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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안영춘] 남편, 아니 노동자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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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0-0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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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의료원 노조원인 아내와 함께한 기나긴 파업투쟁, 눈물겨운 연대와 승리

농성에 참여한 경희의료원 노동자와 가족들. 왼쪽이 안영춘 기자. (김종수 기자)
기자는 기사로 말한다. 노동자는 파업으로 말한다. 가족은 사랑으로 말한다. 그렇다면 기자이자, 노동자이면서, 파업하는 노동자의 남편이기도 한 사람은 무엇으로 말해야 하는가. 봄에서 여름으로, 다시 가을로, 그렇게 계절이 세번 바뀌는 동안, 나는 나에게 던져진 복잡하고도 복합적인 물음에 답하려고 노력했다. 아니, 나 자신도 잘 모르는 그 답을 찾으려고 안절부절못했다. 봄은 짧았고, 여름은 무덥고 지루했으며, 가을은 어느덧 깊어간다. 이 글은 그 답을 찾아나가는 내 기나긴 여정의 기록이다.

“당신 남편 맞아?”

경희의료원은 서울에 있는 대형 대학병원이다. 아내(35)는 그 병원의 평간호사다. 2002년 5월23일, 아내의 파업은 ‘조용히’ 시작되었다. 물론 조용한 건 파업이 아니라 세상의 관심이었다. 아내를 비롯한 83개 병원의 노동자 2만5천여명은 ‘불법’(필수공익사업장인 병원에서의 파업은 그 자체가 불법이다)이라는 멍에를 뒤집어쓰고 한날 한시에 제각기 천금만한 무게의 실존적 결단을 내렸으리라. 하지만 세상은 무관심했다. 세상은 애초 그런 일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을뿐더러, 때가 때이기도 했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대의 축제라는 월드컵 개막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아내와 병원 노동자들의 실존적 결단은 월드컵의 집단적 열기에 ‘쑥스럽게’ 무장해제되었다.


<한겨레21> 사회팀장(당시)이자, 전국언론노동조합 조합원이며, 병원 노동자의 남편이기도 한 내게도 파업은 큰 관심거리가 못 되었다. 월드컵 기획을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탓도 있었지만, 세계적 축제를 앞두고 노·사·정이 서둘러 사태를 잘 해결할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상은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많은 병원에서 파업은 속속 종결되어갔다. 경희의료원·가톨릭중앙의료원을 비롯한 몇몇 병원에서 상황이 다소 길어졌지만, 전체 정세는 이미 가닥을 잡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5월 말, 나는 아내의 파업을 기자라는 직업적 눈으로 ‘관전’하거나 ‘분석’하고만 있었다.

하지만 월드컵이 개막해도 아내의 파업은 끝나지 않았다. 6월4일 밤, 파업 13일째를 넘긴 아내도 한국 대표팀의 월드컵 첫 승을 지켜보며 기뻐했다. 주심의 경기 종료 호각소리가 울리자, 나는 아내와 아이들을 와락 끌어안았다. “파업 문제도 한국 축구처럼 잘 될 거야.” 나는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본디 덕담에는 무게가 실리지 않는 법이다. 내가 던진 덕담도 공처럼 가벼운 것이었다.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아내도 내 덕담의 무게를 간파한 듯 가볍게 되받았다. 한국 대표팀은 승승장구했다. 나는 경기마다 회사 사람들과 열심히 내기를 걸었다. 당시 나의 내기는 아내의 파업보다 더 중요한 문제였는지 모른다. 그리고 나는 열심히 월드컵 기사를 써댔다.

한국 대표팀의 월드컵 4강 진출에 내 눈이 충혈되어갈 무렵, 아내는 말했다. “한겨레가 이래도 되는 거야? 월드컵 기사로 도배를 하면서 한달 넘게 계속되는 병원 파업 기사는 한줄도 안 내보내는 게 말이 돼?” 결혼 10년이 다 돼가도록 내 일 자체나 한겨레 지면을 비판한 적이 없던 아내였다. 나는 “병원 파업기사를 아주 안 다룬 건 아니다. 우리 생애에 이런 축제를 다시 경험할 수 있을 것 같으냐”고 응수했지만, 아내의 ‘도발’은 적잖은 충격이었다. “그래. 요즘 병원 분위기는 어때?” 나는 겨우 그렇게 물었고, 이번에는 아내가 충격을 받은 듯했다. “당신, 남편 맞아?”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삭발한 후배를 보며

