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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사람답게 이동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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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8-2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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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도 버스도 우리에겐 벽”…이동권 쟁취 위해 목숨걸고 단식투쟁 벌이는 장애인들

사진/ "사람답게 이동하고 싶다." 서울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에서 헌법에 규정된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며 시위에 나선 장애인들을 경찰이 끌어내고 있다. (이용호 기자)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서울 을지로 국가인권위원회 건물 앞 표지석에 새겨진 문구다. 이 문구가 말해주듯 국가인권위원회가 지향하는 세상의 모습은 매우 상식적인 것이다. 사람이 동물도 신도 아닌 ‘사람’답게 사는 상식적인 세상을 지향하는 국가인권위 위원장 집무실에서 지체장애인들이 지난 8월12일부터 농성을 벌이고 있다. 그냥 농성이 아니라 곡기를 끊고 하는 단식농성이다.

엉성한 지하철 리프트에 사고 속출

사진/ 리프트는 위험할 뿐 아니라 이용에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는 문제를 안고 있다. (이용호 기자)
농성이 길어지면서 이미 몇몇 참가자들은 병원으로 옮겨졌다. 처음 9명이 농성에 나섰지만, 8월15일을 지나면서 5명이 극심한 탈진증세로 들것에 실려나갔다. 그만둔 이들은 모두가 약을 복용하는 중증 장애인들이다. 지체장애인들은 크게 뇌성마비 장애인과 교통사고 등으로 몸을 다친 경우로 나뉜다. 증상이 심한 뇌성마비 장애인들은 대부분 경직약을 복용하고 있다. 온몸이 제멋대로 뻗지 않도록 신경을 조절해주는 약이다. 이걸 먹어야 그나마 활동하기가 좀 편해진다. 경직약은 무척 독한 성분으로 되어 있어 밥과 함께 먹어야 한다. 이번에 실려나간 이들은 경직약을 밥 없이 먹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 단식이 길어지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교통사고로 장애인이 된 이승연씨도 15일 낮 12시께 충무로 백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는 머리뼈를 크게 다쳐 인공 머리뼈를 해넣은 상태로 단식농성에 참여했다. 역시 독한 혈압조절약을 계속 복용해야 하는 처지였다. 이씨는 병원에 실려가 응급처치를 받으면서도 “이번 투쟁에서 꼭 승리해야 하는데, 이렇게 병원까지 와 많은 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쳐 송구스럽다”고 말했다.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나선 장애인들이 요구하는 것은 4가지다. 첫째는 지난 5월 서울지하철 5호선 발산역 리프트에서 윤재봉(63)씨가 떨어져 숨진 참사에 대해 서울시가 일간신문 광고를 통해 공개사과하라는 것이다. 둘째는 서울시는 책임을 통감하고 유족들에게 피해를 보상하라는 것이다. 셋째는 다시는 장애인이 떨어져 죽거나 다치지 않게 지하철 역사에 안전대책을 마련하고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라는 것이다. 넷째는 장애인이 안전하고 편리하게 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가칭)저상버스도입을 위한 추진본부’를 설립하라는 것이다.

이번 농성의 도화선이 된 발산역 사고는 지난 5월19일 일어났다. 1급 중증 장애인인 윤씨는 저녁 7시께 전동 스쿠터를 탄 채로 발산역 1번 출구의 리프트를 이용하다 리프트 뒤쪽 2m 아래 바닥으로 추락했다. 머리 등에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겼지만, 다음날 새벽 숨을 거뒀다. 시장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윤씨는 리프트를 타고 계단을 올라온 뒤 리프트에서 내리려다 전동 스쿠터를 후진시키는 바람에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경찰은 “전동 스쿠터를 앞으로 진행하려다 잘못해 뒤로 몰았다”며 ‘단순 부주의’로 결론을 내리고 사건을 종결처리했다.

그러나 장애인들은 이 사고를 단순히 개인과실로 묻어버릴 수 없다며 분노하고 있다. 이번 농성을 이끌고 있는 ‘장애인이동권쟁취를 위한 연대회의’(이동권연대·http://access.jinbo.net)는 “전동 스쿠터를 타고 지하철 리프트를 이용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위험한 곡예일 수밖에 없다”며 리프트의 구조적 위험성을 지목하고 나섰다. 지금 설치된 지하철 리프트는 산업자원부에서 규정하는 어떠한 안전기준도 없이 설치된 것으로, 이 때문에 리프트 사고가 끊임없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동권연대는 “장애인용 지하철 리프트는 그 자체가 살인기계”라고 주장했다.

