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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자치의 거대한 뿌리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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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8-2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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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신문 기자들이 돌아본 유럽의 지방자치… 오랫동안 주민들 삶 속에 제도화돼 있어

주간 <당진시대>를 비롯한 전국 30여개 지역신문의 모임인 바른지역언론연대는 지난 7월29일부터 10박11일 동안 유럽연수를 실시했다. 지난해 미국의 노스캐롤라이나주 지역신문과 지방자치 현황을 둘러본 데 이어 두 번째다. 방문단은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의 에어크라트시를 시작으로 유럽의 풀뿌리 지방자치 현장을 취재했다.

돈보다 녹지를 선택한 기민당 시장

사진/ 에어크라트 시청사. 전혀 관공서란 느낌이 들지 않는다. 전통적인 건축양식에 주변 자연과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건물이다.
첫 방문지인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의 에어크라트시에 도착한 연수단 일행은 바로 다음 날 시 민원국장인 우베 크뤼거의 안내로 시청을 찾았다. 시청 2층에 있는 회의실에서 연수단은 아르노 베르너 시장을 만나 간단한 환영식에 참석했다. 외국에서 온 낯선 손님을 맞는 이 환영식에는 민원국장과 젊은 비서 외에는 다른 수행원은 보이지 않았으며, 시장은 비교적 자유롭게 행동하며 우리를 맞았다. 탁자 위에 놓인 커피와 음료수, 과일 등을 ‘셀프 서비스’라며 권하기도 했다.


환영식을 마치고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연수단 일행은 뜻밖에도 베르너 시장이 보수적 성향의 야당인 기민당(CDU) 소속임을 알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전혀 권위적인 느낌을 풍기지 않은 환영식과 시장의 태도에서 도무지 보수적 성향의 야당이라고는 짐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진/ 에어크라트시의 베르너 시장(왼쪽에서 세번째)과 함께한 바른지역언론연대.
한국의 소도시에서 비교적 심각한 문제인 노인문제를 베르너 시장은 오히려 노인들이 가장 부유한 층이라고 설명해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한국에서는 수많은 노인들이 빈곤과 소외감으로 고통받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노인들이 부유층이라니. 녹지정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에어크라트시는 막대한 예산을 들이며 녹지공간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곳에도 개발압력은 만만치 않았으나 녹지보호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이 땅을 “상업용지나 공장용지로 개발하면 시에 많은 세금이 들어오겠지만 시민들의 요구가 있는 만큼 대가를 치르더라도 녹지를 보호하겠다”는 것이 베르너 시장의 설명이다.

이러한 의문들은 통역을 맡은 한국언론재단 독일통신원 심영섭 박사와 아데나워 재단 소속으로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한 바 있는 크뤼거 민원국장의 보충설명으로 서서히 풀렸다. 이미 독일은 비스마르크 시절부터 국민연금·의료보험·실업연금제도가 시작됐으며, 50년 전부터는 복지연금제도도 실시됐다고 한다. 그러니 빈곤이나 소외감의 문제가 우리처럼 심각할 리 없다.

수많은 녹지공간과 시민공원으로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에어크라트시의 도시정책은 사유지보다 공유지가 많기 때문에 가능했다. 또한 산업시설 유치로 인해 들어올 몇푼의 돈보다 녹지공간과 도시미관을 더 중요시하는 시민의식과 이를 정책에 반영하는 자치단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진/ 에어크라트 시청 옆에 위치한 시민공원. 환경단체를 중심으로 시민들이 직접 가꾼다.
에어크라트시의 시의원과 시장은 주민들의 직접선거로 뽑는다. 또한 시장은 시의회 의장이 된다. 독일에서 시의원은 명예직으로 보수가 적기 때문에 시의원 모두 각자의 직업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모든 회의는 저녁에 개회된다. 눈에 띄는 점은 예산안을 의회에 상정하기 4주 전에 주민들에게 공개한다는 것이다. 또 주민들에 대한 공개와는 별도로 각 언론사에도 ‘사전에 검증하라’는 목적으로 예산안을 보낸다. 한국의 지방자치단체는 예산안 공개를 거부하고 의회가 열리기 불과 3∼4일 전에 안건 상정과 함께 공고한다. 그래서 내 고장 살림살이에 주민들이 개입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누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실질적으로 주민 참여가 가로막힌 셈이다.

시민들이 운영하는 분권화된 행정의 표출인 지방자치정부는 독일에서 오랜 전통이 있다. 그 기원은 중세시대의 자유도시로까지 거슬러올라간다. 본격적인 자치정부의 발상은 19세기 초 프러시아 시절에 생겨났다. 오랜 전통과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형성된 독일의 지방자치는 이미 주민들의 삶 속에 깊이 제도화된 형태로 뿌리내리고 있다.

우리 지도자들은 외유에서 뭘 배웠나

사진/ 에어크라트의 지역신문인 <에어크라트 로칼 안차이거>의 편집장인 슈뢰더씨가 지역신문 <당진시대>를 살펴보고 있다.
한국에서 온 연수단이 볼 때 매우 개혁적이고 민주적이며 진보적이라고 느끼는 에어크라트시의 지방자치는 이미 제도화된 상태이기 때문에 보수적인 인사가 시장에 당선된다고 해서 급격한 정치적 반동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그만큼 독일의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지방자치는 이미 ‘기본’이기 때문이다. 이보다 한국은 아직도 법·제도가 취약한 상태에서 단체장의 마인드에 지방자치의 거의 모든 것을 걸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실제로 지난 6월 지방선거에서 단체장이 교체된 상당수 자치단체에서는 조직체계와 인사의 급격한 변화로 지금도 많은 혼란을 겪고 있다. 또 아직 ‘기본’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선진국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민주적 지방자치의 운영도 한국에서는 급진적인 것으로 치부되기 일쑤다. 독일의 지방자치는 민주주의와 자유의 기반으로서 정치 분권화와 주민자치가 필수적인 요소이며, 이를 위해서는 제도와 시민참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에어크라트시에 이어 방문한 도시는 스위스의 루체른과 프랑스 파리였다. 스위스의 루체른은 자연과 건축물이 한몸처럼 보일 정도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도시를 둘러싼 크고 작은 산들과 초원, 호수 그리고 고전미를 살린 건축물은 방문객들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프랑스의 파리 역시 듣던 대로 도시 전체가 예술품이라고 할 만큼 조화로운 풍광을 자랑했다. 전통의 향기와 공간의 여유를 느낄 수 있는 시 곳곳의 건축물에서 효율성이나 경제성, 재개발 등의 압력과 유혹을 이겨낸 프랑스인들의 고집이 은근히 느껴지기도 했다. 두 도시 모두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자국의 전통과 문화를 지키고 발전시키려는 노력의 흔적이 엿보였다. 이러한 노력이 도시 자체를 세계적인 관광지로 발돋움시켰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연수기간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은 의문은 “왜 우리 지도자들은 관광성 외유라는 시비에 휘말리면서도 해외견학에서 보고 배운 것을 실천하지 못할까”였다. 아름다운 풍광만 눈에 들어올 뿐 그 원천이 되는 인간과 자연 중심의 기본적 이념과 철학에는 눈을 감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지 않았더라면 무분별한 개발논리에 빠져 몇푼의 돈에 후손들의 생명과 건강을 손아귀에 쥔 채 난개발과 반자치적 행동을 저지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유럽의 지방자치와 도시행정에서 느낄 수 있었던 교훈은 인간과 자연을 중심으로 민주주의와 주민자치의 기본적 이념을 제도화할 때 지방자치가 성공할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였다.

유종준/ <당진시대> 기자 jjyu@dj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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