가족대책위원회가 모여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가족들은 주말마다 모임을 이어갔다. (김종수 기자)
월드컵이 끝나고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었다. 난 비로소 병원 파업에 신경을 기울일 수 있었다. 협상은 교착상태였다. 병원쪽은 파업을 기다렸다는 듯 대화를 끊었다. “불법파업 세력과는 대화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월드컵 기간에 파업 지도부가 단식투쟁까지 벌였지만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았다. 가족들도 가만두지 않았다. 집으로는 우편물이 계속 날아들었다. 모든 우편물은 당장 복귀하지 않으면 “법과 원칙대로” 해고도 하고, 손해배상도 청구하고, 재산가압류도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중간 관리자도 집으로 전화를 걸어 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난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7월도 다 지나고 있었다. 시간은 사태 해결의 변수가 되지 못했다. 파업은 두달을 넘어섰다. 병원은 노조에 완전한 백기를 요구하는 듯 보였다. 일찌감치 파업 지도부에는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다. 병원은 일반 조합원들까지 잇따라 형사고소했다. 우리집에는 가압류까지 들어왔다. “나 때문에 우리 가족 모두 길거리에 나앉는 것 아닐까.” 아내는 갈등했다. 나는 “저들이 우리를 막다른 길로 몰면 우리도 막다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며 아내를 독려했다. 그러나 나는 이 사태에 대해 기사 한줄 쓸 수 없었다. 병원의 시달림을 받은 가족으로서 기사를 쓴다는 건 분명한 제척 사유였다. 나는 기자로서 무력감에 빠졌다.

7월 말이 되어 노조가 가족들을 초대했다. 병원쪽 연락만 받던 가족에게 노조의 존재는 오히려 생경했다. 가는 길은 멀었다. 두딸을 데리고 버스를 갈아타며 1시간 반 만에 경희의료원에 도착했다. 내 아내가 날마다 이 먼 길로 출퇴근을 하고, 이제는 힘겨운 싸움을 하러 같은 길을 다닌다는 걸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했다. 그러나 병원 로비 농성장은 활기가 넘쳤다. 노동자들의 눈빛은 낙관적이지는 않았지만, 질 수 없는 싸움을 치르는 사람의 눈빛으로 형형했다. 파업 노동자들과 가족들은 함께 비디오를 보았다.

노동자들은 총장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대학 본관 진입을 시도했다. 그런데 갑자기 정문쪽에서 구사대가 새까맣게 몰려들었다. 처절한 몸싸움이 시작되었다. 학교 직원들이 소화전 호스로 노동자들에게 물과 분말을 마구 뿌려대는 장면도 있었다. 여성 노동자들은 울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울었다. 나는 비디오를 본 가족들이 더는 방관자가 될 수 없을 것 같아 두려웠다. 그렇게 뜨거운 8월 한달도 다 가고 8월30일, 마침내 병원 파업이 100일을 맞았다. 고맙게도 <한겨레21> 후배들은 이를 특집기사로 다뤄주었다.

경찰력은 연대를 꺾지 못한다

경희의료원 노동자들의 투쟁에 연대의 물결이 이어졌다. 9월18일 협상은 타결되었으나 구속 노동자 석방을 위한 가대위의 활동은 계속된다.
파업 100일째 되던 날 파업 지도부 전원과 평조합원 여러 명이 삭발을 했다. 거기에는 아끼는 여자 후배도 있었다. 나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형.” 그는 “이렇게라도 해야만 나를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며 웃어보였다. 나는 머리카락이 ‘멀쩡한’ 아내를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으나 이내 마음은 복잡해졌다. 그 후배는 우리 부부와 동행해 미장원에서 거친 머리칼을 깨끗하게 밀었고, 머리를 가릴 모자도 샀다. 여자들은 모자를 고르는 데 많은 시간을 들였다. 나는 삭발 뒤에도 변함없는 그들의 일상성에 놀라워하면서도, 한편으로 안도했다. 그들은 언제까지라도 파업을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아 보였다.

가족들은 주말마다 모임을 이어갔다. 그리고 9월8일 경희의료원 장기 파업사태 해결을 위한 가족대책위원회(가대위)가 공식 출범했다. 가대위는 이날 모든 파업 조합원들을 앞에 두고 집회를 진행했다. 가대위는 외인부대였지만 다양한 사회 영역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만큼 집회 또한 다양한 내용으로 채워졌다. 특히 가대위 공동대표를 맡은 고영재(33)씨는 탁월한 연설 솜씨와 일주일 휴가까지 내는 헌신성으로 가대위를 끌어나갔다. 나는 가난한 나의 글재주를 쥐어짜 의료원장에게 보내는 편지글을 낭독했다. 내 목소리는 간신히 내 목젖을 지나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그러나 파업 조합원들과 가족들은 큰 박수로 화답했다. 나는 그들을 돕고 싶었으나, 오히려 그들로부터 위로받고 있었다.

