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파업채권의 ‘흐뭇한 연대’

427
등록 : 2002-09-18 00:00 수정 :

크게 작게

장기파업 사업장 생계 돕는 무이자 채권… 수익성 없어도 구입하는 사람 늘어나

‘유통수익률 0(제로)’인 채권이 있다. 이자를 한푼도 안 주는, 한마디로 ‘이상한’ 채권이다. 이자는 제쳐두더라도 원금 상환날짜조차 명확하지 않다. 채권 증서에는 채무자와 채권자의 이름, 주소만 달랑 적혀 있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은 경희의료원지부와 가톨릭중앙의료원… 등 2002년 파업 기간 중 조합원 생계비 대출을 위한 투쟁기금으로 위 금액을 차용하였음을 본 채권증서로써 확인합니다. 파업투쟁 승리 이후 반드시 변제하겠습니다.’ 보건의료노조가 최근 발행한 일금 5만원짜리 ‘투쟁채권증서’다.

보건의료노조 채권 2억5천만원어치 팔려

사진/ 장기파업 사업장이 늘어나면서 노동 조합의 파업채권 발행 횟수도 증가하고 있다. 사진은 보건의료노조에서 발행한 5만원짜리 파업채권.
파업 사업장에 간혹 등장한 이른바 ‘파업채권’이 요즘 다시 팔리고 있다. 장기파업 사업장이 늘어난 탓이다. 265일 장기파업을 벌인 이랜드노동조합, 517일 장기파업의 한국통신계약직노동조합에 이어 이번에는 보건의료노조가 파업채권을 발행하고 나섰다. 발행물량은 5만원짜리 2만장으로 총 10억원어치다. 발행하자마자 불티나게 팔려 서울에서만 이미 5천여장이 나갔다. 보건의료노조 이대연 재정사업국장은 “파업이 장기화하면서 투쟁기금도 바닥나고 조합원들이 몇달째 무노동 무임금으로 고통받고 있다. 단결력만으로 파업을 이끌고 가는 데도 한계가 있고, 조합원들한테 생계유지비라도 주기 위해 파업채권을 발행했다”고 말했다.


장기파업에 접어들수록 회사와 노동조합 중 누가 오래 버티느냐에 따라 승리와 패배가 엇갈리는 경향을 띤다. 물론 싸움의 양상이 ‘돈 승부’로 가면 노조가 일방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놓인다. 장기파업 사업장에 파업채권이라는 금융상품이 등장한 건 이 때문이다. 보건의료노조가 비축하고 있던 파업기금은 조합원 2천여명이 넉달 가까이 싸우는 동안 고갈상태에 이르렀다.

파업채권이 국민을 상대로 발행되는 건 아니다. 보건의료노조 소속의 정상근무중인 조합원(전국 4만여명)들이 파업 조합원들을 위해 우선적으로 사고, 남은 물량은 다른 노동조합이나 시민단체 등 파업을 지지하는 불특정 ‘동지들’이 사주는 게 원칙이다. 이자가 전혀 없고 상환날짜도 확정되지 않은 만큼 돈으로 따진 수익성과 안정성은 형편없이 떨어진다. 그렇다고 ‘투기채권’은 결코 아니다. 채권 발행자쪽에서 보면 오히려 파업 승리의 기원이 담긴 우량채권이다. 채권증서에는 파업투쟁 승리 이후 반드시 갚겠다고 적혀 있지만 ‘승리’를 전제로 한 조건부 상환은 아니다. 노조는 1년 뒤인 내년 9월부터 원금을 갚아나갈 예정이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보건의료노조의 이번 파업채권 중 일부(10장)를 한통계약직노조가 구입했다는 사실이다. 한통계약직노조는 파업 200일을 넘긴 지난해 봄 이미 파업채권을 발행한 바 있다. 당시 400여명이 매입해준 채권으로 8천여만원을 조성했다. 이른바 ‘백지채권’도 있었는데 액면가 200만원짜리 고액채권까지 발행됐다. 선전물을 본 일반 시민 30여명이 직접 노동조합에 찾아와 파업채권을 매입하기도 했다. 파업이 끝난 뒤 지난 8월부터 원금을 갚기 시작했지만 되돌려받지 않겠다는 채권자들도 여럿이라고 한다. 한통계약직노조 고철윤씨는 “무슨 상환이냐고 하면서 그 돈으로 보건의료노조 같은 다른 투쟁사업장을 계속 지원하면 좋겠다고 하는 채권자도 많다”고 전했다. 파업채권은 이처럼 여러 파업 사업장들을 넘나들며 싸움의 불씨를 지핀다.

“파업 승리 이끄는 결정적 구실한다”

이랜드노조 역시 지난 2000년, 파업 100일을 넘기면서 조합원들의 생계비가 급박해지자 파업채권을 발행했다. 파업 장기화로 노조의 12년치 예산을 이미 다 쏟아부은 때였다. 액면가는 따로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정식채권은 아니고 흔한 차용증서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조합원마다 몇 개월째 은행에서 대출받아 근근이 살다 보니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었는데, 당시 파업채권에서 들어온 돈으로 이자부터 모두 메웠다. 이남신 이랜드노조 위원장은 “재정을 소홀히 한 채 투쟁조직만 강조하는 주먹구구식 싸움은 한계가 있다. 당시 파업채권은 투쟁을 승리로 이끈 결정적인 힘이 됐다”고 돌이켰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