지하철 리프트 사고가 거듭돼온 점은 이들의 주장에 신빙성을 부여해준다. 지난 99년 6월28일 지하철 4호선 혜화역에서 전동 스쿠터에 의지한 이규식씨가 떨어져 다친 것을 시작으로 이동권연대가 파악한 리프트 사고만 이번까지 모두 6건이다. 지난해 1월22일 지하철 4호선 오이도역에선 수직형 리프트의 와이어가 끊어지면서 70대 장애인 박소엽씨가 떨어져 숨졌다. 함께 타고 있던 박씨의 남편도 중상을 입었다. 그리고 1년4개월 만에 다시 추락 사망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이동권연대는 추락사고의 대부분은 리프트의 허술한 구조와 관련이 있다고 지적했다. 리프트의 발판에 설치된 안전턱이 너무 낮고 약해 전동 스쿠터의 힘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이다. 단식농성에 참여한 뇌성마비 장애인 김창민(29)씨는 “전동 스쿠터를 타는 장애인 대부분이 사지가 불편해 스쿠터를 조정하기가 쉽지 않다. 또 기계가 무척 민감해 자칫 잘못하면 앞으로 간다는 게 후진을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김씨는 “그럴 때 안전턱이 튼튼하게 받춰줘야 떨어지지 않는데, 지금 리프트는 그게 너무 미약하다”고 잇단 사고의 원인을 풀이했다. 이동권연대 엄태근 사무국장은 “애초 허술하게 시설을 갖춰놓고 사고가 생기면 모두 장애인 개인의 부주의 탓으로 돌리는 게 지금의 현실”이라고 분노를 표시했다.

서울시도 구조적 문제에 대한 지적을 부인하지 못했다. 지하철을 관할하는 서울시 대중교통과의 윤선재 담당관은 “리프트의 안전턱이 전동 스쿠터의 후진하려는 힘을 감당하지 못했다”고 인정했다. 그는 “지금의 리프트가 애초 수동 휠체어용으로 만들어진 것이 근본적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추진력이 크고 무게도 무거운 전동 스쿠터가 실릴 경우 리프트줄이 끊어지거나 안전턱이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리프트의 잦은 고장도 수동 휠체어 기준으로 만든 탓에 전동 스쿠터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생기는 문제로 보인다고 윤씨는 설명했다.

대답없는 서울시여

사진/ 장애인들이 서울시의 공개사과와 대책마련을 촉구하며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단식농성을 하고 있다. (한겨레 김봉규 기자)
이 밖에도 리프트는 사방이 개방돼 이용하는 장애인들의 공포심을 유발하고 한번 이용하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단식농성을 현장에서 이끌고 있는 박경석 이동권연대 공동대표는 “리프트를 한번 타는 데 적게는 20∼30분, 환승장이 있으면 30∼40분이나 걸린다”고 말했다. 김창민씨는 “리프트를 타고 오르내리면 늘 고장으로 서지나 않을까 신경을 곤두세우게 된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런 점들 때문에 이동권연대를 중심으로 뭉친 장애인들은 지난해 오이도역 사고 이래 지하철에 리프트 대신 엘리베이터를 설치해 것을 지속적으로 서울시와 건교부, 복지부 등에 요구해왔다. 그러나 목숨을 걸고 타야 하는 리프트 대신 엘리베이터를 요구하는 이들의 ‘상식적’ 요구는 번번이 묵살됐다. 장애인들은 지난 7월27일 발산역 사고의 사과와 대책마련을 요구하며 서울시청 본관 구내식당에서 점거농성을 벌였다. 반발이 거세지자 서울시는 지난 8월5일 리프트에 추락방지용 안전벨트와 안전고리를 설치하겠다는 안전관리 대책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동권연대는 “리프트 사고는 리프트를 타고 내릴 때 안전벨트와 고리를 푼 상황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서울시 대책은 실효성이 없다”고 반박했다.

사법부 또한 법의 이름으로 이들의 ‘상식’을 물리쳤다. 지난해 한진구씨 등 장애인 9명이 연대해 서울시 및 서울시 지하철공사와 도시철도공사를 상대로 장애인이동권 침해 손해배상 공익소송을 서울지방법원에 냈다. 공공 교통수단인 지하철에 반드시 있어야 할 편의시설인 리프트가 없거나 이용시간이 너무 길어 헌법 등에서 보장한 자유로운 이동권이 침해되고 있으니 이를 보상하라는 것이었다. 지난 7월4일 담당 재판부는 “원고를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자유로운 이동권이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라고 인정하면서도 “피고들이 2005년까지 편의시설을 단계적으로 확충·정비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시행해나가고 있다는 점 등을 볼 때 원고들의 주장은 이유 없다”고 기각판결을 내렸다.

향후 시설 보완… 언제?

그러나 통계로 드러난 서울 지하철의 현황은 향후 시설을 보완하겠다는 피고쪽 주장을 받아들인 재판부의 여유로운 인식과는 뚜렷하게 대조된다. 장애인들의 염원과는 아득한 거리감마저 느껴진다. 지난 8월2일 <한겨레>가 서울 지하철 1∼8호선 263개역의 환승·승강 편의시설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엘리베이터가 없는 역은 71%인 186곳에 이르렀다. 그나마 리프트마저 없는 역이 109곳(41%)이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하철역의 평균 환승거리는 129.2m였고, 갈아타는 거리가 200m를 넘는 곳만 7곳이었다. 1호선 종로3가역에서 5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선 무려 312m를 이동해야 했다.

