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상사 노동조합 지부장 출신의 여걸 장현자 시의원, 그가 쉼없이 일을 벌이는 원천
가발산업이 우리나라 경제에 호황을 가져다준 효자 노릇을 한 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지금은 대재벌의 패션회사로 이름이 바뀐 ‘반도상사’의 복덩어리가 바로 가발이었고, 그 공장에서 일한 노동자들은 지금도 그 시절을 “잡초처럼 살았다”고 회고한다.
시대가 부여한 소중한 ‘형벌’
반도상사가 처음 세워진 해에 입사해 10년이 넘도록 그곳 현장에 있었고 노동조합 창립을 주도한 사람으로서 노동조합의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본 이가 있다. 반도상사노동조합 전 지부장 장현자(51)씨다. 그는 그 뒤 20년 넘는 세월 동안 “우리가 겪은 체험의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책임감과 지난 날 우리들의 성실한 삶이 그대로 방치되어 버릴 것 같은 절박감을 항상 부여안고” 살았다. 이사할 때마다 보물상자처럼 소중하게 갖고 다닌 수첩·일지·유인물·회지 등 한 보따리의 자료들을 정리해 장현자씨는 최근 <그때 우리들은>을 펴냈다.
“우리들의 청춘을 불살랐던 그곳. 현장에서 마지막의 눈물을 머금고 나올 수밖에 없었던 그곳. 노동조합을 어렵게 창립하여 결국 7년 만에 군부독재와 대재벌과의 합작품으로 만들어진 탄압 속에서 노조의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그곳. 노동조합을 통해 세상의 흐름을 알고 의식을 깨우쳤고, 우리들에게 인생의 의미와 사회를 정의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의 가르침을 주었던 그곳. 동지들의 사랑과 나눔을 알게 해준 그곳. 오늘의 나를 있게 해준 그곳. 어찌 내 인생에서 그때의 우리들을 잊을 수가 있겠는가?” 그렇게 시작되는 300쪽이 넘는 책을 단숨에 읽었다. 개인의 인생사까지 포함해 50년 가까운 세월의 기록을 읽은 뒤 ‘장현자씨는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당연히 그것이 궁금했다. 대전까지 내려가며 내 마음속의 ‘막연한 기대’는 서서히 ‘가득 찬 확신’으로 바뀌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선배들이 대부분 그랬으니까…. 지방 대학교에서 인류학과 교수로 일하는 선배를 10여년 만에 만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지역의 환경단체와 시민단체에서 ‘무슨무슨 위원’의 직함을 몇개씩이나 갖고 있다는 얘기를 하며 선배는 “우리는 왜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며 살든지 이런 단체에 꼭 이름 하나씩 걸고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라고, 그것이 마치 ‘천형’(天刑)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지만, 그것이야말로 시대가 우리에게 부여한 얼마나 소중한 형벌인가. 마지막 싸움, 그리고 결혼식 장현자씨는 나를 보자마자 “어? 우리 언젠가 만난 적이 있었지? 그래. 80년대 초 그 무렵, 어디에선가 우리가 만났을 거야”라고 했고, 내 입에서는 대뜸 “장현자 선배”라는 말이 나왔다. 그렇게 시작된 20년 만의 만남 동안 나는 대전까지 내려가면서 마음속에 가득 찬 확신이 절대로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거듭 확인할 수 있었다. 반도상사 노동자들이 모여 눈물을 펑펑 쏟으며 노동조합 해산총회를 한 것이 1981년 3월13일이었고, 장현자씨가 남편 김준식씨와 결혼한 것은 그 며칠 전인 2월22일이었으니 결혼식장에 선 장현자씨의 마음이 어땠을까? “노동조합은 마지막 싸움을 힘들게 하는 중이어서 나는 조합원들에게 무척 미안했어. 가족의 바람 때문에 결혼하기로 결정은 했지만 ‘조합원들과 끝까지 함께한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지. 그때 나는 결혼해서 살면서도 절대로 일반적인 주부로만 머물지는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했어.” 