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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이유 있는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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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8-2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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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할머니’들의 선택은 “각박한 세상에 단비 같은 미담”일 수도 있으나, 지위차별·학력차별·성차별이 만연한 우리 세상의 모습에 대한 신랄한 고발장이기도 하다.

사진/ 정진웅ㅣ덕성여대 교수·문화인류학
83살의 실향민 강태원 할아버지가 평생 모은 270억원 상당의 재산을 불우이웃을 돕는 데 써달라고 내놓았다. 그러자 국내 거의 모든 일간지와 공중파 방송이 사설과 논평을 통해 “각박한 세상에 한 줄기 단비” 같은 이 미담을 전하고 그 ‘쾌거’에 담긴 뜻을 기렸다. 이런 기부행위는 미국과 유럽의 기부문화를 따라잡는 ‘선진적’인 것이고, 또 자식에 대한 우리 사회의 집착을 넘어서는 ‘혁신적’인 것이라는 얘기다. 늘 그렇듯이 어려운 삶을 살아온 사람들의 이러한 기부행위에 대한 칭송은 법을 농락하며 자신의 부를 대물림하기 위해 애쓰는 재벌들에 대한 꾸짖음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매번 그저 이렇게 칭송하고 또 꾸짖으면 그만인 것일까?

그들이 당한 차별을 보라

1990년 무렵부터 우리 사회에는 폐품수집이나 삯바느질, 또는 시장에서의 억척스런 노동 등을 통해 평생 어렵게 모은 재산 전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할머니들에 대한 언론보도가 계속 이어졌다. 기부금의 평균 액수는 10억원을 웃돈다. 이 할머니들은 거의 예외 없이 학교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고, 평생 궂은일을 하며 거의 ‘자린고비’ 수준의 근검절약을 실천한 분들이었다. 돼지고기가 먹고 싶어 정육점 앞에서 살까 말까 오랫동안 망설이다 결국은 그냥 발걸음을 돌린 얘기, 시장에서 날마다 남들이 버린 끈조각들을 모아 깨끗이 씻고 가르고 엮어서 다시 쓰는 모습 등,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푼도 쉽게 쓰지 못하는 할머니들의 근검절약 태도는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그 기부행위에는 어떤 뜻이 담겨 있기에 그렇게 모은 ‘피 같은’ 재산을 송두리째 내놓을 수 있는 것일까?


속뜻을 다 헤아릴 수는 물론 없겠지만, 나는 그분들이 우리 사회에서 일평생 살면서 받았을 차별의 경험에 주목하게 된다. 이들의 기부행위가 언론에 보도되기 전에 우리 사회는 이런 사람들의 존재를 어떠한 눈길로 바라보았을까? 학력과 사회적 지위, 세련됨과 출신배경, 또 나이와 성별에 따라 ‘사람대접’이 달라지는 사회에서 이분들이 평생 받았을 차별의 너비와 깊이를 나로서는 가늠해보기 힘들다. 강태원 할아버지가 초등학교 학력의 실향민이고 “혈혈단신”으로 “막노동판을 전전하고 쉰 떡을 먹어가며 일했다”는 보도에도 그런 점에서 주목하게 된다. 우리 사회의 지배적 눈길은 평소 이러한 분들의 삶의 노고가 사회적 지위의 획득으로 이어지지 않는 한 그 삶의 의미나 존재의 위엄성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어떻게 그토록 어렵사리 모은 재산 전부를 대학에 기부할 생각을 했느냐는 물음에 많은 ‘기부할머니’들은 “내가 못 배운 게 한이 돼서”라고 짧게 답한다. 그 ‘한’이라는 한마디 단어 뒤에는 얼마나 많은 차별의 기억들이 압축되어 있을까? 이들의 기부행위는 근검절약의 몸짓들이 더 이상 미덕이 아니라 구차함과 초라함의 기호가 되어 비하와 차별을 낳는 사회풍토에 맞서 자신들의 삶의 방식의 숭고함을 주장하는 항의의 외침이며 존재증명의 몸짓이다. 그런 뜻에서 보면 어려우면서도 부지런하게, 하지만 주목받지 못하는 삶을 살아온 이 노인들의 기부행위는 ‘행동으로 쓴 자서전’이다. 이들은 우리 사회에서 부당하게 비하되는 자신들의 삶의 방식과 무관심 속에 사라져가는 자신들의 존재의 의미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들이 일군 ‘피와 땀’의 결정체를 제물로 바친 것이 아닐까?

재벌이 왜 기부하겠는가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 재벌의 기부문화가 없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갖은 편법과 술수로 재산과 사회적 지위를 동시에 얻었음에도 우리는 그들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그들이 쓴 책을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려놓는다. 우리가 재벌을 이렇게 무조건적으로 대접하는데 그들이 무엇이 부족해 기부행위를 통한 더 이상의 존재증명의 필요를 느끼겠는가?

따라서 계속 이어지는 이런 기부행위는 많은 언론에서 칭송하듯이 “선진국에선 이미 일상화·보편화된 기부문화”의 등장이 아니다. 이는 차라리 절약하면서 사는 삶이 아닌 절약할 필요가 없는 삶을 해바라기하는 우리 사회의 왜곡된 눈길에 대한 이유 있는 반란이다. ‘기부할머니’들의 선택은 “각박한 세상에 한 줄기 단비 같은 미담”일 수도 있으나, 지위차별·학력차별·성차별이 만연한 각박한 우리 세상의 모습에 대한 신랄한 고발장이기도 하다. 우리는 얼마나 그들의 기부를 칭송할 자격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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