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 간의 신뢰는 공권력으로 회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자율적인 노사관계의 형성에서 공권력은 죽음의 처방전에 속한다.
필자가 영국에서 그곳의 노동조합을 연구하던 1997년, 런던의 한 노동조합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그 노동조합은 이른바 사회주의 노동자당(Socialist Workers’ Party)의 당원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고, 이데올로기적 급진성은 수단으로서의 과격성과 친화력이 있는 법이니만큼 파업 또한 일상적으로 일어나던 곳이었다. 필자의 연구에 대해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한 노조간부들과 함께 점심을 하던 중 필자는 단체협약을 좀 보여달라고 요청했다. “보여줄 수 없습니다.” 첫마디 대답치고는 지나치게 단호했다. 어이가 없어 차라리 웃으면서 내가 물었다. “왜 이면계약이기라도 합니까?”
문서화된 협약이 없다고?
결론은 협약 자체가 없다는 것이었다. 문서화된 협약이 없다? 이른바 책에서나 읽은 신사협정이었다. 곧바로 내 질문이 이어졌다. “그랬다가 만일 사용자가 협약을 지키지 않으면 어떡합니까?” 위원장을 비롯한 교섭위원 전원의 서명에 날인을 붙이고 그것도 모자라 회의록을 작성하고 때로는 녹음까지 불사한 채 협약을 맺었음에도, 때로는 그마저 지켜지지 않아 또 한바탕 노사갈등을 겪곤 하는 우리네 실정으로는 매우 당연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그게 얼마나 한국적인 질문인가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아니 약속을 했는데 안 지킨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아차, 하며 질문을 바꾸었다. “그래도 해석상의 차이가 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다시 만나 이야기하면 되지요.” 정말이지 싱거운 대답이었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단체협약이 법적인 구속력을 갖지 못하는 나라가 영국이라는 이야기는 차라리 사족이다. 노사관계에서 신뢰란 말은 누구나 하는 말로 바뀐 지 오래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노사관계에서 그런 것이 백년하청이라는 것쯤은 내남없이 알고 있기도 하다. 노사관계에서 파트너십이라는 말이 유행하자 런던 경제대의 켈리(J. Kelly) 교수는 “없어져주기를 바라는 당사자와 파트너가 된다는 것이 가능이나 한가”라고 되묻고 있다. 다른 한 교수(L. Turner)는 노사 간의 신뢰란 ‘갈등을 거치면서 테스트되는 것’이라고 못박고 있다. 파업이 노동조합의 권리라면 파업기간 중에 적어도 파업의 당사자인 상대방을 인정하는 것은 파업의 해결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파업 이후의 안정적인 노사관계를 위해서도 필수적이라는 의미다. 경희의료원과 카톨릭성모병원의 파업이 8월30일로 100일째를 맞았다. 애초 임금 등 노동조건을 둘러싸고 시작한 노사갈등은 이제 그 차원을 넘어버렸다. 병원문을 닫는 한이 있어도 노조는 없애야겠다는 원초적인 욕망과 옥쇄를 각오하더라도 노조만은 지키겠다는 최후의 결단만이 벼랑 끝에서 맞붙고 있다. 노동부는 이를 노사관계에서의 자율성을 회복하는 계기로 삼겠다고 했다. 그러나 노조말살과 노조사수가 맞부딪치는 현장에서 자율적인 노사관계란 노동조합을 정글의 법칙에 맡겨놓겠다는 데 다름 아니다. 구속수배, 체포영장, 징계, 손해배상 및 가압류와 같은 파업현장의 익숙한 용어가 자율적인 노사관계와 양립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율적인 노사관계의 허구 자율적인 노사관계는 상대방에 대한 인정에서 출발하여 대화로 마감된다. 그런데 이러한 자율적인 노사관계는 노사 간 힘의 균형을 전제로 하며, 이 과정에서 노동조합의 파업권은 힘의 균형을 보장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공익 서비스라는 미명 아래 파업권이 봉쇄당하고 공권력의 투입이 사용자가 아닌 노동조합을 겨냥하는 터에 ‘법과 원칙의 확립’이란 사용자 우위의 노사관계를 가리기 위한 한낱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병원의 파업현장에 공권력을 투입한다는 말이 나오자 사용자의 태도가 더욱 경직되었다는 것이 이를 말한다. 노사 간의 신뢰는 공권력으로 회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자율적인 노사관계의 형성에서 공권력은 죽음의 처방전에 속한다. 공권력의 투입이 외형적인 노사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지도 미지수지만, 설령 그렇다손 치더라도 사용자와 정부에 대한 불신은 더 큰 저항을 내연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노사관계의 안정을 바란다면 공권력이라는 조자룡의 헌 칼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직권중재조항의 철폐와 같은 공정한 ‘법과 원칙’을 확립하고 동시에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적극적인 중재에 나설 일이다. 파업이 노사 간 신뢰회복을 가져오는 역설을 우리는 정녕 기대할 수 없는 것일까? 이번호부터 논단 필진이 바뀝니다. 박태주씨와 홍세화(<한겨레> 기획위원), 김대영(정치평론가), 조선희(소설가)씨가 돌아가며 집필하게 됩니다. 그동안 수고해주신 최보은(영화월간지 <프리미어> 편집장), 정태욱(영남대 교수·법학), 설혜심(연세대 강사·서양사), 정진웅(덕성여대 교수·문화인류학)씨께 감사드립니다.

