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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관념 속의 인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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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0-0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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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박승화 기자)
북한에는 인공기가 없다고 합니다. 남한에서 갖다 붙인 이름으로, 북한에서는 공화국기, 남홍색기, 홍람오각별기, 또는 삼색기라고 부릅니다.

인공기 하면 붉은색을 떠올리지만 삼색기라는 명칭에서 보듯 붉은색 외에 푸른색, 흰색이 어우러져 공화국기를 구성합니다.

푸른색은 평화, 붉은색은 사회주의 혁명의 투쟁정신, 흰색은 주권과 순수성을 뜻한다고 합니다. 오각별은 노동당의 지도 아래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인민들의 행복한 기대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부산 아시안게임이 북한의 참가로 큰 잔치가 됐지만 작은 마찰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공기 사용을 엄격히 제한하려는 당국과 시민단체, 학생들의 인공기 응원 움직임이 그것입니다.

논란은 관념 속에서 진행됩니다. 인공기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쪽은 인공기는 곧 북한이고, 북한은 적성국이거나 체제경쟁 대상이라는 등식에 입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공기는 현실의 영역에 들어와버렸습니다. 어느 것이든 현실은 복잡하며 단순논리를 거부합니다. 현실의 인공기는 관념의 인공기와 심연의 차이가 있습니다.

9월29일 부산 아시안게임 개막식장에서 펄럭이는 인공기를 처음 보았습니다. 주경기장 오른쪽에 자리잡은 북한 응원단의 손에 들린 두 손바닥 크기 정도의 깃발이었습니다. 50m 거리에서 그것은 선명하게 보이지 않고 윤곽만 드러났습니다. 이윽고 개막식 직전 응원단 앞에 너비가 2∼3m쯤 돼보이는 인공기가 4장 펼쳐졌습니다.


5대양 6대주로 여행을 다닌 영국 출신 작가 브루스 채트윈은 사랑도 여행도 첫 경험만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인공기에 대한 첫 느낌은 아무 느낌이 없었습니다. 느낌을 가져보려고 숨을 들이켰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주변 사람들도 덤덤한 표정으로 한두 마디 건넸습니다.

북한 선수단이 오고 응원단이 와서 사람이 상징을 압도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무슨 깃발을 흔들든 지금은 체육행사라는 전제를 마음에 두고 있어서일까?

충격도 호감도 아니고 그냥 무덤덤한 것은 아마 그동안의 논란이 면역성을 길러줬기 때문인 듯합니다. 몇달 전 붉은 물결로 레드 콤플렉스를 일정부분 넘어선 것도 연유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한반도의 흐름이, 남북의 현실이 50년을 붙들어맨 고정관념을 훨씬 앞질러가기 때문으로 여겨집니다.

한쪽 구석의 인공기를 빼면, 개막식장은 태극기의 물결과 ‘대∼한민국’이 압도했습니다. 10리 밖에서도 보일 거대한 태극기가 애국가의 합창 속에 게양됐습니다. 37억 아시아인들이 지켜본 개막식은 체제경쟁의 관점에서 보면 ‘태극기의 압도’입니다.

관념 속의 인공기 논란과 다른 현실의 모습입니다. 이것을 손님맞이한 주인의 예의라든지 우리가 내세우는 자유 민주체제의 장점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참 할말이 없습니다.

한겨레21 편집장 정영무 yo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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