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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나는야 자랑스런 사이버 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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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9-1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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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아햏햏 주식은 라면 생활은 주침야활…사이버 상에 그들만의 왕국을 건설한 폐인들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1.병으로 몸을 망친 사람. 2.남에게 버림받아 쓸모 없는 사람. 국어사전이 정의내리는 ‘폐인’의 뜻은 단호하게 부정적이다. 몸 버리고 버림받아 사회적으로 쓸모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 사회에는 적어도 수만명이 ‘폐인’을 자처하며 살고 있다.

폐인들의 집결지는 사이버 공간이다. 특히 ‘디시인사이드’(www.dcinside.co.kr)라는 디지털 카메라 정보 사이트가 사이버 폐인들의 주력군이 주둔하는 곳이다.

디지털 카메라를 든 폐인들


이곳을 클릭하는 골수 네티즌들은 스스로 ‘디시 폐인’을 자처한다. 물론 이들이 정말로 실생활에서 완전히 망가진 폐인은 아니다. 대부분 평범한 직장인이거나 학생들이다. 디시인사이드를 중심으로 한 인터넷 활동에 자신의 모든 정력을 투여하느라 다른 일을 돌볼 겨를이 없다는 뜻에서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사이버 폐인에도 자격은 필요하다. 디시 폐인은 적어도 2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 주침야활, 그리고 면식이다. 주침야활은 낮에 자고 밤에 활동함을 말한다. 면식은 라면과 짜파게티를 끼니삼는 것이다. 밤새 인터넷에 빠져 눈이 벌게진 채 날이 밝아서야 이부자리로 기어들거나 사먹을 돈도 없고 먹을 시간조차 아까워 밥 대신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모습을 각각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디시인사이드는 디지털 카메라에 관한 온갖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공간이다. 유저갤러리 코너에선 자신이 찍은 디지털 사진들을 올리고 평가받을 수 있다. 디시인사이드 사이트를 드나드는 네티즌은 하루 8만명에 이른다. 이들 모두가 폐인은 아니다. 하지만 유저갤러리에 사진을 올리고 거기에 댓글을 다는 이들만 하루 수천명을 넘는다. 이 정도의 열성을 보이는 이라면 폐인으로 불릴 만하다는 게 이들의 자평이다.

디시 폐인들은 디지털 카메라 마니아들이다. 출·퇴근이나 등·하굣길은 물론, 밥먹으러 오갈 때도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다닌다. 혹시라도 뭔가 그림되는 것을 건질 수 있을까 해서다. 그렇게 찍은 사진을 곧바로 갤러리에 올린다. 그러면 순식간에 수십에서 수백개의 댓글이 앞다퉈 오른다. ‘주식폐인’이라는 닉네임으로 자주 엽기갤러리에 사진을 올리는 하태진(23·회사원)씨는 “댓글이 많이 붙을수록 보람을 느끼고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역시 스스로를 폐인으로 자부하는 전재진(23·회사원)씨는 “지금은 사진보다 리플달기에 더욱 흥미를 갖고 몰두하는 이들이 많다”고 말했다.

폐인들이 주도하는 댓글문화는 최근 사이버상의 커다란 유행 하나를 만들어냈다. ‘아햏햏’ 열풍이다. 한글표기법엔 아예 없는 글자다. 완성형 폰트론 띄울 수도 없다. 그러나 네티즌 사이에서 아햏햏은 요즘 최고 인기말이다. 90년대 후반 네티즌 문화를 강타한 ‘엽기’ 열풍에 버금가는 기세다. 한동안 온갖 사안이 ‘엽기적’이라는 한마디로 통칭됐듯이 요즘엔 ‘아햏햏’ 한마디면 달리 수사가 필요 없다. 좋아도 아햏햏, 나빠도 아햏햏이다. 감탄사가 됐다가 형용사가 됐다가 의성어도 된다.

아햏햏의 시초에 대해선 여러 설들이 있다. 그 하나. 지난 2월 디시인사이드 엽기갤러리에 한 여자 조각상을 껴안고 기괴한 웃음을 짓는 남자 사진이 올랐다. 사진 속 남자 옆엔 아햏햏이란 글자가 적혀 있었다. 독특한 남자의 표정과 어우러져 아햏햏이란 단어는 순식간에 네티즌들 사이에 유행어로 번져갔다.

그 둘. 일본 만화 주인공 옷을 입은 일본 여인의 코스프레 사진이 올라왔다. 한 네티즌이 ‘아~흑~헉헉~핵핵~아햏햏’이라고 댓글을 달았다. 소피티아라는 그 여인은 ‘객관적으로 못생긴’ 용모인데도 디시 폐인들의 미녀로 떠받들어졌고, 아햏햏도 열풍처럼 퍼져갔다. 어떤 설이건 아햏햏이 약간 코믹하면서도 뭐라 단정짓기 어려운 상황에 대한 표현으로 제기됐다는 점은 확실해보인다. 하태진씨는 “어이없거나 다른 표현이 안 될 때 아햏햏이라는 말을 쓴다”고 말했다.

