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경찰투입, 더 큰 싸움의 시작

427
등록 : 2002-09-18 00:00 수정 :

크게 작게

충격적인 병원 파업현장 무력진압… 노-사간의 싸움은 노-정간 대결로

사진/ 보건의료노조 조합원들이 9월12일 서울 여의도에서 파업병원 경찰 투입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김종수 기자)
9월11일 새벽, 파업 112일째를 맞은 병원에 결국 경찰병력이 투입되었다. 노사 자율교섭으로 타결이 안 되어 어쩔 수 없었다는 게 정부의 설명이었다. 그러나 110여일 동안 원만한 타결을 위해 노력해온 사람들에게는 구차한 변명으로 들릴 뿐이다. 교섭이 안 되면 그 원인을 찾아 중재해야지, 노사관계 속에 경찰이 끼어들 근거와 명분은 어디에도 없다.

병원장과 신부의 ‘사전 서면승인’

파업현장 경찰병력 투입을 두고 일부에서는 ‘공권력 투입’이라고 한다. ‘경찰=공권력’이라는 등식은 일반적으로 보편타당한 개념이지만, 경찰이 군홧발로 노사현장을 유린하는 것까지 공공의 권력이 투입된 것으로 볼 수 있을까. 노동자들의 가슴에 피멍을 남긴 그들이 과연 ‘공공을 위한 권력’인가, 아니면 공공의 이익을 억압하는 ‘공공의 적’인가.


장면 하나. 무려 3천여명의 경찰병력이 들이닥친 9월11일 새벽 가톨릭중앙의료원. 경찰은 피신한 병원 노동자들을 연행하려고 성당까지 들이닥쳤다. 연약한 여성 노동자들은 십자가를 부여잡고 가톨릭에 호소했지만 끝내 무참하게 끌려나가 구속되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를 병원장과 신부가 ‘사전 서면승인’했다는 사실이다. 가톨릭의료원 안에서 가톨릭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장면 둘. 같은 시각 경희의료원. 병원쪽은 농성장 주변의 소화기를 치우고, 소방호스 부품을 빼고, 비상구 문을 봉쇄하고, 열쇠마저 다 교체했다. 농성자 퇴로를 차단하려는 작전(?)이었다. 화재라도 났다면 환자와 보호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파업을 무너뜨리기 위해 환자의 생명까지 위협하는 섬뜩한 조처도 마다지 않은 것이다. 평화운동의 선구자라는 고황재단에서 평화가 사라지는 순간이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폭력사태가 잇따랐다. 경희의료원에서는 여성 조합원 2명이 실신했고, 지원나온 학생이 코뼈가 함몰되는 중상을 입었다. 가톨릭중앙의료원에서는 여성 조합원들의 바지가 벗겨지는데도 계속 잡아끌었고, 경찰버스 안에서는 성추행 사례까지 있었다고 보고되었다. 노원경찰서에서는 알몸수색을 강요하는 인권유린 사례도 발생했다. 강제진압의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물리적 폭력보다 더욱 어이없는 건 경찰의 ‘노무관리 자원’이다. 경찰은 조서작성 과정에서 ‘파업이탈·현장복귀 각서’를 강요했다. 경희의료원에서는 병원 구사대와 연합하여 조합원들을 몰아냈고, 조합원의 병원 진입을 막기 위해 수백명의 병력을 병원 앞에 세워두고 있다. 경찰 스스로가 ‘자본의 사병’이자 ‘대변자’를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경찰투입을 전후한 정부의 이중적 태도는 사태를 더욱 꼬이게 했다. 노동·복지·교육부 차관은 두번이나 파업현장을 방문해 추석 전에 대화를 통한 타결을 이끌겠다고 했다. 노동부는 경찰투입 직전까지도 반대 입장을 밝히며 “가능성은 없다”고 장담했다. 노동부와 경찰은 별도의 정부에 소속됐는지 이해할 수 없다. 경찰투입 방침이 발표되자 병원쪽은 아예 교섭에 나오지 않았다. 경찰이 노사관계를 방해하고 아예 안방을 차지한 꼴이다.

최근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간 국제노동기구(ILO) 결사의자유위원회 자문단은 “한국은 업무방해 등 형사사건으로 파업권을 제한하고 있는 보기 드문 나라”라고 비판하면서 “노사관계를 범죄시하고, 노-사-정 관계에서 경찰과 공안기관까지 나서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나름대로 진단한 바 있다.

DJ 노동정책의 마지막 악수

임단투 한번 치르는 데 구속, 해고, 손해배상청구, 가압류, 무노동 무임금에다 용역깡패 폭력도 모자라 경찰 폭력진압까지 당해야 하는 한국 노동자들의 삶과 노동은 힘겹고 슬프다. 경찰투입으로 병원 로비에는 순간의 평화가 찾아왔지만, 폭력으로 강요된 평화는 얼마 가지 못한다. 진정한 노사 평화는 파업을 촉발시킨 원인을 제거하면서 노사 간 대화와 신뢰를 통해 이루어진다.

경찰투입은 싸움의 끝이 아니라 더 큰 싸움의 시작일 뿐이다. 벌써 싸움은 노사를 넘어 노-정 간의 대결로 치닫고 있다. 이번 경찰 투입은 일주일에 세명꼴로 노동자를 구속시킨 김대중 정부 노동정책의 임기 중 마지막 악수가 될 것이다. 김대중 정부의 노동정책은 노동자 없는 노동정책으로, 노동자가 등을 돌린 노동정책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이주호/ 전국보건의료산업노조 정책국장 zoo@nodong.org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