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열사 노조도 용납 않는 전근대적 노무관행… 회유·협박에 맞선 이들의 외로운 싸움
지난 9월21일 낮 12시30분께 서울 남대문 대한상공회의소 앞에서 삭발식을 한 중앙신문인쇄노조 조합원 100여명이 중앙일보사 앞으로 몰려갔다. 신문사 앞을 경찰이 겹겹이 막았다. 조합원들은 노조활동 보장과 홍석현 회장의 퇴진을 요구하며 경찰과 거친 몸싸움을 벌였다. 점심식사를 하러 나왔던 인근 회사원들이 이 광경을 지켜봤다. “무슨 일이지?” “중앙일보 때문에 저런 것 같은데….” 줄을 달아 목에 건 이들의 신분증에는 푸른색 삼성 로고가 선명했다. 중앙신문인쇄노조의 조합원들도 한때는 ‘삼성맨’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삼성의 신화’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지난 6월 설립된 중앙신문인쇄노조의 조합원들은 중앙일보의 분사로 중앙일보를 인쇄하는 (주)중앙기획의 사원이 됐다. 노조는 9월4일 단체협상안을 중앙일보 수준으로 하기로 회사쪽과 잠정합의하고 합의문 서명을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회사쪽이 갑자기 ‘2000년 단협 관련 부속 합의문’을 내밀었다. 합의문에 서명하지 않으면 폐업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회사는 노조에 산별노조로 가지 않을 것과 민주노총, 언론노련과의 관계를 단계적으로 끊을 것 등을 요구했다. 이와 함께 회사쪽은 조합원의 자격을 대리급 이하로 해 현재 노조에 가입된 과장은 이른 시일 안에 탈퇴시키고, 현재 조합원 수를 유지하는 선에서 새 확장을 꾀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담아 노조쪽에 서명을 요구했다. 노조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한마디로 간판만 있고 활동은 없는 노조가 되라는 요구였기 때문이다.
노조 간판은 달아도 활동은 못한다?
노조는 파업과 산별노조 건설을 결의했다. 회사쪽은 9월7일 폐업을 선언하고 이틀 뒤에 노조원 123명을 전원 해고했다. 그때부터 중앙신문인쇄노조는 “위장폐업과 집단해고를 자행한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은 퇴진하라”고 요구하며 길거리에 나섰다. 조남영 노조 위원장은 “노조를 허울 뿐인 조직으로 만들겠다는 의도나 조합원을 회유하고 탄압하는 양상을 보면 삼성그룹에서 예전에 하던 모습과 똑같다”고 말했다. 노동계도 중앙기획이 중앙일보에서 분사됐고, 중앙일보 역시 삼성그룹에서 분리됐지만 중앙신문인쇄노조 사태가 삼성의 무노조 경영과 맥이 닿아 있다고 보고 있다. 민주노총은 성명을 통해 “10여년 전 삼성조선에서 시작해 올해 에스원까지 수많은 계열사 노조설립을 막아온 삼성의 무노조 경영의 망령이 중앙기획에서 되살아난 게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라고 반문했다. 무노조 경영.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노조는 안 된다’는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경영원칙이기도 했다. 삼성그룹 기업구조조정본부의 안홍진 이사는 “(무노조 경영은) 원칙이 아니라 철학”이라고 말했다. 이병철 회장 때 모토로라, IBM 등 세계의 선진 회사들이 일류 회사가 된 이유가 무엇인가를 알아보는 과정에서 “모두 노조가 없다는 점이 공통”이라는 것을 발견했고, 따라서 “노조가 필요없을 정도로 미리 알아서 잘해줘야 한다”는 철학을 갖게 됐다는 설명이다. 노조 추진자 여권 빼앗아 퇴직 압력
고영선(38)씨는 지난해 12월 일본에서 그 ‘철학’의 실체를 몸으로 겪었다. 그는 당시 삼성전관(SDI) 수원공장의 노사협의 위원이었다. 고씨는 11월께부터 동료 10여명과 함께 노조를 설립하기로 마음 먹고 12월12일에 창립총회를 열기로 했다. 노사협의 위원들은 12월6일부터 일본 연수를 하고 11일에 귀국할 예정이었다. 11일 공항에서 가이드가 비행기표를 끊고 여권을 돌려주는데 고씨와 최윤국씨의 여권을 함께 간 회사 신아무개 과장이 “내가 보관하겠다”며 돌려주지 않았다. “오전에도 국내에 있던 권영만 상무한테 전화가 와서 ‘회사일로 할 얘기가 있으니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여권을 돌려주지 않으니 순간 노조설립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일행이 탄 비행기가 출발하자 곧이어 권 상무와 김광하 이사가 일본에 도착했다. 고씨 등은 국내에서 온 회사쪽 임원들과 함께 전날 묵었던 호텔로 되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8일 동안 일본에서 숙소를 옮겨가며 회사쪽 사람들의 퇴직 압력에 시달려야 했다.
