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제연행 현장을 찾아 떠나는 평화지킴이의 전국순례’에서 만난 징용 피해자들
빛바랜 흑백사진 속의 스무살 신부는 수줍어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미소를 애써 감춘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멋쟁이 양복을 차려입은 요샛말로 ‘영화배우 뺨칠 만큼 잘생긴’ 신랑의 얼굴에도 행복감이 넘쳐나고 있었다. 1940년 10월10일, 두 사람이 한 식구가 됐음을 사진은 그렇게 증거로 남겼다. 그러나 그 행복이 그토록 짧은 것일 줄 누가 알았으랴. “딱 2년 함께 살았어. 아들이 8개월 때 끌려가셨지. 나를 참 사랑해주셨는데, 내가 복이 없었던 모양이지….”
난도질당한 내 청춘 어느덧 여든을 넘겨버린 이금주(82·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 회장) 할머니는 고이 간직해온 앨범을 들춰보이며 지난날을 회고했다. 1942년, 해군 군속으로 일본에 끌려간 남편은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일본 해군이 보낸 전사통지서에는 “43년 11월, 길버트 제도 다리와에서 사망. 충렬(忠烈)하게 전사한 데 대해 깊은 조의를 표합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흥, 충∼렬∼?” 순례단원 중 한 사람이 옆에서 말했다. 할머니는 “그래도 나는 전사통지서라도 받아서 다행”이라며 사진을 쓰다듬었다.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한 사람이 한둘이 아닌 까닭이다.
‘근로정신대’에 자원했던 김혜옥(71) 할머니는 가슴에 새겨둔 한을 토하듯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네살 때부터 유치원에 다닐 만큼 제법 집이 잘살았지. 열세살(44년) 때였어. 나주 대정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인만 다니던 여학교에 시험을 봤다가 떨어져 ‘재습’이라는 과정을 밟고 있는데, 어느 날 교장이 학생들을 모아놓고 ‘일본에 가면 돈도 벌고 여학교에도 다닐 수 있다’고 하더라고. 내가 제일 먼저 손을 들었지. 부모님은 반대하셨지만, 일본인을 상대로 장사를 하고 계셨던 데다 내가 우기니까 어쩌지 못하셨어. 부모님은 나를 전송하면서 자꾸 우셨지만 그땐 그 이유를 몰랐지. 배를 타고 가는 동안에도 학교에 갈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응께. 한달이 지나서야 속은 줄을 알었지.” 나고야의 미쓰비시중공업 소속 공장에서 비행기 부품에 ‘뺑기(페인트)칠’을 하며 1년여를 보낸 열세살 어린 소녀는 늘 배가 고팠고, ‘한토진’(반도인)이란 멸시를 받는 게 서러웠다. 가슴 부풀게 했던 여학교는 고사하고 월급 한푼 제대로 받지 못한 채 해방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소녀는 그 후유증으로 6년간 폐결핵에 시달려야 했다. 근로정신대를 ‘종군위안부’로 보는 사회인식 때문에 그 뒤 그가 겪은 또 다른 고통 중엔 차마 여기 옮기지 못할 것들도 있다. 다만 호적에 오르지 못한 결혼을 했고, 아들이 있지만 따로 살며, 친척이 없기 때문에 이런 사실을 밝힌 것이라고 덧붙여둔다. 두 할머니를 만난 것은 지난 7월29일 밤,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 이금주 회장의 집 2층의 유족회 사무실에서였다. ‘일제 강제연행 현장을 찾아 떠나는 평화지킴이의 전국순례’ 사흘째에 뒤늦게 합류한 자리였다. 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일제의 만행을 익히 들었던 터라 두 할머니의 증언이 그렇게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가슴 한구석을 차오르는 부끄러움에 나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순례단에 합류하면서까지도 이미 57년이나 지난 이야기를 다시금 끄집어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발칙한 생각이 뇌리 한구석에 남아 있었던 까닭이었다. 팔팔 살아 있는 현재를 나는 왜 아득한 과거라고 생각했던가? 부끄러움은 순례 일정이 진행될수록 더욱 커져만 갔다. 순례단은 7월27일 서울을 출발해 충남 천안, 대전, 전북 진안·전주, 광주를 돌며 태평양전쟁 피해자들의 증언을 듣고,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 제정의 취지를 설명하고 있었다. 내가 합류한 다음날인 7월30일 아침 순례단은 광주를 떠나 전남 해남으로 향했다. 징용 피해자와 유족 등 15명이 해남 화원면 노인복지회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전날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광주 간담회에 버스를 대절해 대부분 참석했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또 참석한 것은 “속시원히 들어보고 싶은 얘기가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일협정배상금 누가 먹었나