도대체 아햏햏이 무슨 뜻이야?

사진/ 아햏햏 닷컴의 부운영자 김인욱씨. 아햏햏을 폐인들의 언어에서 보편적인 네티즌 문화로 확산시키고자 한다. (김종수 기자)
한번 표현된 언어는 생명력을 갖고 자체 증식하기 시작한다. 사이버 폐인들은 아햏햏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아햏햏으로 세상의 모든 의미를 담을 수 있으며, 아햏햏의 진리를 깨닫는 일(득햏)이야말로 폐인들의 진정한 지향점이 될 수 있다는 주장으로까지 아햏햏 담론은 확장되었다.

“불가에서 중생이 있듯이 폐인 세계에는 햏자가 있다. 햏자들은 열반에 다다름을 득햏이라 하는데, 이 득햏을 하기 위해 항시 수련을 하고 있다. 득햏 수련에는 3대 기본 수련과정이 있으니, 그것은 주침야활, 면식, 햏 언수행이다”(햏자복음 3장). 폐인 가운데 폐인이 햏자이며, 이들은 폐인의 일반조건에 더해 햏언수행을 쌓음으로써 득햏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얘기다. “햏언수행은 속세의 말들을 버리고 아햏햏만으로 의사소통하는 수행”을 말한다.

햏자를 자부하는 폐인들은 디시인사이드를 떠나 새롭게 인터넷 곳곳에 아햏햏의 ‘영지’를 만들어가고 있다. 인터넷 포털사이드 다음(daum.net)에만 60개의 관련 카페가 개설됐고, 아햏햏 닷컴(ahehheh.com)이라는 햏자 전문 사이트는 회원 수만 3만명에 이른다.

%%990003%5이곳에서 햏자들은 서로 하오체를 쓰며 햏자들만의 언어로 의사를 소통한다. 무언가를 요구하는 행위에는 ‘압박’이란 단어를, 응징한다는 뜻으론 ‘방법한다’를, 없다는 ‘업ㅂ다’를 대신 쓴다. 행위를 나타내는 모든 동사는 ‘쌔우다’라는 한마디로 대체 가능하다. 피터판규라는 아이디를 쓰는 아햏햏닷컴 부운영자 김인욱(27)씨는 “아햏햏은 사진과 단어에서 새로운 의미들을 짚어내고 이를 발전시킨 대표적 사례다. 기존 의미의 해체와 재구성이라는 포스트모던적 의미 작용과 엽기에 이은 비급문화의 키치적 트렌드, 선에 대한 열광 등 현대 사회의 문화적 담론들이 복합적으로 담겨 있다”고 평가내렸다.

이런 이해를 따르면, 폐인이란 단순히 쓸모 없는 존재가 아니다. 이들은 사이버 문화를 새로이 창출하고 전파하는 하나의 사이버 전위인 셈이다. ‘쓸모 없는 것의 쓸모 있음’에 관한 노자의 역설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민경배 사이버문화연구소장은 “폐인이나 햏자들은 피시(PC)통신 시절부터 게시판 논객 등으로 인터넷 관련 문화를 앞장서 만들어오던 사람들의 흐름에 서 있다. 사이버 문화 전체를 규정한다고 볼 순 없지만, 주도적 하위문화의 창출자이자 전파자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사이버 공동체들끼리 경쟁도

폐인들이 사이버 문화의 주체로 떠오른 데는 이유가 있다. 가톨릭대 강사(사회학)고동현씨는 “인터넷은 대면적 관계가 아니어서 감정적 교류가 어렵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텍스트를 변형시켜 나름의 은어나 규범들을 만들어 감성적 공동체를 꾀하게 된다. 폐인들은 이런 문화적 변용감각이 앞선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민경배 소장은 “폐인들은 PC통신 시절 이래 ‘우리는 일반 네티즌들과는 다른 진정한 유저다’라고 생각하는 일종의 선민의식을 지닌 마니아 집단이다. 아햏햏 또한 일종의 구분짓기 전략에서 나온 담론”이라고 지적했다.

폐인들의 이런 특성은 향후 아햏햏 열기의 운명과 관련해서도 시사점을 남긴다. 민 소장은 “아햏햏은 최초 폐인들의 하위문화로 출발했지만, 지금은 전체 네티즌 문화로 커가는 상태다. 좀더 지나면 폐인들은 또 다른 자기들만의 담론을 내놓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고동현씨는 “인터넷상의 공동체는 갈수록 파편화의 길을 걷고 있다. 몇개의 폐인집단들이 각자의 언어들을 내놓고 경쟁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지금도 나우누리 유머동회회에선 아햏햏이라는 단어를 쓰면 강퇴당한다. 대신 이곳의 폐인들은 스타쉬피스라는 말을 아햏햏과 같은 용법으로 쓴다. 사이버 영토의 담론문화를 이끌 폐인들의 경쟁체제는 이미 작동 중이다.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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