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여름, 조선의용군의 발자취를 좇아 북경에서 연안까지
지난 여름 조선의용군의 흔적을 찾아 중국을 다녀온 김남일씨가 기행문을 보내왔다. 실천문학사와 한겨레투어가 공동주최한 이 기행(8월21∼27일)을 위해 그는 6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쳐 답사를 하기도 했다. 김남일씨는 남과 북에서 철저히 외면당해온 조선의용군의 역사를 이제는 복원해야 한다고 말한다. 편집자
식민지시대 어느 하루 캄캄하지 않은 날이 있었으랴만, 특히 1940년대는 암흑기 중 암흑기였다. 일제의 탄압이 한층 가혹해졌고,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약화되었다. 상하이 임시정부는 충칭으로 밀려나고 김일성의 동북 항일연군도 소련 영내로 퇴각했다. 따라서 해방까지 수년간은 마치 독립운동의 공백기처럼 간주되기도 했다.
북경반점과 김사량
그런데 북경에서 태항산을 거쳐 연안에 이르는 중국 기행을 마치고 난 지금, 나는 가난한 역사의 빈 곳간에 그득하니 쌀가마라도 채운 느낌이다. 1980년대 말에야 겨우 그 이름을 들어본 조선의용군의 존재가 묵직한 실물감으로 다가섰기 때문이다. 1930년대 후반 조선독립동맹의 무장조직으로 창설된 조선의용군은 끝까지 투쟁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특히 태항산을 무대로 한 투쟁은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귀중한 자산이었다. 그런 조선의용군의 투쟁이 어째서 소홀하게 다뤄졌을까. 두 차례의 사전답사 뒤 한국에서 날아온 기행단과 북경에서 합류한 이후에도 나는 여전히 화두처럼 이런 의문을 지니고 있었다.
1945년 봄, 한 조선인 사내가 북경반점 로비에서 초조히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사흘째 소식은 없었다. 솔직히 사내는 자기가 기다리는 이를 알지 못했다.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나타난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런데도 사내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마침 악극단이 들어와 호텔 안은 시장통 같은데, 어느 순간 사내의 눈에 ‘곰처럼 기린처럼 크고 긴’ 한 남자가 들어찼다.
“아무 정보도 없었지요. 그런데도 그 두 사람은 객담 몇 마디 끝에 눈빛이 부딪쳤고, 그게 운명을 결정짓는 만남이 되었던 겁니다. 바로 여기 이 자리가….”
단체로 온 ‘여유단원’들이 강사(김재용, 원광대 교수)의 손가락을 좇아 애써 그 흔적을 더듬지만 쉬울 리 없다. 오성급 북경반점은 자본주의 ‘부국’에서 온 여행자들마저 주눅들게 할 만큼 화려했다.
조선인 사내는 소설가 김사량이었다. 평양에서 태어난 김사량은 일본 최고 명문인 동경제대를 다녔는데, 소설 <빛속에>를 발표하면서 일약 문명을 얻었다. 그는 1945년 일제의 강권에 의해 노천명 등과 함께 중국 내 조선인 학도병 위문단의 일원으로 중국에 건너온다. 그러나 조선을 떠나올 때부터 그는 이미 탈출을 결심하고 있었다. 이미 수차례 탈출을 꾀했으나 번번이 실패한 김사량은 일제 특무들이 득실거리는 북경 한복판에서 마지막 탈출을 시도했다. 그리고 북경반점에서 우연인지 필연인지 한 남자를 만나는데, 그는 ‘해방구’로 가는 길을 인도하는 접선책이었다.
호텔을 빠져나왔다. 밖은 북경에서도 가장 번화한 왕부정 거리. 넘실대는 인파 너머 맥도날드의 빨간 M자 간판이 유난히 선명했다. 자본주의보다 더 현기증나는 속도로 돌아가는 북경에서 마지막 일정이 북경반점이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일행은 이제 본격적인 기행을 위해 기차에 올랐다. 얼마 뒤 기차는 김사량이 간 길을 좇아 어둠에 잠긴 하북평원을 내달렸다.
