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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정치인의 덕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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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8-1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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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 후보는 착각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에게 가하는 비난은 개인 이회창이 아니라 한나라당의 대통령 후보 이회창이다. 대단치 않은 개인적 도덕성으로 항변하는 것은 곤란하다.

사진/ 정태욱 l 영남대 교수·법학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우리 나라 청소년들이 가장 좋아하는 윤동주의 서시다. 순결과 고뇌가 애상을 자아낸다. 그런데 최근 이회창 후보가 그와 비슷한 얘기로 결백을 호소했다. “저는 부족한 사람이지만 평생 지금까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없이 살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서시와 같은 고뇌는 찾기 어려웠다. 오히려 “평생 법과 원칙을 말했고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왔음”을 당당하게 내세웠다. 고난의 현대사를 권부에서 지나온 사람이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아니라 ‘명예롭게 살아온 자의 자부심’을 보이는 것이다.

개인의 순결이 아니라 공적 책임

물론 정치인에게 시인의 고뇌를 요구할 수는 없다. 10대의 도덕적 감수성으로 정치인의 자격을 가늠하려 한다면 이는 유치한 일이다. 온갖 야만과 차별 그리고 고통이 가득한 이 사회에서 일신의 도덕적 안위를 앞세우는 정치인은, 막상 정치적 덕목에서는 낙제를 면하기 어렵다. 좀 과장하면, 죽거나 다친 사람들이 길에 가득 널린 것을 보고도 그 까닭을 묻지 않다가 지쳐 헐떡이며 지나가는 소를 걱정했다는 한(漢)나라 정승 병길과 같이 딱한 수준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세속의 인생이란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적인” 것이며, 너와 나의 도덕적 편차를 따지는 것은 해 앞에서 밝기를 다투는 촛불처럼 어리석은 일이다. 더욱이 가진 것 없이 맨손으로 노동하고 맨발로 뛰는 대중들로 말할 것 같으면 악착같은 심성 없이는 한가족을 제대로 건사하기 어렵다. 특히 정치는 유수한 세력들이 거대한 탐욕을 위해 경쟁하는 곳이며, 그 와중에 사회적 약자들이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든 지켜내야 하는 곳이 아닌가? 정치는 최선이나 차선을 택하는 이상적 게임이 아니며, 단지 최악을 피해야 하는 ‘한계상황’이다. 거기서 개인적 도덕에 집착하는 것은 정치인의 책임에 걸맞지 않다.

정치란, 보편적 헌정질서에 의한 규제라는 아주 얇은 경계를 걷어내면 ‘조폭’들의 영역다툼과 하등 다를 것이 없는 위험한 곳이다. 모든 헌정질서는 그러한 위험에 대한 자각의 산물이며, 정치의 근본 덕목은 ‘폭력의 순화’이다. 그리하여 민주적 헌정질서는 선거 등의 정치적 소통과정으로써 비상사태를 제도화하고, 국민의 총의에 의한 법적 강제로써 폭력적 투쟁을 대신하고자 한다. 민주헌정질서는 무상한 인생들이 모여 사는 위험사회에서 공공의 안녕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지, 시민들을 도덕적으로 계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정치인의 일차적 덕목도 개인의 순결이 아니라 공적 책임에서 구해야 할 것이다.

민주헌정질서에서 정치란 통속적 인생들이 ‘한통속’이 되어 공존하는 기술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정치의 반대는 ‘전제’이며, 정치의 악덕은 ‘배타’이다. 우리 현대의 민주헌정사는 그러한 전제에 저항하고, 공존을 추구해온 과정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물론 아직 악폐의 잔재들은 위협적이다. 김대중 정부나 민주당도 그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거대야당인 한나라당이야말로 오염된 정치사의 한가운데 있지 않은가? 아직도 매카시즘의 공포와 배타적 지역감정에 기댄 세력이 누구인가? 이회창 후보는 그러한 세력들이 내세운 명망가가 아닌가? 나는 이회창 후보가 자신의 도덕성을 강조하며 자신과 가족에 대한 비난에 분노와 증오의 감정을 내비치는 것을 보며, 정치인으로서의 책임에 대한 자각이 충분치 않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민주헌정질서를 고민하라

이회창 후보는 착각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에게 가하는 비난과 거부감은 개인 이회창이 아니라 한나라당의 대통령 후보 이회창이다. 대단치 않은 개인적 도덕성으로 항변하는 것은 곤란하다. 반대로 우리 민주헌정질서의 악폐들을 치유할 수 있다면 그 정치적 덕성은 개인적 인품에 좀 흠이 있다고 해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깨끗이 정계를 떠나겠다”는 말도 듣기에 민망하다. 대통령 후보의 직은 개인적 순결을 과시하는 자리가 아닌 것이다. 정말로 우리 민주공화국이 염려되어 십자가를 진 것이라면, 그보다 더한 어려움과 방해도 뚫고 나가야 할 것이다.

다른 대통령 후보나 정치인들도 마찬가지다. 개인적 덕목을 정치적 덕목에 앞세우지 말라. 자신의 도덕적 우월성을 내세우기에 앞서, 우리 민주헌정질서가 아직도 이렇게 비천한 것에 고뇌해야 하는가. 이 땅의 민주주의와 평화가 고비를 맞은 중차대한 시기에 도대체 무엇 때문에 대통령이 되고자 그렇게들 집요하게 노력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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