다 죽을지 3분 있다 죽을지 모르니, 엄마, 내 말 잘 들으세요’ 하더니 ‘노동자들은 캄캄한 암흑세계에서 일하고 있는데, 나는 보다가 더 볼 수가 없었어요. 내가 죽어서 그 캄캄한 암흑세계에 작은 창구멍을 하나 낼 테니까, 내가 죽으면 노동자와 학생들이 모두 힘을 합해 그 창구멍을 조금씩 넓히는 데 힘을 보태주세요. 그러면 빛이 보일 거예요. 어떻게든 하나가 돼서 싸워야 돼요. 둘이 돼도 안 돼요. 어머니가 이걸 실천하지 않으면, 나를 지금까지 키운 것이 위선이 되는 거예요. 위선자가 되지 말고 꼭…’ 그렇게 ‘꼭…꼭…’ 할 때마다 피가 목에 고여서 말을 못하는 거야. 칼로 목 아래를 따니까 피가 풍풍 나와. 태일이가 ‘내가 부탁하는 말 꼭…꼭…’ 할 때마다 피가 뿜어져나왔어.”
전태일 열사 임종의 순간
어머니는 그 아들의 부탁을 정말 훌륭하게 들어주셨다. 10년쯤 전에 내가 본 통계만으로도 우리가 모두 ‘어머니’라고 부르는 이소선 여사가 경찰서에 잡혀간 횟수는 250회를 넘었다. 이 땅에서 ‘노동자의 어머니’로서 살아가는 것은 그만큼이나 눈물겹다.
집에 돌아와 다시 들어본 녹음 테이프에는, 인터뷰 도중 내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이소선 여사가 전태일기념사업회에서 일하는 이형숙 사무국장과 김수정 간사에게 속삭이듯 하는 말이 녹음돼 있었다. “너희들 도대체 어떻게 하고 사느냐. 나는 겁나서 못 가본다. 걱정스럽고 힘들게 일하는데 내가 가서 뭔 할 말이 있나 싶어서….”
이 글을 읽는 사람들 가운데 자신이 조금이라도 진보적 생각을 하며 살아간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있으면 전태일기념관에 한번 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전태일 열사의 기념관을 그 모양으로밖에 유지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 진보운동의 수준이다. 그런 마당에 내가 낸 세금으로 박정희기념관을 짓는다고 생각하면 길을 걷다가도 가슴이 막힌다. 전태일기념관을 나랏돈으로 번듯하게 지을 수 있는 날은 언제일까.

사진/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 자신이 조금이라도 진보적 생각으로 살아간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전태일기념관에 한번 찾아가 보라고 권하고 싶다. (하종강)
이소선 여사는 목이 잠겨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했고, 객석에 앉은 사람들도 눈물을 찍어내었다. 수상소감을 말할 차례가 된 나는 나가서 사람들 앞에 섰다. “노동현장에서 피땀을 흘리다가, 징역을 살다가, 죽지 않을 만큼 얻어맞다가, 피가 마르는 토론으로 수많은 밤을 지새운 10여해 세월을 뒤로 한 채, 다시 소시민의 삶으로 돌아간 수만명의 현재와 미래는 지난 시기의 고통스러운 삶과 도대체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요? 우리의 눈물겨운 삶은 지금 잠시 보이지 않을 뿐이지, 거대한 강물로 우리 정서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을 겁니다. 그 물은 언젠가 다시 얼음을 녹이고 출렁이는 강물로 우리 앞에 나타날 겁니다. 앞으로 글을 쓸 기회가 주어지면 그 정서에 다가서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짧은 수상소감을 말하면서 나는 창피할 정도로 내내 울먹거렸다.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내 자리로 돌아오는데 이소선 여사가 통로로 달려나오더니 나를 얼싸안았다. “고생 많이 했어. 정말 고생 많이 했어.” 나의 등을 두드려주던 그 손길과 사람들을 헤치고 달려온 어머니의 그 몸짓을 나는 8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10월18일에 열리는 ‘희망 콘서트, 전태일의 꿈’ 공연과 관련해 전태일기념사업회에서 일하는 후배들과 함께 이소선(72) 여사를 오랜만에 찾아뵈었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사무실에 들어서는 우리들에게 이소선 여사는 “나 요즘 인터뷰 같은 거 잘 안 해. 너희들이니까 하는 거야. 다른 사람들이 인터뷰 하자고 해도 못하게 하라 했더니, 지들이 하자고 하네”라고 하면서도 웃으며 맞으신다. 명색이 노동문제연구소장인 나에게는 당장 불호령이 떨어졌다. “며칠 전에도 단병호 위원장 면회 갔다 왔어. 단 위원장은 자기 걱정하지 말고 어머니 건강이라도 챙기셔서 오래오래 사시라고, 그게 자기 보람이라고 했지만, 나는 단 위원장을 거기 그렇게 오래 놔두는 것이 정말 마음이 아파. 천만 노동자가 다 뭐하고 있느냐고… 쉽게 나올 수 있는 사람을… 정말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못하고… 그것만 생각하면 속이 상해 견딜 수가 없어. 천만 노동자의 절반만이라도 ‘우리도 같이 단 위원장과 함께 징역 살겠다’고 가서 싸워봐. 우리 모두를 위해 싸우다가 들어간 사람인데, 우리 모두가 하루만 집에서 나오지 말아봐. 당장 해결되지. 우리가 지금 작은 거 생각하느라고 큰 거를 못하는 거야.” 이야기의 화살이 정치인들에게 돌아갔다. “노동자가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나라가 이만큼이라도 큰 거잖아. 그런데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에 놓이니까 노동자부터 해고하고, 그런 상식 없는 정치를 하면 되겠느냐고 막 따졌더니 대통령이 ‘그래도 합법적 단체로 인정은 해줬잖아요’ 하는 거야. 그래서 ‘50년 만에 정권교체를 했다면서 그것 하나도 못한다면 말이 되느냐, 앞으로는 어떻게 도와줄 거냐?’고 물었지.” 내가 “대통령을 청와대에 가서 만나셨어요?”라고 물으니 “가서 만났지 그럼 대통령이 우리집으로 왔겄소?”라며 웃으신다. 대통령을 만나서 따지다

사진/ 유가족협의회에서 박종철군 아버지 박정기씨. 양영진군 어머니 정복순씨, 이한열군 어머니 배은심씨, 조성만군 아버지 조찬배씨와 함께(왼쪽부터). (하종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