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망과 비애
등록 : 2002-08-13 00:00 수정 :
따져보면 정치가 가뭄에 단비처럼 시원한 적이 있었습니다. 올 들어 8·8 재보선까지 민주·한나라당의 경선과 6·13 지방선거 등 모두 4차례의 정치게임이 있었습니다. 콜드게임·난투극 같은 찝찝한 기억으로 덮여 있지만, 지난 봄 민주당 국민경선은 승부다운 승부가 벌어진 경기였습니다.
관중이 빽빽이 지켜보는 가운데 선수와 심판들이 열심히 뛴 명승부였습니다. 신이 나고, 신나는 일이 생길 것 같은 축제였습니다.
낡은 정치를 바꿔보자는 개혁열망이 한꺼번에 표출됐고, 짜증나고 갑갑한 정치판이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이 보여 박수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당신들의 정치가 아니라 반부패·탈권위주의로 서민을 위한 정치를 해달라는 주문입니다.
이런 열망은 사실 언제나 잠재해 있으면서 부글부글 끓어왔습니다. 이건 민주당 경선뿐 아니라 한나라당 경선을 통해 분출될 수 있었고, 지방선거와 재보선에서 나타날 수도 있었습니다. 단지 민주당 경선이 도화선이 됐을 뿐입니다. 한나라당이 숨통을 열어주는 계기를 마련했더라면 한나라당 경선에서 그것이 표출됐을 것이요, 지방선거가 단초를 마련했더라면 거기서 표출됐을 것입니다.
확인된 것은 ‘열망의 존재’입니다. 상식이 통하는 정치를 바라는 열망입니다. 그것은 또한 어느 당의, 어느 후보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도 확인됐습니다. 남산만큼 부푼 열망은 심장 반쪽 크기의 응어리로 쪼그라들었지만 언제건 다시 폭발할 수 있습니다.
민주당은 손에 쥐어준 개혁열망을 소화하지 못해 나자빠질 지경에 있습니다. 이에 비해 한나라당은 지방선거와 재보선에서 승승장구하며 청와대와 정부 청사가 있는 광화문·과천을 빼고 거의 접수했습니다. ‘한나라당 정권의 김대중 정부’를 만들었습니다.
그렇지만 한나라당이 표출된 개혁열망과 대척점에 있다는 데 비극을 느낍니다. 뿌리깊은 반공주의와 지역주의는 못 버린다 하더라도, 덩치가 커질수록 상대방 때리기와 자기 방어에 더욱 골몰하고 있습니다. 사법권까지 위협하고, 언론의 비판에 재갈을 물리는 공작적 행위도 서슴지 않습니다.
이회창 총재는 점퍼투어를 하며 서민풍을 연출하지만 당 내부는 개혁세력이라고 자처하던 이들도 납작 엎드려 일사불란한 권위주의 정당으로 회귀하고 있습니다. 정치개혁과 민생법안 심의는 뒷전입니다.
비전과 개혁은 없고 권력을 되찾는 데 눈이 어두운, 태생적으로 권력 없이 살 수 없는 패권정당의 모습입니다. 역사로 보면 민정당의 환생 같고, 생태계에 비유하면 코브라에 달려들어 두개골을 부순다는 몽구스를 연상케 합니다.
쪽박 찬 민주당보다 기세등등한 한나라당이 사실은 더 답답하게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한겨레21 편집장 정영무
you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