소학교 교과서에도 실린 호가장 전투
가장 먼저 찾아가는 원씨현 호가장 마을은 하북북둥성의 성도 석가장에서도 꽤나 먼 구석에 있었다. 아침 일찍, 캐나다인 의사로서 중국 홍군에 가담해 의술활동을 펼친 닥터 노먼 베쑨의 무덤과 기념관이 있는 석가장 열사능원을 둘러본 우리는 한낮이 다 돼서야 마을에 도착했다. 거기서 우연히 한신춘(77) 노인을 만났다. 그는 호가장 전투지역을 찾아왔다는 말에 놀라움을 표시했지만, 이내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 마을에서 소년단 대표로 활동했는데, 몇십해가 지난 지금도 그때의 기억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고 말했다.
사진/ 연안 나가평 조선혁명군정학교 옛 터를 소개하는 입간판.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이가 이번 기행단을 이끈 소설가 김영현씨다(왼쪽). 북경시내 한복판에 있는 오성급 최고급호텔인 북경반점. 이곳에서 김사량은 태항산 유격지구로 가는 길을 안내해줄 사람을 만난다(오른쪽).
“그때 조선인 의용군 대장이 연설할 때면 이런 말을 했어요. 오늘. 난 그게 무슨 말인지 지금도 모르지만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요. 오늘.” 그 대장은 김세광이었다. 그는 1941년 12월12일 새벽, 일본군 점령지대와 중국 공산당 해방지구 사이의 이른바 유격구인 이곳 호가장에서 적의 기습을 받고 접전 중 중상을 입었다. 이날 전투에서 조선의용군 대원 네명이 전사했다. 지난해 사망한 <격정시대>의 소설가 김학철도 이때 다리에 부상을 입고 체포당했다. 답사 때 나는 미처 전사한 이들의 무덤을 챙기지 못했다. 그래서 가시가 걸린 듯한 기분으로 그들의 무덤에 대해 물었다. 답변인즉, 마을 뒷산에 있었는데 뒷날 인근 찬황현 열사능원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새삼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들의 주검은 수십해가 지나도록 한번도 찾아오지 않는 미욱한 후손들에게 무슨 말을 건넬 것인지! 김사량의 기행문 <노마만리>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이 쓸쓸한 고전장의 뒷마을 높지 않은 잿등 위에 그들의 무덤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앞쪽이 훤히 트이고 양옆으로 열은 산줄기가 내달린 포근한 자리로, 동북을 향하여 멀리 조선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덤가에서는 가을벌레도 울지 않았다…. 우리는 이 용사들의 무덤 위에 눈물과 더불어 꽃을 뿌리고 차마 떠나기 어려워하였다.” 호가장 전투는 조선의용군의 존재를 중국땅에 알리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당시 중국공산당 기관지는 추모특집을 실었고, 국제연대의 표본으로 소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다. 조직적인 군사훈련을 하다
다음 목적지는 조선의용군이 대규모로 주둔한 한단시 섭현. 원씨현을 빠져나와서도 몇 시간을 더 내달려야 하는 오지였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에야 가까스로 도착할 수 있었다. 계획대로라면 반소탕전(1942년)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조선의용군의 두 용사, 진광화·윤세주 열사의 무덤이 있는 석문촌을 찾아가야 했지만 시간상 불가능했다. 뒷날을 기약하며 아쉬운 발길을 청창하대교 건너 남장촌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찾아가자 답사 때 만난 마을 노인들을 비롯해 많은 주민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마을 광장에는 앞서 이곳을 다녀간 장준하기념사업회 답사단을 위해 만들어놓은 환영 연단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조 중 한 우의와 연대를 위한 무대’라는 한글 글씨가 지칠 대로 지친 일행에게 커다란 힘을 주었다. 남장촌은 조선의용군 사령부와 군정학교 등이 있던 마을이다. 북경경 떠나 온갖 고생 끝에 겨우 이곳에 온 김사량은 마치 유토피아를 본 듯 첫인상을 적고 있다. “침침한 거리를 지나 밭두렁길에 다시 올라서니까 우리들의 걸음발은 자연 빨라진다. 죄악과 허위와 노예의 세계를 두루 헤매기 30유여 년, 이제 빛을 섬기는 싸움의 길을 찾아 머나먼 노정을 끝내고서 몽매간에도 그리던 곳에 당도하게 되니 형용할 수 없는 감회 속에 가슴이 술렁거렸다. 난만히 꽃을 피운 황하밭가를 지나노라면 그윽한 향기가 바람결에 흐뭇이 퍼져 흐른다. 멀리서 우리 의용군의 나팔 소리가 대기를 흔들며 유량히 들려온다.”