사진/ 박태주 ㅣ 산업연구원 연구위원·노사관계학
“아니 약속을 했는데 안 지킨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아차, 하며 질문을 바꾸었다. “그래도 해석상의 차이가 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다시 만나 이야기하면 되지요.” 정말이지 싱거운 대답이었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단체협약이 법적인 구속력을 갖지 못하는 나라가 영국이라는 이야기는 차라리 사족이다. 노사관계에서 신뢰란 말은 누구나 하는 말로 바뀐 지 오래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노사관계에서 그런 것이 백년하청이라는 것쯤은 내남없이 알고 있기도 하다. 노사관계에서 파트너십이라는 말이 유행하자 런던 경제대의 켈리(J. Kelly) 교수는 “없어져주기를 바라는 당사자와 파트너가 된다는 것이 가능이나 한가”라고 되묻고 있다. 다른 한 교수(L. Turner)는 노사 간의 신뢰란 ‘갈등을 거치면서 테스트되는 것’이라고 못박고 있다. 파업이 노동조합의 권리라면 파업기간 중에 적어도 파업의 당사자인 상대방을 인정하는 것은 파업의 해결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파업 이후의 안정적인 노사관계를 위해서도 필수적이라는 의미다. 경희의료원과 카톨릭성모병원의 파업이 8월30일로 100일째를 맞았다. 애초 임금 등 노동조건을 둘러싸고 시작한 노사갈등은 이제 그 차원을 넘어버렸다. 병원문을 닫는 한이 있어도 노조는 없애야겠다는 원초적인 욕망과 옥쇄를 각오하더라도 노조만은 지키겠다는 최후의 결단만이 벼랑 끝에서 맞붙고 있다. 노동부는 이를 노사관계에서의 자율성을 회복하는 계기로 삼겠다고 했다. 그러나 노조말살과 노조사수가 맞부딪치는 현장에서 자율적인 노사관계란 노동조합을 정글의 법칙에 맡겨놓겠다는 데 다름 아니다. 구속수배, 체포영장, 징계, 손해배상 및 가압류와 같은 파업현장의 익숙한 용어가 자율적인 노사관계와 양립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율적인 노사관계의 허구 자율적인 노사관계는 상대방에 대한 인정에서 출발하여 대화로 마감된다. 그런데 이러한 자율적인 노사관계는 노사 간 힘의 균형을 전제로 하며, 이 과정에서 노동조합의 파업권은 힘의 균형을 보장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공익 서비스라는 미명 아래 파업권이 봉쇄당하고 공권력의 투입이 사용자가 아닌 노동조합을 겨냥하는 터에 ‘법과 원칙의 확립’이란 사용자 우위의 노사관계를 가리기 위한 한낱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병원의 파업현장에 공권력을 투입한다는 말이 나오자 사용자의 태도가 더욱 경직되었다는 것이 이를 말한다. 노사 간의 신뢰는 공권력으로 회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자율적인 노사관계의 형성에서 공권력은 죽음의 처방전에 속한다. 공권력의 투입이 외형적인 노사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지도 미지수지만, 설령 그렇다손 치더라도 사용자와 정부에 대한 불신은 더 큰 저항을 내연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노사관계의 안정을 바란다면 공권력이라는 조자룡의 헌 칼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직권중재조항의 철폐와 같은 공정한 ‘법과 원칙’을 확립하고 동시에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적극적인 중재에 나설 일이다. 파업이 노사 간 신뢰회복을 가져오는 역설을 우리는 정녕 기대할 수 없는 것일까? 이번호부터 논단 필진이 바뀝니다. 박태주씨와 홍세화(<한겨레> 기획위원), 김대영(정치평론가), 조선희(소설가)씨가 돌아가며 집필하게 됩니다. 그동안 수고해주신 최보은(영화월간지 <프리미어> 편집장), 정태욱(영남대 교수·법학), 설혜심(연세대 강사·서양사), 정진웅(덕성여대 교수·문화인류학)씨께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