“여러 소송이 시작된 지 벌써 10년이 다 되잖았어요. 여기저기 다니느라 그동안 들인 여비가 얼마요? 회비(연 2만원)도 적잖은디. 이번엔 뭔가 되기는 되는 거요?” 그동안 아무것도 이뤄진 게 없지 않느냐는 불만이 유족들 사이에서 튀어나왔다. “요즘도 배상금을 받을 수 있게 됐으니 십수만원씩 내고 등록을 하라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떡해야 하느냐”는 질문도 나왔다. 몇푼 돈을 위해 평생을 서럽게 살아온 피해자와 유족들을 그렇게 등치려는 사람들이 여전한 모양이었다. 그런 이야기는 그 뒤 다른 지역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특별법 제정 추진위원회 최봉태 집행위원장(변호사)은 말했다. “진상규명과 사죄, 그리고 배상은 여러분이 요구해야 할 당연한 권리입니다. 일본에 끌려간 사람들이 못 받은 임금은 당연히 여러분의 부모와 여러분 것입니다. 육체적·정신적 피해에 대해서도 일본은 65년 한일협정으로 이미 다 손해배상을 했다고 하는데, 여러분이 뭐 받은 거 있습니까? 국가가 그 돈을 먹어버렸다면 이런 도둑놈들이 어디 있습니까? 특별법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먼저 진상을 규명하자는 것입니다.” 진상규명보다는 아무래도 배상문제에 더 관심을 갖게 마련인 유족들에게 최 집행위원장은 대구시 동구의 조례 제정 사례를 차분히 설명했다. 원폭 피해자들에게 진료편의를 제공하고, 적십자 기금이 기금 고갈로 그동안 이들에게 지급해온 월 10만원씩의 의료보조금을 내년부터 지급하지 못하게 되면, 구 재정에서 대신 지급하기로 하는 내용이었다. 정부 교부금을 지원받는 지방자치단체가 마음만 먹으면 비슷한 조례를 못 만들 리 없는 일이었다.
순례단은 조를 나누어 징용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당시 상황을 녹음해 기록으로 남기기로 했다. 나는 추진위 조사연구실장인 정혜경 박사와 함께 윤승옥(76) 할아버지 등 2명의 증언을 들었다. 그는 열아홉살 되던 44년, 홋카이도에 있는 광산으로 갔다고 했다. “도망다니다가 설 쇠러 집에 들렀다가 붙잡혔지. 일본 갈 배를 타러 부산으로 가는 도중 도망칠 수도 있었지만 부모 생각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어. 하루 2교대로 일했는데, 다치거나 병이 나기라도 하면 밥 양을 확 줄이니까 그냥 죽는 거고. 월급이 이백십몇원이라던데, 저축이다 뭐다 해서 떼고 나면 10원도 안 됐어. 외출해서 밖에 나가면 밥 한 상이 5원일 때였지. 돌아올 때 당꼬쓰봉(옷) 한벌 딱 줬지.” 그는 “지금도 배고팠던 게 가장 생각난다”며 “일본인들이 성욕을 억제시키는 주사를 며칠에 한번씩 놔주곤 했다”는 증언도 덧붙였다.
우리는 해남을 떠나 초저녁 완도에 도착해 또 다른 피해자와 유족들을 만났다. 순례는 일제 만행에 대한 진상규명이 얼마나 미진한지를 순식간에 절감하게 했다. 한 유족이 “아버지가 일본에 군인으로 끌려갔는데, 주로 폭격을 맞아 파괴된 지역의 복구작업을 했다”고 하자 정혜경 박사가 큰 관심을 보였다. “해방되고 나서도 오지 못하고 있다가 이듬해에 돌아오셨다면 농경대로 가셨을 가능성이 커요.” 추진위는 농경대(군인으로 징집돼 일본 현지에서 의사나 부역에 종사한 사람)에 대한 직접 증언을 거의 확보하지 못해 농경대로 다녀온 사람들을 찾는 중이었다. 안타깝게도 그 유족의 부친은 자식들에게 구체적인 증언을 남기지 않은 채 이미 고인이 된 지 오래였다. 정 박사는 “일본에서 소송을 도와주는 분들조차도 한국에서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 노력이 없다는 데 놀라곤 한다”며 “민간의 증언확보는 너무 어렵고 오래 걸리는 만큼 서둘러 국가가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배상에 앞서 진상규명을
그동안 우리 정부는 도대체 무엇을 했는가.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전쟁이 벌어지자 미국이 일본인 2만명을 미국에 억류한 데 대해 문제를 제기해 지난 85년 사죄와 배상을 받아냈다. 그러나 정작 가장 심하고 일방적인 피해를 본 한국인들은 그동안 철저히 버림받아왔다. 이런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은 누구의 탓일까? 강제숙 평화시민연대 대표는 “65년 한일협정 당시 정부가 어떻게 협상을 벌였는지조차 공개하지 않고 있다”며 “공개를 요구하는 행정소송을 8월14일쯤 낼 예정”이라고 말했다.