당시 이곳에 주둔하던 백수십명의 조선의용군은 조직적으로 군사훈련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군정학교에서 체계적으로 정치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하남점진 마을에 상점과 병원, 공장 등을 지어놓고 중국 민중과 더불어 일상생활도 훌륭하게 꾸려나갔다.
당시 소년 공산당원이던 왕안순(74) 노인은 “그때까지 우리는 감자 심는 법을 몰랐는데, 조선의용군이 들어와서 가르쳐주었다”고 말했다. 그는 조선의용군 사령관 무정에 대해서도 살던 집을 비롯해 많은 사실을 증언해주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부족해도 너무 부족했다. 현지 주민들이 마련해둔 방명록에 글 한줄씩을 남기는 것으로 아쉽고 미안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서안에서 출발한 기차가 밤새 달려 도착한 연안. 계속되는 강행군으로 몸은 파김치가 되었지만, 일행은 북경이나 서안 같은 대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신선한 공기를 한껏 맛보았다.
우리가 무슨 할말이 있을까
연안… 마침내 나는 연안에 도착한 것이었다.
지난 시절, 에드가 스노우가 쓴 <중국의 붉은 별>을 통해 처음 접한 이 도시에 대해 얼마나 큰 환상을 품었던가. 중국 국민당군의 집요한 추격을 피해 산 넘고 강 건너 무려 1만2천km에 이르는 대장정을 마친 중국 홍군이 마침내 도착한 곳. 처음 장정을 시작할 때 30만이던 병력은 고작 3만명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들은 간고한 도정을 통해 스스로 거대한 중국 대륙을 해방시킬 주역임을 전 세계에 알렸던 것이다. 그때 내 관심은 인간이 어디까지 이타적일 수 있는가 하는 데 있었다. 대장정 동안 그들이 보여준 자기희생 정신은 198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러나 지금 중국은 과연 그 ‘연안’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그리고 나는?… ‘새로운 인간형’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포기한 지금, 나 역시 그래서 연안의 아침이 낯설었는지 모른다.
혁명기념관과 양가령 중국공산당 유지를 돌아본 뒤 나가평을 찾았다. 북경과 서안의 눈부신 속도와 물질적 풍요를 경험한 우리 눈에 유난히 초라해보이는 마을이었다.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쓰레기, 그 옆에 앉아 이방인에게 하릴없는 눈길을 보내는 촌민들…. 거기 서 있는 조선의용군 군정학교 자리라는 안내판이 오히려 낯설기만 했다. 산길을 따라 한 10분쯤 올라가면 조선의용군들이 거살 동굴집(요동)들이 눈에 들어온다. 수십해 세월 동안 전혀 변한 게 없는 초라한 동굴집이었다. 우리는 누구라 할 것 없이 처연한 심정이 되었을 것이다.
“양가령에 있는 모택동이나 주덕의 동굴집은 그렇게 잘 보전해놓고서….”
