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신도 아는 만큼 보인다
등록 : 2002-08-28 00:00 수정 :
“한국 언론들은 자존심도 없나 봐요. 외신, 특히 미국 언론이라면 그저 사족을 못 쓰니까요. 조기영어나 성형수술 열풍, 최근의 연예계 비리 등을 외신이 보도하면 국내 언론들은 무슨 대단한 새로운 특종을 발견한 것처럼 크게 써주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정작 외신들이 전하는 한국 관련 내용들은 대개 국내 신문이나 방송에서 나온 내용들을 참고해서 쓰여지는 경우가 많거든요. 재탕, 삼탕한 내용들을 한국 언론이 다시 받아서 주요 지면을 장식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어요.”
외국 기자들의 취재 통역을 9년째 맡고 있는
박진아(30)씨. 이 분야에서는 손꼽히는 외신전문 동시통역사다. 그는 요즘에는 주로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서울 주재 특파원의 취재 통역을 틈틈이 돕고 있다. 이전에는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와 독일의 유력 시사주간지 <슈피겔> 등의 영어·한국어 통역을 도맡아왔다. 누구보다 외신의 생리와 장·단점을 잘 아는 그는 한국 언론들이 외신을 과신하는 게 못내 안타깝다. 국내 신문이나 방송들이 어쩔 수 없이 외국 언론이 보도한 한국 관련 내용을 싣는 경우에도 비판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보도내용이 정확한 사실에 바탕을 둔 것인지, 편견이나 오해에서 비롯한 표현은 없는지를 꼼꼼히 따져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외국 기자들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기사화한 것이 있으면 따끔하게 꼬집기도 해야죠.” 그는 한국말을 모르는 외국 기자들이 건성으로 취재해 보도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귀띔한다. 서울에 나와 있는 외국 기자들이 현장에 달려가기보다는 번역이 부실한 통신기사에 기대는 경우가 많고, 전문가들의 견해도 제대로 안 듣는 경우가 많단다. ‘함량미달’ 기사가 더러 나온다는 얘기다.
외신 가운데 상당수는 박씨와 같은 통역원들의 도움을 받는다. 그래서 어떤 특정 사안에 대해서는 외국 기자들보다 통역원들이 더 깊이 있게 아는 경우가 많다. 박씨도 자신이 통역을 도와준 내용이 본질을 비켜가기도 해 종종 실망하곤 했다. 그래서 가끔은 자신이 기사를 직접 쓰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도 있다. 최근에는 미군 장갑차가 여중생 2명을 깔아뭉개 숨지게 한 만행을 잘 아는 외신 기자들에게 열심히 설명했으나 그들의 시큰둥한 반응 탓에 속이 무척이나 상했다. 하지만 북의 가족을 만난 이산가족이나 탈북자들의 절절한 사연들을 통역해준 내용이 주요 외신의 머리를 장식할 때는 보람도 컸다. 어릴 때부터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해외주재원인 아버지를 따라 영국·이탈리아·슬로베니아 등지를 옮겨다니면서 영어를 익힌 박씨는 “정작 통역을 제대로 잘 하려면 우리 글을 잘 쓰고, 조리 있게 말할 줄 알아 야한다”고 말한다.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