보상은 제쳐두고 진상규명을 하자는 것에 불과한데도 특별법 제정까지는 아직도 험난한 길이 많이 남아 있다. 특별법 제정에 찬성을 표시하지 않은 국회의원이 160명 가까이 이르기 때문이다. 7월31일, 고흥 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지역모임은 박상천 의원(민주당) 성토장으로 바뀌었다. 전남지역 국회의원 중 특별법의 조속 통과에 찬성 서명을 하지 않은 유일한 의원이기 때문이었다. 해남분회장 오분임씨라고 자신을 소개한 유족은 다른 유족들을 향해 이렇게 울부짖었다. “여기만 나오면 나는 눈물이 나요. 나는 너무 어려서 우리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불러보지도 못했어요. 세금 받아 먹고사는 국회의원들한테 우리 아버님네 배고픔과 추위에 떨며 일한 돈, 팔뚝 잘려나간 것 배상하라고 당당하게 전화해야 해요. 그렇지 않아요?” 다른 유족들은 박 의원이 다음에 출마하면 낙선운동에 발벗고 나설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8월1일, 부산으로 옮긴 순례단은 태평양전쟁 피해자 위령비가 있는 영락공원을 찾아 참배한 뒤 국회 행정자치위원회 소속 권태망 의원(한나라당·부산 연제) 사무실을 방문했다. 마침 지역구에 내려와 있던 권 의원은 법 제정의 취지에 대해 순례단의 설명을 듣고는 즉석에서 서명했다. 일찍 관심을 갖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그는 “보상문제가 광주 민주화운동 보상처럼 이뤄진다면 재정이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의견을 밝혔다. 그러나 특별법은 진상규명을 위한 것이고 그것은 나중 문제다. 진상이 먼저 규명돼야 책임 소재가 명확히 가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정작 권 의원의 눈을 동그랗게 만든 것은 군속으로 끌려갔다 폭격을 맞아 오른쪽 팔을 잃어버린 김성수(80·부산 구포) 할아버지의 사연이었다. 그는 우리나라가 해방돼서 더욱 서러운 사람이었다. 우리나라가 여전히 일본의 속국으로 남아 있다면 그는 일본 전쟁피해보호법에 의해 월 300만∼400만원가량의 생활보조금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귀국하지 않고 일본에 남아 한일협정이 체결되기 전에 일본에 귀화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 남은 것은 성하지 못한 몸과 뼈에 사무친 한뿐이었다. 그는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내보기도 했지만, 지난해 최종심에서 결국 패소했다. 한일협정에 의해 대한민국 정부가 받은 것으로 손해배상은 완결됐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 배상금은 누가 먹어버린 것인가? 배상금이 포항제철을 짓는 등 나라 발전에 쓰였다면 그 혜택을 본 사람들은 공범이 아닌가?
부산 미쓰비시중공업 재판을 지원하는 시민단체 사람들을 만난 뒤 대구와 강원도 춘천 일정을 남겨둔 순례단을 뒤로 하고 나는 먼저 서울로 향했다. 마감에 맞춰 기사를 쓰기 위해서였다. 법도 빨리 만들지 못하면서 전쟁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신세를 지면 ‘마적단’이 되는 것이라며 한사코 신세지기를 거부하던 순례단원들, 비용을 아끼기 위해 사찰과 찜질방에서 머물던 그들과의 이른 작별이 미안했다. 15인승 승합차에 10여명이 타고 찌는 여름날 7박8일 5천여리(그들이 이동하는 거리는 모두 2천여km가량이다) 장정을 나선 그들의 어깨는 이미 피곤으로 축 늘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입고 있는 조끼 등 뒤에 적혀 있는 글귀는 그들이 왜 그 길을 나섰는지 한마디로 설명하고 있었다. “피해자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이미 팔순 안팎인 일제강점 피해자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둘 세상을 등지고 있다. 국회는 그들이 모두 죽어 없어질 날을 기다려 진상규명에 나서려는 것일까?