누군가가 이렇게 불평을 늘어놓았을 것이다. 갑자기 조선족 여자 가이드가 버럭 화를 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하세요?” 그 말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가슴을 찔렀다. 문제는 중국이 아니었다. 자신의 역사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우리가 무슨 할 말이 있을까. 조선의용군의 발자취를 좇아 바삐 돌아다닌 중국기행은 그렇게 끝나고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엄연히 존재한 조선의용군의 실체가 왜 그토록 철저하게 외면당했는지 새삼 짐작할 수 있었다. 그건 상하이 임정만을 법통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들을 사회주의 계열이라며 애써 외면한 남쪽과, 동북항일연군이 주축이 된 정권의 정통성을 위해 연안파를 숙청한 북쪽 모두의 잘못이었다. 연안을 떠나려는데 물풀처럼 가슴을 휘감는 게 있었다. ‘결국 내 잘못이다.’ 나도 몰래 이렇게 중얼거렸다.
김남일/ 소설가

사진/ 대장정을 마친 중국 홍군처럼 기행단이 마지막으로 도착했던 연안의 혁명기념관 건물.
그런데 북경에서 태항산을 거쳐 연안에 이르는 중국 기행을 마치고 난 지금, 나는 가난한 역사의 빈 곳간에 그득하니 쌀가마라도 채운 느낌이다. 1980년대 말에야 겨우 그 이름을 들어본 조선의용군의 존재가 묵직한 실물감으로 다가섰기 때문이다. 1930년대 후반 조선독립동맹의 무장조직으로 창설된 조선의용군은 끝까지 투쟁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특히 태항산을 무대로 한 투쟁은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귀중한 자산이었다. 그런 조선의용군의 투쟁이 어째서 소홀하게 다뤄졌을까. 두 차례의 사전답사 뒤 한국에서 날아온 기행단과 북경에서 합류한 이후에도 나는 여전히 화두처럼 이런 의문을 지니고 있었다.

사진/ 하북성 원씨현의 호가장 마을에서 기행단에게 호가장 전투를 설명하는 현지 노인.


“그때 조선인 의용군 대장이 연설할 때면 이런 말을 했어요. 오늘. 난 그게 무슨 말인지 지금도 모르지만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요. 오늘.” 그 대장은 김세광이었다. 그는 1941년 12월12일 새벽, 일본군 점령지대와 중국 공산당 해방지구 사이의 이른바 유격구인 이곳 호가장에서 적의 기습을 받고 접전 중 중상을 입었다. 이날 전투에서 조선의용군 대원 네명이 전사했다. 지난해 사망한 <격정시대>의 소설가 김학철도 이때 다리에 부상을 입고 체포당했다. 답사 때 나는 미처 전사한 이들의 무덤을 챙기지 못했다. 그래서 가시가 걸린 듯한 기분으로 그들의 무덤에 대해 물었다. 답변인즉, 마을 뒷산에 있었는데 뒷날 인근 찬황현 열사능원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새삼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들의 주검은 수십해가 지나도록 한번도 찾아오지 않는 미욱한 후손들에게 무슨 말을 건넬 것인지! 김사량의 기행문 <노마만리>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이 쓸쓸한 고전장의 뒷마을 높지 않은 잿등 위에 그들의 무덤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앞쪽이 훤히 트이고 양옆으로 열은 산줄기가 내달린 포근한 자리로, 동북을 향하여 멀리 조선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덤가에서는 가을벌레도 울지 않았다…. 우리는 이 용사들의 무덤 위에 눈물과 더불어 꽃을 뿌리고 차마 떠나기 어려워하였다.” 호가장 전투는 조선의용군의 존재를 중국땅에 알리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당시 중국공산당 기관지는 추모특집을 실었고, 국제연대의 표본으로 소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다. 조직적인 군사훈련을 하다

사진/ 하북성 한단시 섭현 석문촌의 조선의용군 진광화 열사와 윤세주 열사의 묘. 뒤로 태항산이 보인다. 가운데 비석은 이곳을 다녀간 한국의 사학자 조동걸 교수가 세운 것이다(왼쪽). 연안 나가평의 산중턱에 자리잡은 조선의용군의 동굴집.

사진/ 하북 석가장 열사능원의 닥터 노먼 베쑨의 동상 앞에 선 필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