“저녁을 먹고 난 다음에 권 상무가 개별적으로 면담하며 ‘삼성에서 노조를 만드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나는 다 알고 있으며 전권을 위임받아 왔다. 결론이 나지 않으면 귀국하지 못하고 여기서 나랑 같이 살아야 한다. 희망 퇴직을 하거나 해외사업장으로 전배를 약속해야 귀국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고씨는 일단 한국으로 돌아가서 해결하자고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첫날에 회사쪽은 노조를 포기하는 대가를 거론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씨가 원칙을 되풀이하자 회사쪽은 “결국은 돈으로 해결이 나니 먹고살 수 있게 해주겠다”고 회유했다. 그는 국내에서 함께 노조 결성을 도모했던 사람들과 연락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미 회사쪽 간부들이 동료들을 만나 노조 포기를 종용하고 있었다. “술 한잔하러 가자고 인사부장과 방을 나오는데 신 과장이 짐을 챙겨서 나왔죠. 최씨와 함께 있으니 떼어놓으려고 그랬습니다.” 그는 최씨와 같은 방을 쓰겠다고 버텼다. 그러나 숙소를 3번째 옮길 때 문제가 생겼다. 잠깐 방심하는 사이에 최씨를 태운 차가 먼저 출발해 따로 떨어진 것이다. 결국 고씨는 회사쪽의 압력에 못이겨 19일 희망퇴직서에 서명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 다음날 신 과장이 그의 집을 직접 찾아왔다.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약속한 대로 이것을 놓고 간다’며 8천만원이 담긴 쇼핑백을 놓고 갔습니다. 제가 얼마를 달라고 요구한 적은 없고, 당신들이 주고 싶으면 최씨한테 한 것처럼 하라고 했죠.” 고씨는 퇴직금 중간정산을 해서 사실 받아야 할 퇴직금이 없었다. 노조를 포기하는 대가로 회사쪽이 “먹고살아라”고 8천만원을 건넨 것이다. 현재 원주에 거주하는 고씨는 “이런 일이 있기 전에는 나를 따르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몇달 만에 수원에 가니 연락할 사람도 없어 비애감을 많이 느낀다”며 “우리가 겪은 것은 노조를 설립하려 했을 때 삼성이 보이는 전형적인 형태”라고 말했다.
노조설립 방해 단계별 대책 세워
지난 97년 12월 삼성코닝 구미공장 인사과에 근무했던 김형극씨는 삼성 비서실이 작성한 ‘노사관리 기본지침’을 폭로했다. 이곳에는 노조설립에 따른 단계별 대책이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 ‘노조결성대회 개최 소집단계’에서 회사는 노조설립을 주도하는 인물과 주요 관련자를 해고조처 할 것을 행동원칙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행동을 감시, 미행하고 가족을 동원해 탈퇴를 종용하라고 쓰여 있다. ‘노조설립신고서 관청접수단계’ 때는 노조설립신고서를 반려하도록 공작하며, 어용노조설립신고서를 빨리 내어 신고필증을 받도록 하고 있다. ‘신고필증 교부후단계’에서는 노조 고사전략을 시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또 개별적으로 노조 관련자를 만나 자진 탈퇴하도록 금품 수여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물론 회사는 비상근무 체제로 임원진을 포함한 모든 관리자들이 노조설립에 총력 대응을 한다. 이미 ‘준사원화’를 목표로 관리했던 노동부, 시청, 군청, 경찰서 등 관련기관 인사들의 협조를 얻는 것도 빠지지 않는다.
