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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파업하다가 포도밭으로 달려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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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9-1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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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 100일째를 훌쩍 넘긴 경희의료원과 가톨릭중앙의료원 노동자들(<한겨레21> 425호)에게는 일상이 ‘재해’와 같다. 수배, 구속, 해고, 무노동 무임금, 손해배상 청구, 재산 가압류, 가족 갈등…. 그들의 재해적 현실을 상징하는 아이콘들은 끝이 없다. 그러나 송곳 하나 꽂을 데 없을 것 같은 열악한 처지에서도, 그들 마음속에는 어려운 이웃을 배려하는 여유가 쉼표처럼 남아 있었다.

지난 9월7∼8일 이들 병원과, 현재 폐업 상태인 서울 방지거병원의 노동자 47명이 충북 영동 수해지역에 봉사활동을 다녀왔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조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의대생 등 20여명이 동행했다. 경희의료원 간호사 김남희(30)씨도 이 대열에 끼었다. “힘든 사람이 힘든 사람 사정을 아는 게 아닐까요. 물난리 소식을 듣고 마음이 무거웠는데, 기회가 생겨 참 기뻤습니다.” 김씨는 주저 없이 자원했노라고 했다.

8일 밤늦게 서울로 돌아온 김씨는 9일에도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일부는 동네 교회에서 의료봉사활동을 벌였지만, 김씨를 비롯한 대부분은 무너진 포도밭 복구에 내내 매달렸다. “수천평이나 되는 들판에 포도밭 흔적이라고는 썩어가는 포도냄새밖에 없었어요. 포도덩굴을 지지해주던 철근을 잘라 걷어내고 구부려 모으는 일을 주로 했습니다.” 3분의 2 이상이 여성인 이들에게는 굵은 철근을 구부리는 일조차 힘에 겨웠다.

다행히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남성들이 “연약한 남자들 힘든 일 시키지 말아달라”고 할 만큼 여성들의 적응력은 강했다. “처음 갔을 때 농장 주인이 자포자기 상태였는데, 이틀 만에 용기를 얻으시더군요. 그분에게 힘이 되어드린 게 우리에게도 힘으로 되돌아오는 걸 느꼈습니다.” 피로한 낯빛과 달리 생기발랄한 김씨의 목소리는 수해민의 희망과 파업 노동자의 희망이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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