글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부산 영락공원에 있는 태평양전쟁희생한국인위령비 앞에 선 순례단. 왼쪽에서 두번째가 정남구 기자.
난도질당한 내 청춘 어느덧 여든을 넘겨버린 이금주(82·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 회장) 할머니는 고이 간직해온 앨범을 들춰보이며 지난날을 회고했다. 1942년, 해군 군속으로 일본에 끌려간 남편은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일본 해군이 보낸 전사통지서에는 “43년 11월, 길버트 제도 다리와에서 사망. 충렬(忠烈)하게 전사한 데 대해 깊은 조의를 표합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흥, 충∼렬∼?” 순례단원 중 한 사람이 옆에서 말했다. 할머니는 “그래도 나는 전사통지서라도 받아서 다행”이라며 사진을 쓰다듬었다.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한 사람이 한둘이 아닌 까닭이다.
‘근로정신대’에 자원했던 김혜옥(71) 할머니는 가슴에 새겨둔 한을 토하듯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네살 때부터 유치원에 다닐 만큼 제법 집이 잘살았지. 열세살(44년) 때였어. 나주 대정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인만 다니던 여학교에 시험을 봤다가 떨어져 ‘재습’이라는 과정을 밟고 있는데, 어느 날 교장이 학생들을 모아놓고 ‘일본에 가면 돈도 벌고 여학교에도 다닐 수 있다’고 하더라고. 내가 제일 먼저 손을 들었지. 부모님은 반대하셨지만, 일본인을 상대로 장사를 하고 계셨던 데다 내가 우기니까 어쩌지 못하셨어. 부모님은 나를 전송하면서 자꾸 우셨지만 그땐 그 이유를 몰랐지. 배를 타고 가는 동안에도 학교에 갈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응께. 한달이 지나서야 속은 줄을 알었지.” 나고야의 미쓰비시중공업 소속 공장에서 비행기 부품에 ‘뺑기(페인트)칠’을 하며 1년여를 보낸 열세살 어린 소녀는 늘 배가 고팠고, ‘한토진’(반도인)이란 멸시를 받는 게 서러웠다. 가슴 부풀게 했던 여학교는 고사하고 월급 한푼 제대로 받지 못한 채 해방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소녀는 그 후유증으로 6년간 폐결핵에 시달려야 했다. 근로정신대를 ‘종군위안부’로 보는 사회인식 때문에 그 뒤 그가 겪은 또 다른 고통 중엔 차마 여기 옮기지 못할 것들도 있다. 다만 호적에 오르지 못한 결혼을 했고, 아들이 있지만 따로 살며, 친척이 없기 때문에 이런 사실을 밝힌 것이라고 덧붙여둔다. 두 할머니를 만난 것은 지난 7월29일 밤,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 이금주 회장의 집 2층의 유족회 사무실에서였다. ‘일제 강제연행 현장을 찾아 떠나는 평화지킴이의 전국순례’ 사흘째에 뒤늦게 합류한 자리였다. 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일제의 만행을 익히 들었던 터라 두 할머니의 증언이 그렇게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가슴 한구석을 차오르는 부끄러움에 나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순례단에 합류하면서까지도 이미 57년이나 지난 이야기를 다시금 끄집어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발칙한 생각이 뇌리 한구석에 남아 있었던 까닭이었다. 팔팔 살아 있는 현재를 나는 왜 아득한 과거라고 생각했던가? 부끄러움은 순례 일정이 진행될수록 더욱 커져만 갔다. 순례단은 7월27일 서울을 출발해 충남 천안, 대전, 전북 진안·전주, 광주를 돌며 태평양전쟁 피해자들의 증언을 듣고,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 제정의 취지를 설명하고 있었다. 내가 합류한 다음날인 7월30일 아침 순례단은 광주를 떠나 전남 해남으로 향했다. 징용 피해자와 유족 등 15명이 해남 화원면 노인복지회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전날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광주 간담회에 버스를 대절해 대부분 참석했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또 참석한 것은 “속시원히 들어보고 싶은 얘기가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일협정배상금 누가 먹었나

권태망(한나라당·부산연제구, 왼쪽에서 두번째)의원이 순례단에게 특별법 제정과 관련해 설명을 듣고 있다.

순례단과 부산 미쓰비시중공업 재판을 지원하는 시민, 노동단체 관계자들이 만난 자리에서 원폭피해 2세 김형율(무대 왼쪽)씨가 원폭피해 2세 문제를 설명하고 있다.

일본에 징용으로 갔다가 오른팔을 잃은 김성수 할아버지(맨 왼쪽)가 권태망 의원에게 법 제정에 협조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