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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27년 지속되는 집총거부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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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8-0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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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 나이 쉰을 넘겼고, 어느덧 흰머리가 돼버렸다. 얼마 뒤면 내 아들 역시 자신의 신념에 따라 나와 똑같은 일에 직면할 것이다. 나는 그가 확신 있게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에 대해 결정하고 맞닥뜨리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난 27년간의 가슴 아픈 사연들을 안고서 현재와 미래를 생각할 때면 우울한 감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박춘홍(52·경기 안성군 공도면)씨는 여전히 불안해보였다. 눈동자는 여전히 젊은이처럼 맑았지만 그의 손은 자리를 찾지 못한 듯 쉴 틈 없이 움직였다. 겉표정은 평온해보였지만, 그의 내면은 안식을 찾지 못하고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여호와의 증인’ 신자였다. 그리고 종교적 신념에 따라 “조국을 위해 총을 들라”는 국가의 부름을 거부했다. 이 때문에 72년과 75년 두 차례 구속돼 각각 10개월과 1년6개월간 모두 2년2개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두 번째 수감 기간에 9개월을 독방에 갇혀 두들겨맞으며 홀로 보냈습니다. 동료 재소자들에게 성경을 읽어주고, 대화를 나눴다는 게 이유였죠.” 기억하기 싫은 어두운 과거를 떠올린 탓일까. 박씨의 이마에서 어느새 땀이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77년 출소한 뒤 이런저런 직업을 전전했지만, 박씨의 ‘불안증’은 하루하루 정도를 더해갔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때면 엄습해오는 공포에 절망해야 했다. 협심증 등 몇 가지 병명이 거론되긴 했지만 일반병원에서도 원인을 찾아내진 못했다. 그러는 사이 박씨는 점차 정상적인 사회생활에 자신이 없어졌고, 가사를 책임질 능력도 잃었다. 가장의 와병은 고스란히 가족들의 생계고로 이어졌을 터다. 그는 “가족들이 겪었을 고통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느냐”며 말끝을 흐렸다.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던 박씨는 96년 초에야 여동생의 간곡한 권유로 정신과 전문의를 찾았다. 그 뒤로 줄곧 약물치료를 해오면서 점차 안정을 되찾고 있다. 최근 박씨는 강북삼성병원에서 진단서 한장을 발부받았다. 진단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종교적인 이유로 72∼73년(1차, 10개월), 75∼77년(2차, 1년6개월) 두 차례 수감생활 중 9개월 동안의 교도소 독방생활로 인해 폐쇄공포증, 공황장애 및 광장공포증 증상 발병. 96년 2월부터 꾸준히 외래치료중으로 증상의 호전은 있으나, 이후로도 장기간의 꾸준한 치료가 필요한 상태임.”

박씨는 “종교적 신념에 따라 감옥을 택한 것을 후회해본 적은 한번도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9개월여 동안 외부로부터 철저히 차단된 채 독방생활을 하며 상처받은 그의 영혼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그는 “평화를 사랑하고 전쟁을 미워하라는 종교적 가르침에 따라 집총을 거부하는 것이 이토록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줄은 몰랐다. 반평생을 나뿐 아니라 가족까지 고통을 겪으며 살아왔는데, 누가 보상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세월은 흘러 이제 ‘여호와의 증인’ 신자가 아닌 젊은이도 정치·사상·신념 등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상황은 좀처럼 쉽게 달라지지 않는다. 젊은이들이 감옥 대신 대체복무를 선택할 권리를 차단당하고 있고, 철창 안에서 젊음을 보내는 1600여명에 이르는 ‘또 다른 박씨’에 대한 차별과 편견은 여전하다. ‘여호와의 증인’ 신자인 성우 양지운씨는 “법무부는 종교적 신념 때문에 감옥을 택한 젊은 신자들의 종교행사 참여를 ‘잘못된 신념을 굳건히 하는 행위’라며 가로막는다”고 했다.


박씨는 “편협한 국가주의를 내세우거나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더는 비윤리적이고 비인도적인 방법으로 인권을 유린해서는 안 된다. 이제는 법조문에 명시된 종교의 자유, 사상의 자유, 양심의 자유를 실천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박씨는 자신의 부당구금과 폭력에 대해 현재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내놓은 상태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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