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집단화 움직임… 대학가 중심으로 평화·군축운동으로 이어져
“어떤 사람들은 군대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군대에 가기를 거부함으로써 평화가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개인의 신념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도록 국가가 강요해서는 안 된다. 나는 군사훈련이 평화를 실현하는 방법이 아닐뿐더러 평화를 위협할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평화를 실현하는 방법, 그 차이를 인정해달라.”
학생 운동권의 새로운 흐름으로 자리잡는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운동이 전환기를 맞았다. 종교와 정치·사상적 이유에 따른 ‘특별한’ 개인의 소신에서 출발한 병역거부 선언이 집단적으로 이어지면서, 평화·군축운동으로 확장되고 있다. 개인의 신념에 따른 집총거부에서 시작해 우리 사회에 필요한 적정 군사력의 규모와 바람직한 국방정책으로까지 점차 외연을 넓히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12월17일 ‘불살생’이라는 종교적 신념에 따른 평화주의자 오태양씨의 병역거부 선언이 나온 지 불과 9개월여 만에 나타난 변화다.
개인적 소신에서 집단적 운동으로
지난 9월12일 대학생 나동혁(26·서울대 수학과 4년 휴학)씨가 서울 동작구 대방동 서울지방병무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병역거부자 대열에 합류했다. 나씨는 이날 회견에서 “전쟁 대신 평화를, 국가에 대한 일방적 복종·순응 대신 다름을 인정하는 사회를 바라는 내 양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로써 그는 오태양·유호근·임치윤씨에 이어 여호와의 증인 신자가 아닌 네 번째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가 됐다.
이날 나씨의 기자회견과 때를 같이해 대학생들의 집단 병역거부 선언이 나왔다. 아직 입영영장이 나오지 않은 7개 대학 14명의 대학생들은 이날 대체복무제 도입을 촉구하며 “앞으로 영장이 나오더라도 이에 응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들의 집단 병역거부 선언에 이어 9월13일 오전에는 전국학생회협의회 소속 대학생 10여명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실현’, ‘대체복무제 개선’ 등을 요구하며 국회 국방위원장실 점거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지난 9월10일 저녁 7시께, 이른바 ‘예비 병역거부자’들의 첫 모임이 열린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 신법학관 208호 강의실에서는 이런 변화를 쉽게 느낄 수 있었다. 올해 갓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에서 대학원생까지 나이는 제각각이지만, 이날 모임에 참석한 10여명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대부분이 학생회 간부를 맡고 있거나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운동권’으로, 올 상반기 내내 매주 수요일 서울 대학로 등지에서 열린 대체복무제 도입을 위한 서명운동에 적극 참여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병역거부를 선언한 뒤 교내에서 커다란 반향이 일어나고 있다. 고려대에서만 벌써 3천여명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 도입을 위한 서명운동에 참여했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동료 학생의 병역거부 선언으로, 그동안 남의 일처럼 여겨온 것을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 같다.” 지난 9월4일 교내 행사를 통해 병역거부 의사를 밝힌 고려대생 임재성(21·법학과 3)씨는 “찬반양론을 두고 치열한 토론이 벌어지면서 이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는 군 복무를 앞둔 대학생 상당수가 진지하게 고민하는 문제가 됐다”고 말했다.
실제로 임씨의 ‘선언’ 뒤 교내 각종 게시판에는 “너희들의 행동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라면 가수 유승준의 행동은 ‘양심에 따른 국적거부’에 해당되느냐”는 비판에서부터 “나는 비록 예비역 병장이지만, 대체복무제는 반드시 도입돼야 할 것”이라는 의견까지 여러 의견이 쏟아지고 있다. 네 번째 병역거부자 나동혁씨의 후원모임이 개설한 인터넷 홈페이지(http://ilovepeace.wo.to) 게시판에는 사흘 만에 100여개의 의견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대체복무제 서명운동에 뜨거운 호응
신체검사에서 4등급 판정을 받아 일종의 대체복무제인 공익근무요원으로 군복무를 대신할 수 있는 ‘특권’을 포기하고, 병역거부자 대열에 합류한 드문 사례도 나왔다. 서울대생 장기정(22·독문 4)씨는 “공익요원으로 소집되더라도 반드시 받아야 하는 4주간의 집총 군사훈련이 평화에 대한 신념을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에 감옥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집총을 거부할 수밖에 없다”며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학생 운동권의 집단적 참여로 병역거부 운동은 군 민주화 운동과 군내 인권문제를 비롯해 광범위한 평화·군축운동으로 급속히 확산될 조짐까지 보인다. 그동안 국가안보 이데올로기에 막혀 오랫동안 봉합된 군대와 징병제, 적정 군사력 규모 등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들이 나오고 있다. 지난 9월12일 예비 병역거부를 선언한 대학원생 염창근(26·경희대 철학과 석사과정)씨는 “평화는 군사력 경쟁 속에서는 보장받지 못한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는 남북 모두 군비감축에 나서야 한다. 군 복무기간 단축과 대체복무제 도입은 한반도 평화·군축을 위한 작은 출발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중앙대생 이용석(22·사학과 4)씨는 “대체복무제가 도입돼 모든 청년들이 대체복무를 선택하면 군사력을 유지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이제까지 얼마만큼이 적정 군사력 규모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진 적은 없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운동은 냉전이 가져다준 국가안보 이데올로기를 극복하는 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대학가의 움직임을 30여개 시민·사회단체의 연대기구인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 도입을 위한 연대회의’(이하 연대회의)가 주목하고 있다. 병역문제의 당사자인 대학생들이 집단적으로 병역을 거부하고 나서면, 대체복무제 도입을 위한 전기가 마련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연대회의에는 전국학생회협의회·21세기진보학생연합 등 학생단체들이 초기부터 참여하고 있다.
인권운동사랑방 이창조 상임활동가는 “병역을 앞둔 대학생들이 병역거부권과 대체복무제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고 해법을 내놓아야 문제가 풀릴 수 있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우리 사회가 양심·사상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만큼, 대체복무제가 도입되는 과정에서 군대의 인권문제 등 전반적인 군 개혁문제가 자연스럽게 논의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군대 인권도 관심… 법원판결 오락가락
9월11일 부산지방법원은, 지난 7월30일 ‘전쟁반대와 평화실현’이라는 신념에 따라 병역거부를 선언한 동아대생 임치윤(24)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똑같은 사유에 따라 군 입대를 거부한 오태양씨는 이미 두 차례나 구속영장이 기각된 전례 때문에 영장발부를 두고 법 집행의 형평성 논란이 인다. 연대회의는 성명을 내어 “현행 병역법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제청신청이 계류되어 있기 때문에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내려질 때까지는 임씨에 대한 불구속 수사 및 기소가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기성세대의 주장에 ‘평화를 원하거든 평화를 준비하자’고 외치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 이미 1600여명의 젊은이가 신념을 간직한 채 수형생활을 하고 있다. 그들을 언제까지 감옥으로 보낼 것인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사진/ 학생 대표가 장영달 국방위원장과 면담을 하는 모습. (이정용 기자)

사진/ “양심을 가두지 말라.” 지난 9월13일 국회 국방위원장실에서 점거농성을 벌인 전국학생회협의회 소속 대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되고 있다. (한겨레 이정우 기자)

사진/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이 전환기를 맞았다. 지난해 12월 처음으로 병역거부 선언을 한 오태양(오른쪽)씨와 네 번째로 합류한 나동혁(가운데)씨. (한겨레 이정우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