그 뒤 장현자씨의 삶은 결혼식장에서 한 다짐이 현실의 삶에 투영되는 눈물겨운 과정이었다. 아파트 자치회를 시작으로 소비자협동조합운동·빈민운동·보육운동·환경운동·우리밀살리기운동·여성단체운동·주민자치운동 등 장현자씨가 했던 활동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만을 들으면서도 나는 ‘사람이 어떻게 하면 저렇게까지 열심히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고개가 숙여졌다. 결혼 뒤 성남에서 살기 시작한 지 3개월쯤 되었을 때 경찰서에서 형사가 찾아왔다. “장현자씨에 관한 모든 서류가 우리 경찰서에 이첩되었다. 이곳에서 또 노동자들을 선동하거나 하면 곤란하니 참고하라”며 은근히 압력을 주고 갔다. 아파트 자치회 활동을 하는 동안에도 형사들이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지시해 “장현자씨는 사상이 불온한 사람”이라고 소문을 내는 등 동네 주민들에게까지 외면당하도록 공작을 했다. 이 말을 들으며 ‘설마 그렇게까지 했을라고…. 장현자씨의 지나친 피해의식이겠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80년대 초 암흑의 세월을 까맣게 잊은 사람이다. 장현자씨는 그런 어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계속 소비자협동조합운동·빈민운동·보육운동을 펼쳐나갔다. 이후 서울·인천 등 각 지방의 빈민지역에 탁아소들이 빈민운동의 일환으로 하나둘씩 생겨나면서 87년부터는 ‘전국지역사회탁아소연합회’ 회장으로 일했다. ‘성남민주여성회’(나중에 이름을 ‘성남여성노동자회’로 바꿈)를 창립해 회장을 맡기도 했다. 무시와 몰상식과 맞서 통쾌하게 이기다
성남에서의 10년 활동을 정리하고 대전으로 내려온 것은 91년 3월이었다. 대전지역에서는 먼저 다니던 성당을 중심으로 신부님과 의논해 ‘환경창조보존분과’를 만들었고, 대전·충남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 홍보부장을 맡기도 했다. 나중에는 대전교구 차원에서 환경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각 본당마다 환경분과를 만들도록 제도가 마련되었다. 95년 12월에 ‘대전교구 가톨릭환경회의’가 창립되었고, 그 산파역을 맡은 장현자씨에게는 사무국장이라는 책임이 주어졌다. 이외에도 ‘대전교구평신도협의회’ 상임위원, ‘대전여민회’ 부회장 등의 직책을 맡았고, ‘주민자치위원회’ 의정 모니터 활동, 아파트 자치부녀회장을 맡아 주민자치운동을 하는 등 정말로 쉬임없이 활동했다.
장현자씨가 한 많은 일들 가운데서 한 가지에 대해서만 간단히 설명한다 해도 수십쪽 분량의 보고서를 만들어야 할 만큼 그는 정말 열심히 활동했다. ‘살기좋은아파트공동체운동’ 하나만 잠시 들여다보자. 자치회 체제를 180도 바꾸는 일, 주민들이 원하는 프로그램을 파악하는 일, 도서실을 만들어 무료로 책을 빌려주는 일, 주민잔치를 열어 어린이와 노인들에게 즐거운 시간을 마련해주는 일, 봄·가을에 환경알뜰바자회를 열고 수익금을 좋은 곳에 쓰는 일, 학생들과 주민들을 대상으로 바둑교실·한문교실·서예교실·퀼트교실·종이접기교실·단학교실을 열어 진행하는 일 등이 모두 장현자씨의 세심한 손길 없이는 불가능한 일들이었다. 장현자씨가 최근 몇해 동안 한 일의 분량은 다른 사람들이 평생 동안 한 일과 견줘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많다.
지난 지방의회 선거에서 장현자씨는 대전광역시 서구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선거기간에 이른바 ‘관변단체’라고 하는 수많은 조직과는 일절 관련을 맺지 않았다. “여자가 나와봤자…” 하고 무시하는 몰상식한 사람들의 예상을 통쾌하게 뒤엎고 압승을 했다. 나머지 두 후보의 표를 합친 것과 장현자 후보의 득표가 거의 비슷했다. 대전 서구의회 21명 의원 가운데 여성의원은 장현자씨 한 사람밖에 없다. 서구의회에서만 아니라 대전광역시에 있는 5개 기초의회를 통틀어 단 하나뿐인 여성의원이다. 대전시 서구의회 운영위원회 부회장으로서 이제 또 시작하는 새로운 일인 의정활동의 계획에 관한 이야기를 길게 들었다.
