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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땅이 숨쉬려면 갈아엎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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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8-0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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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인권운동센터 ‘진실과 조사’ 팀장,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팔을 부르르 떨다

사진/ 광주인권운동센터가 현재 가장 많은 노력을 들이는 일은 민간인 학살문제에 관한 사업이다. 최완욱씨는 현장조사를 통해 진실을 규명하고 있다. (하종강)
고속버스에서 내려 몇 걸음 걸으니 옷이 벌써 땀으로 젖어 살에 붙었다. 전국을 솜이불처럼 뒤덮은 뜨거운 날씨가 광주라고 예외일 수는 없겠으나 가슴속까지 훅 밀고들어오는 열기조차 마음 깊은 곳에서는 서늘하게 느껴질 만큼 ‘광주’는 이방인에게 예사롭지 않은 도시다. ‘아무리 뜨거워도 서늘한 광주’의 거리에서 ‘자유·평등·연대를 위한 광주인권운동센터’ 사무국장 최완욱(38)씨를 만났다. 함께 얘기를 하자고 찾아들어간 찻집의 이름이 ‘인터뷰’였는데 계단을 오르니 “인터뷰와 함께 편안한 인터뷰를…”이라고 쓰인 간판이 우리를 맞는다. 이건 완전히 운명적으로 인터뷰를 하라는 소리다.

“아빠 죽으면… 우리는 아빠 따라가자…”

“5·18정신이 인권과 평화에 있다는 믿음에 기초해 광주를 인권의 도시, 평화의 도시로 만들고자 하는 인권 지킴이들의 모임”인 광주인권운동센터가 현재 가장 많은 노력을 들이는 일은 민간인 학살문제에 관한 사업이다.


“우리 현대사에서 고문·실종·학살 행위의 불처벌(不處罰)에 관한 가장 중요한 사건이 민간인 학살이라고 할 때, 고문·실종·학살로 특징지어지는 비인도적 범죄에 대한 불처벌이라는 숙제를 풀어야 할 도시인 광주의 인권단체야말로 당연히 민간인 학살문제에 관심을 가져야죠.” 최완욱씨는 1988년 전남대 총학생회장을 지냈고, 전남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남대협) 의장을 맡기도 했다. 공개적인 학생회 조직이 학생운동의 실질적 주역으로 나서면서 전남대 전체가 학생운동의 진지 역할을 하고 있을 때여서 당시 ‘민족전대’의 총학생회장이나 ‘남대협’ 의장이 가지는 의미는 실로 막강했다. ‘막강한’ 학생운동의 경험을 단 몇줄의 말로 정리해달라는 무리한 부탁을 했다.

“총학생회장은 대중활동가라고 생각합니다. 합법적인 공간에서 대중들과 끊임없이 만나면서 일을 해나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농사꾼과 같습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지금 하는 일도 합법적인 공간에서 대중들과 만나면서 하는 일이죠. 옹기쟁이는 사람 사는 여러 가지 모양과 쓰임새를 정확히 알아서 팔릴 수 있는 그릇을 만듭니다. 그 그릇들 모두 각각 쓰임새가 있고, 집에 보면 그 그릇들이 모두 자기 있을 곳에 있어요. 수많은 대중활동가들 가운데서 ‘총학생회장’이라는 역할을 맡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쓰임새였던 것뿐이죠.”

최완욱씨는 내가 만난 총학생회장 출신 가운데서 가장 겸손한 사람이다. 과거에 자신이 대단한 경험을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최완욱씨의 ‘쓰임새론’을 본받아, 그 경험이 오히려 굴레가 되어 자신의 행동반경을 제약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볼 일이다.

광주인권운동센터는 회원들이 내는 회비로 운영된다. 회비의 액수와 납부 여부는 순전히 회원들의 자유의사여서 그 금액으로는 당연히 사무국장의 생활비가 보장되지 않는다. 최완욱씨 같은 사람들이 생활비를 어떻게 해결할까 하는 궁금증에 대한 대답은 내가 보기에 ‘80년대의 헌신성’이다. 우리 시대 많은 사람들이 80년대에 한때 각오했으나 그 뒤에는 포기해버린 삶을 그는 아직도 살고 있다. 얼마 전 그는 부인 오혜현씨가 20개월된 딸 서연이를 붙들고 하는 말을 그는 우연히 들었다. “아빠 죽으면… 우리는 아빠 따라가자. 그러면 모두 천당 갈 거야.” 최완욱씨는 “사람을 믿어준다는 것, 그것보다 고마운 일이 없지요”라고 담담하게 말하는데, 듣고 있는 내가 괜히 눈시울이 뜨겁다. 남편을 따라 죽으면 천당에 갈 수 있을 거라는 것보다 확실한 믿음이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민간인 학살을 ‘사건’으로 보지 말라

사진/ 최완욱씨는 '80년대의 헌신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가톨릭 광주대교구청 앞마당에서 병원정상화 등을 요구 중인 목포가톨릭병원노조 간부들의 농성천막을 방문했을 때 모습. (하종강)
이제 지면이 허락할 때까지 민간인 학살문제를 얘기해보자. 최완욱씨는 광주인권운동센터가 운영하는 민간인 학살문제에 관한 ‘진실과 조사’팀의 장으로서 가장 열심히 조사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최완욱씨는 먼저 사람들에게 이런 주문을 했다.