파업현장에 곧 경찰력이 투입될 거라는 얘기가 돌기 시작했다. 경찰력이 투입되면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 예상할 수 없었다. 가대위 사람들은 열심히 사이버 홍보전을 벌였다. 나는 파업 노동자 가족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지 못해 노심초사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친구와 동료, 가까운 취재원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파업채권(<한겨레21> 427호 ‘사람과 사회’ 참조) 구입을 권했다. 나는 이메일을 보내면서도 괜한 짓을 한다는 생각에 몇번이고 노트북을 덮었다. 그러나 파업 노동자 가족이라면 좌고우면할 일이 아니었다. 나는 자정이 다될 무렵 결국 ‘보내기’를 클릭했다.

이튿날 오전 이메일을 열자 수북이 쌓인 답장들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은 파업채권을 조금밖에 사주지 못하는 걸 미안해했다. 나는 그들이 미안해하는 것에 몸둘 바를 몰랐다. 그날 하루 동안 200만원어치를 팔았다. 다음날은 한 노동조합으로부터 전국 지부에서 한 계좌씩 사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미안합니다. 우리도 사정이 썩 좋지 않아서.” 난 그 노동조합 간부에게 말했다. “마음만으로도 큰 힘이 됩니다. 근데 지부가 몇 군데나 됩니까?” 그는 태연히 270∼280군데쯤 된다고 대답했다. 나는 계산을 포기했다. 아니, 파업채권은 처음부터 돈으로 계산되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내 주위의 따뜻한 연대에 경찰력 투입이 이번 파업의 큰 변수가 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9월11일 새벽, 경찰은 끝내 병원 로비를 폭력적으로 밀고 들어왔다. 철야농성 중이던 조합원들은 전원 연행되었다. 전날 철야조가 아니었던 아내는 새벽같이 병원으로 달려갔다. 나도 큰딸에게 아침을 먹여 학교에 보내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경찰은 파업 조합원들을 병원 로비에서 내모는 데 성공했을 뿐 파업 조합원들을 흩어놓지는 못했다. 업무에 복귀한 조합원 가운데 경찰 진압을 보고 분노해 농성에 재합류하는 사람도 있었다. 파업 조합원들은 학교 정문이나 본관 앞을 가리지 않고 농성을 벌였다. 병원과 공권력은 조급하게 마지막 카드를 꺼내들었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그들에게 더는 카드가 남아 있지 않았다.

가대위의 활동은 끝나지 않았다

한가위가 며칠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가대위는 9월15일 병원 앞 집회를 주최했다. 가족들의 수는 전보다 훨씬 많았다. 가대위는 한가위 때까지 협상이 타결되지 않으면 귀향을 포기하고 병원 앞에서 합동차례를 지내겠다고 선언했다. 파업 노동자와 그 가족들은 갈수록 단단해졌다. 결국 파업 120일, 공권력 투입 일주일 만인 9월18일 자정 무렵 협상은 타결되었다. 합의 내용은 여러 가지였으나 핵심은 하나였다. 노동조합을 지켜낸 것이었다. 합의내용에는 없지만 나는 기자로서, 가족으로서 내가 말해야 할 것들을 말할 수 있는 경험을 얻었다.

그러나 가대위의 활동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경희의료원 구속 노동자가 아직 풀려나지 않았고, 파업 지도부 체포영장도 철회되지 않았다. 경희의료원과 함께 파업에 들어간 가톨릭중앙의료원은 같은 날 경찰력이 투입된 뒤로도 지금까지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9월29일 가대위 사람 몇명이 모여 경희의료원 파업 지도부를 만난 뒤 가톨릭중앙의료원 노동자들이 농성을 하고 있는 명동성당을 지지방문했다. 우리는 “경희의료원 가대위가 받은 우리 사회의 뜨거운 연대가 이제 여러분들에게로 몰릴 것”이라고 말했다. 파업 노동자들은 우리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기자도 아닌, 파업 노동자의 가족도 아닌, 한 사람의 노동자로서 내가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막연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안영춘 기자/ 한겨레 민권사회1부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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