그렇게 낯선 곳에서 스스로 끊임없이 일을 만들어 할 수 있는 자신감의 배경을 물어보았다. “내가 그 엄혹한 시절, 반도상사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한 사람이잖아. 우리는 그때의 어려움을 견뎌낸 사람들이잖아. 이 정도의 어려움은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 생각으로 이기는 거야.” 그것은 70, 80년대 암흑과 같은 시절, 막강한 권력과 자본에 맞서 처절한 민주노조운동을 한 모든 이들이 가질 수 있는 자부심이다.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사진/ (이용호 기자)
“우리들의 청춘을 불살랐던 그곳. 현장에서 마지막의 눈물을 머금고 나올 수밖에 없었던 그곳. 노동조합을 어렵게 창립하여 결국 7년 만에 군부독재와 대재벌과의 합작품으로 만들어진 탄압 속에서 노조의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그곳. 노동조합을 통해 세상의 흐름을 알고 의식을 깨우쳤고, 우리들에게 인생의 의미와 사회를 정의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의 가르침을 주었던 그곳. 동지들의 사랑과 나눔을 알게 해준 그곳. 오늘의 나를 있게 해준 그곳. 어찌 내 인생에서 그때의 우리들을 잊을 수가 있겠는가?” 그렇게 시작되는 300쪽이 넘는 책을 단숨에 읽었다. 개인의 인생사까지 포함해 50년 가까운 세월의 기록을 읽은 뒤 ‘장현자씨는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당연히 그것이 궁금했다. 대전까지 내려가며 내 마음속의 ‘막연한 기대’는 서서히 ‘가득 찬 확신’으로 바뀌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선배들이 대부분 그랬으니까…. 지방 대학교에서 인류학과 교수로 일하는 선배를 10여년 만에 만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지역의 환경단체와 시민단체에서 ‘무슨무슨 위원’의 직함을 몇개씩이나 갖고 있다는 얘기를 하며 선배는 “우리는 왜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며 살든지 이런 단체에 꼭 이름 하나씩 걸고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라고, 그것이 마치 ‘천형’(天刑)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지만, 그것이야말로 시대가 우리에게 부여한 얼마나 소중한 형벌인가. 마지막 싸움, 그리고 결혼식 장현자씨는 나를 보자마자 “어? 우리 언젠가 만난 적이 있었지? 그래. 80년대 초 그 무렵, 어디에선가 우리가 만났을 거야”라고 했고, 내 입에서는 대뜸 “장현자 선배”라는 말이 나왔다. 그렇게 시작된 20년 만의 만남 동안 나는 대전까지 내려가면서 마음속에 가득 찬 확신이 절대로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거듭 확인할 수 있었다. 반도상사 노동자들이 모여 눈물을 펑펑 쏟으며 노동조합 해산총회를 한 것이 1981년 3월13일이었고, 장현자씨가 남편 김준식씨와 결혼한 것은 그 며칠 전인 2월22일이었으니 결혼식장에 선 장현자씨의 마음이 어땠을까? “노동조합은 마지막 싸움을 힘들게 하는 중이어서 나는 조합원들에게 무척 미안했어. 가족의 바람 때문에 결혼하기로 결정은 했지만 ‘조합원들과 끝까지 함께한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지. 그때 나는 결혼해서 살면서도 절대로 일반적인 주부로만 머물지는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했어.” 그 뒤 장현자씨의 삶은 결혼식장에서 한 다짐이 현실의 삶에 투영되는 눈물겨운 과정이었다. 아파트 자치회를 시작으로 소비자협동조합운동·빈민운동·보육운동·환경운동·우리밀살리기운동·여성단체운동·주민자치운동 등 장현자씨가 했던 활동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만을 들으면서도 나는 ‘사람이 어떻게 하면 저렇게까지 열심히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고개가 숙여졌다. 결혼 뒤 성남에서 살기 시작한 지 3개월쯤 되었을 때 경찰서에서 형사가 찾아왔다. “장현자씨에 관한 모든 서류가 우리 경찰서에 이첩되었다. 이곳에서 또 노동자들을 선동하거나 하면 곤란하니 참고하라”며 은근히 압력을 주고 갔다. 아파트 자치회 활동을 하는 동안에도 형사들이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지시해 “장현자씨는 사상이 불온한 사람”이라고 소문을 내는 등 동네 주민들에게까지 외면당하도록 공작을 했다. 이 말을 들으며 ‘설마 그렇게까지 했을라고…. 장현자씨의 지나친 피해의식이겠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80년대 초 암흑의 세월을 까맣게 잊은 사람이다. 장현자씨는 그런 어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계속 소비자협동조합운동·빈민운동·보육운동을 펼쳐나갔다. 이후 서울·인천 등 각 지방의 빈민지역에 탁아소들이 빈민운동의 일환으로 하나둘씩 생겨나면서 87년부터는 ‘전국지역사회탁아소연합회’ 회장으로 일했다. ‘성남민주여성회’(나중에 이름을 ‘성남여성노동자회’로 바꿈)를 창립해 회장을 맡기도 했다. 무시와 몰상식과 맞서 통쾌하게 이기다

사진/ 대전시 서구의회 의원들과 함께. 서구회의 21명의원 가운데 그는 유일한 여자다. (이용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