삼성그룹의 노조에 대한 대응은 예전에는 비서실에서 담당했다. 비서실이 폐지되고 난 최근에는 그룹 기업구조조정본부의 인력팀에서 담당한다. 이건희 회장은 “자식과 마누라만 빼고 다 바꾸자”고 선언했지만 최근 일어난 일들은 노조에 대한 태도에서만큼은 삼성이 전혀 바뀌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른바 ‘유령 노조’를 이용한 삼성의 노조설립 대응전략은 지난 5월 경비용역업체인 에스원 노조설립 사건에서 잘 드러났다. 5월24일 에스원 노조는 민주노총 산하 공공연맹 회의실에서 노조 창립대회를 열고 노조설립신고서를 서울 중구청에 접수시켰다. 노조설립신고서를 낸 4명은 민주노총 해고자원직복지투쟁위원회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날 회사는 이들을 찾아내 회유하기 시작했다. 조합원들은 고려대로 몸을 옮겼으나 회사쪽은 이날 밤에 이들의 소재지를 파악했다. 놀라운 정보력이었다. 그래도 노조쪽은 노조설립 신고필증을 구청에서 받을 것으로 믿고 있었다. 다음날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에스원 노조가 중구청에 노조설립신고서를 내기 20분 전, 인사팀 대리를 지낸 윤아무개 과장을 위원장으로 한 노조설립신고서가 강남구청에 접수되어 신고필증이 나갔다는 것이다.
당시 노조 회계감사였던 전명기(36)씨는 “중구청을 통해 확인한 바로는 에스원의 이사가 신고필증을 받아갔다고 했다”며 “상상도 하지 못해 그저 황당했을 뿐”이었다고 말했다. 노조설립에 실패하자 이들은 회사쪽에 “해고 시켜달라”고 요청했다. 돈 먹었다는 소리를 듣지 않고 떳떳하게 나가자는 생각에서였다. 전씨는 “삼성에서 노조를 만들려면 인생을 걸고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노사협 위원들 중심으로 노조 구성
노조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은 비단 삼성계열사에 한정되지 않는다. 지난해 8월16일 구미에 있는 (주)보광에서 노동조합이 결성됐다. 보광은 지난해 삼성그룹에서 계열 분리된 곳으로 홍석현 회장의 동생인 홍석규씨가 당시 사장이었다. 노조가 결성되자 회사는 3일 만에 노조를 인정하겠다고 했다. “노조가 생기자 회사는 곧바로 사업부장을 경질시키고, 삼성코닝 구미공장의 노무팀에 근무한 2명을 데리고 왔습니다. 본사에서 부장이 내려오고 그들이 노조파괴공작을 진두지휘했습니다.” 노조 한 간부의 말이다. 107명의 조합원으로 시작한 노조 조합원이 얼마 지나지 않아 44명으로 줄어들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술 한잔하자고 하며 술집으로 데려가 여자 접대부를 붙여 2차까지 책임집니다. 공공연하게 그런 접대를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나중에 조사한다고 하니 다 부인했죠.” 물론 가족과 입사 추천인을 통한 탈퇴 압력도 거셌다고 했다.
삼성은 ‘노사협의회’를 통해 노동자의 의견을 듣는다고 말한다. 노사협의회가 한달에 1∼3차례 열려 1년에 15∼20차례씩 노사가 얼굴을 맞댄다는 것이다. 오히려 노조가 있는 회사들보다 경영진들이 종업원을 자주 만나 의견을 듣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삼성에서 노조를 만들려고 했던 이들의 시각은 전혀 다르다. 고영선씨는 “노사협의회는 형식적이고 아무런 영양가가 없는 곳으로 동료들한테 득이 되지 못하니까 노조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며 “회사가 제시한 방안에 대해 ‘좀더 합리적인 다른 방안을 찾아보자’고 제안해도 결국은 회사쪽 원안대로 간다”고 말했다. 삼성에서 노조설립을 주도한 이들이 대부분 노사협의 위원들이었다는 사실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삼성의 노사협의회는 ‘한마음협의회’ ‘노사협의회’ ‘노동자협의회’로 그 명칭이 회사마다 다르다. 한마음협의회가 노동자의 세력이 가장 약한 곳에 구성되어 있는 반면 노동자협의회는 파업권까지 보장받고 있다.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삼성조선)는 지난 7월에 쟁의 찬반투표를 해 찬성률이 90.4%에 이르렀다. 변성준 노동자협의회 의장은 “쟁의 찬반투표를 하면 보통 찬성률이 70% 정도였는데 올해는 90%를 넘어 서울에서 노무관리하는 사람들까지 내려왔다”며 “‘삼성에서 어떻게 90%가 넘는 찬성률이 나올 수 있냐, 이게 삼성 사업장이 맞다고 생각하느냐’고 이곳 관리자들을 나무랐다는 얘기도 있다”고 전했다.