서울시는 2006년까지 엘리베이터 363대, 에스컬레이터 467대, 수평이동보도 4대 등 927대의 이동 편의시설을 설치할 계획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 734대는 2004년 이후에나 설치된다. 더욱이 문제가 불거진 리프트 93대를 새로 설치할 예정이다. “리프트 대신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라”는 장애인들의 간절한 외침은 여전히 당국의 호응 없이 묻혀지고 있다.

이동권연대는 장애인의 이동권을 실현하기 위해선 엘리베이터 설치와 함께 저상버스의 도입 또한 미룰 수 없는 과제라고 주장한다. 저상버스는 78cm에 이르는 계단을 없애고 바닥을 낮게 만들어 휠체어를 탄 채로 승차할 수 있게 한 버스다. 엄택근 사무국장은 “가장 일반적인 대중교통수단인 버스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어야 비로소 장애인들도 헌법에 보장된 이동의 자유를 다 누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동권은 물리적 장벽, 특히 교통시설 이용 등에서의 제약을 받지 않을 권리를 말한다. 엄태근 사무국장은 “이동권이 제약되기 때문에 장애인들은 직업을 구할 수 없고, 교육을 받거나 친구와 어울릴 수 없으며, 투표 같은 정치적 권리조차 자유롭게 누리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지난 2000년 장애인실태조사에 따르면, 집 밖의 활동에 불편을 겪는 이유(중복응답 허용)로 ‘대중교통수단의 편의시설 부족’을 든 장애인은 전체의 52.5%에 이르렀다. 또 59%는 계단 및 승강기의 편의시설 부족을 지적했다. 박경석 대표는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갈 수 있는 이동권은 헌법에 규정된 기본 인권의 하나로, 장애인들도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사람답게 살 수 있으려면 이동권부터 확보해야 한다. 저상버스 도입은 그 첫걸음”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서울시와 교통당국은 저상버스 도입 요구에 대해 분명한 실행의지를 보여주지 않고 있다. 이명박 서울시장은 지난 6월 서울시장 선거 직전 이동권연대 대표들과 만나 “임기 내 저상버스를 20%까지 도입하겠다”고 약속했다. 엄태근 사무국장은 “그러나 지난 7월 서울시청 점거농성 과정에서 면담할 땐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한발 물러서 무척 실망했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저상버스가 경사로와 턱이 많은 우리 도로사정에 맞지 않으며, 버스값도 일반 버스의 3배에 이른다며 전면도입에 난색을 표하고 있다. 대신 장애인용 셔틀버스를 시범적으로 6대 운행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교통개발연구원의 신연식 박사는 “최근 저상버스를 직접 운행해 시험해본 결과 우리 도심의 도로에서도 전혀 문제 없이 다닐 수 있었다”고 이를 반박했다. 그는 “일단 인천국제공항으로 운행하는 리무진 버스부터 저상버스로 바꾼 뒤 노선버스에도 계획을 정해 순차도입하자”고 제안했다.

유럽은 이미 저상버스 보편화

저상버스를 대량생산하면 차값도 기존버스의 1.5배로 낮출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신 박사는 “저상버스는 장애인뿐 아니라 노약자와 임신부 등 모든 교통약자들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으며, 일반인들도 승하차 시간이 줄어드는 이점이 있다. 유럽 대부분 나라에선 일반노선버스 표준형이 저상버스로 바뀐 지 오래”라고 강조했다. 박경석 대표는 “천연가스 버스 구입비용에 보조금을 주듯이 저상버스를 도입할 때도 보상금을 줘 버스 사업자들의 참여를 유도해야 한다. 세금은 그러라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하철 사방에 뚫리고/ 버스가 넘쳐나도/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벽/ 투쟁으로 세상 열어가리라/ 이동권 쟁취하리라/ 온몸에 사슬을 묶어/ 물러서지 않겠다.” 국가인권위 13층 위원장 집무실 바깥벽에 나붙은 <장애인 이동권 쟁취가>의 한 대목이다. 박경석 대표는 소금과 물만으로 허기를 달래면서도 “서울시의 공개사과와 구체적인 이행약속이 없으면 결코 그냥 나가지 않겠다”고 의지를 다졌다. 목숨 걸지 않고 이동하고 싶다는 건 매우 상식적인 수준의 소망이다. 장애인들은 밥을 굶으며 목숨 걸고 우리 사회의 상식을 시험하고 있다. 한편 국가인권위는 이들의 요구를 전달하고 서울시의 사과와 대책마련을 권고하겠다고 밝혔다.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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