“민간인 학살을 사건으로 보지 말라는 부탁을 하고 싶어요. 1945년부터 53년에 이 땅에서 100만명 넘게 학살당했다면 당연히 사람들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어디에서 몇백명이 죽었다더라’는 식으로 언론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이쪽에서 20명 죽었다더라’ 하면 ‘에이’ 실망하고, ‘저쪽에서 500명 죽었다더라’ 하면 ‘와’ 하는 식으로 반응하고, 학살에 숨은 역사의 진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면, 이것은 한국 현대사에 대해 너무 무지한 거예요. 민간인 학살문제는 은폐된 역사의 진실을 찾는 거예요. 그래야 진정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가능합니다.”

해남의 보도연맹원들을 끌고가 학살했다는 갈명도(일명 갈매기섬)는 무인도여서 사람을 죽이고도 매장을 안 했다. 가서 보니 50년도 더 지났지만 아직도 유골들이 심하게 부식된 채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감정이 격앙되지 않았어요. 뼈를 보면 의외로 마음이 가라앉아요. 사람들이 조사갔다온 다음날은 거의 일을 하지 못합니다. 현장에 가서 사람들을 설득해 조사하고 정리하다 보면 죽음의 진실이 주는 고통이 너무 크게 느껴져요. 50년 만에 처음으로 사람들 입을 열어 진실을 이야기하게 해놓고, 그것을 방치한다는 것이 절대로 용납되지 않는 거죠. 어떻게든지 책임져야 한다… 그 막중한 책임감이 너무 무거워 사람들이 힘들어합니다.”

해방공간의 좌익 활동가 공개처형, 전쟁이 터지면서 군 단위로 진행된 보도연맹원 학살, 국군이 다시 들어오면서 부역한 사람들에게 행해진 처벌, 그 뒤에는 빨치산 토벌대에 의한 처벌과 학살…. 집단적 학살이 같은 마을에서 몇번씩이나 되풀이되는 동안 유족들은 대부분 고향을 떠났다. 60년대에 피학살자 유족단체가 만들어지고 자체 신고를 받았는데, 전국에서 114만명, 광주·전남지역에서만 21만명이 신고되었다. 그렇지만 최근 광주·전남지역에 대한 조사활동을 하면서 물어보았을 때 60년대에 그런 신고가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대부분 신고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광주·전남지역에서 학살당한 ‘21만명’은 최소한의 수다.

“증언할 사람들이 죽어가요”

“급박하게 후퇴하기 하루나 이틀전 또는 후퇴하면서 마을마다 보도연맹원들을 몇백명씩 죽였는데,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되고 계획되지 않았다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함평에서 학살된 사람들의 시체를 장성·무안·나주에서 찾으러 오고, 광산 암탉굴에서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함평·장성에서 찾아가고… 인민군이 진주하기 이틀이나 삼일 전에 이렇게 교차적으로 학살이 이뤄졌는데도 사전에 주도면밀하게 계획하고 준비한 사람이 없다? 이건 말이 안 되죠.”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도 모르게 주먹이 쥐어지고 팔이 부르르 떨려왔다. “광주·전남지역에만 자연마을이 200∼300여개가량 있고, 지금까지 대략 100여곳을 조사했어요. 한마을에 두세번은 들어가야 이야기가 제대로 나옵니다. 그러면 한달쯤 걸려요. 증언하기로 한 사람들, 모아놓은 자료를 주겠다고 약속한 사람들이 계속 죽어가고 있어요. 솔직히 이번 인터뷰도 저는 민간인 학살문제가 한번이라도 더 언론에 다뤄질 수 있다고 해서 응한 겁니다.” 그것이 내가 이 원고를 몽땅 다시 고쳐쓴 까닭이다. 최완욱씨 개인의 삶에 대해 들은 얘기가 많았고 원고 앞의 절반 정도가 그 내용이었지만, 민간인 학살문제를 얘기하느라 모두 뺄 수밖에 없었다.

“농사꾼이 농사를 지을 때 가장 처음 하는 일은 땅을 갈아엎는 겁니다. 갈아엎은 논에서 새벽에 하얀 김이 올라오는 걸 보면 ‘땅이 숨쉰다’는 느낌이 들어요. 우리 역사는 이때까지 갈아엎은 적이 없었어요. 보수적 개혁조차 제대로 성공하지 못한 굳어버린 땅이지만 민간인 학살문제로 역사의 진실이 드러나면 개혁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자기가 살았던 20, 30대의 이야기를 정말 편하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운동권이 잘 쓰는 말로 ‘민중의 정치력이 복원되는 것’입니다.” 그의 말에 덧붙일 나의 군더더기는 없다.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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