선진 무노조 회사들에 배울려면 제대로 배우라
세계의 이름난 일부 회사에서도 무노조 경영을 한다. 각국의 노사관계를 전공한 고려대 김동원 교수는 “임금을 많이 주고, 노조가 필요없도록 종업원들이 자기 의견을 활발히 제기할 수 있다면 좋은 경로로 무노조 경영을 한다고 볼 수 있다”며 “그러나 노조를 결성하려 하면 전출을 보내거나 회유하고 탄압하는 부정적인 측면을 내보이는 곳도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IBM이나 휴렛팩커드와 같은 회사들이 전자에 해당한다는 설명이다. 이들을 보고 배웠다는 삼성의 무노조 경영에 대해 김 교수는 “두 가지 수단을 모두 사용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삼성그룹 해고자 원직복직 투쟁위원회의 김성환 의장은 “삼성은 족벌세습경영을 유지하는 데 노조가 걸림돌이 되기 때문에 무노조 경영을 고수하고 있다”며 “전근대적인 노무관행을 그대로 두고 모든 것을 바꾸자는 삼성의 구호는 공허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황상철 기자rosebud@hani.co.kr

(사진/중앙신문인쇄노조 조남영(오른쪽)위원장과 문하근 부위원장이 삭발을 하고 있다)
노조는 파업과 산별노조 건설을 결의했다. 회사쪽은 9월7일 폐업을 선언하고 이틀 뒤에 노조원 123명을 전원 해고했다. 그때부터 중앙신문인쇄노조는 “위장폐업과 집단해고를 자행한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은 퇴진하라”고 요구하며 길거리에 나섰다. 조남영 노조 위원장은 “노조를 허울 뿐인 조직으로 만들겠다는 의도나 조합원을 회유하고 탄압하는 양상을 보면 삼성그룹에서 예전에 하던 모습과 똑같다”고 말했다. 노동계도 중앙기획이 중앙일보에서 분사됐고, 중앙일보 역시 삼성그룹에서 분리됐지만 중앙신문인쇄노조 사태가 삼성의 무노조 경영과 맥이 닿아 있다고 보고 있다. 민주노총은 성명을 통해 “10여년 전 삼성조선에서 시작해 올해 에스원까지 수많은 계열사 노조설립을 막아온 삼성의 무노조 경영의 망령이 중앙기획에서 되살아난 게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라고 반문했다. 무노조 경영.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노조는 안 된다’는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경영원칙이기도 했다. 삼성그룹 기업구조조정본부의 안홍진 이사는 “(무노조 경영은) 원칙이 아니라 철학”이라고 말했다. 이병철 회장 때 모토로라, IBM 등 세계의 선진 회사들이 일류 회사가 된 이유가 무엇인가를 알아보는 과정에서 “모두 노조가 없다는 점이 공통”이라는 것을 발견했고, 따라서 “노조가 필요없을 정도로 미리 알아서 잘해줘야 한다”는 철학을 갖게 됐다는 설명이다. 노조 추진자 여권 빼앗아 퇴직 압력

(사진/삼성그룹은 업계 최고의 대우를 약속했지만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만들려고 끊임없이 싸워왔다)

(사진/중앙신문인쇄노조원들은 추석연휴 전날 해고 통지를 받았다.조합원들이 노동조합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