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70년대 노동운동의 살아 있는 신화, 남상헌씨가 후배들에게 들려주는 말
남상헌(66)씨는 외모부터가 벌써 (우리나라 진보적 사회운동의) ‘기둥’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남자라면 저 정도는 돼야지….” 그런 생각이 들게 하는 걸출한 외모를 갖췄다.
민족민주열사추모단체연대회의 의장, 70년대민주노동운동동지회 회장,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공동상임의장, 민주노동당 당대회 의장 및 당기위원장, 민주노총 지도위원, 전태일기념사업회 운영위원…. 현재 남상헌씨가 맡은 직책들은 어느 것 하나도 만만하지 않다. 보통사람들에게는 하나만 있어도 어깨가 내려앉을 정도로 부담스러운 일들을 몇개씩이나 맡고 산 지 벌써 오래됐다. 계속 걸려오는 전화를 대여섯통이나 받은 뒤에야 인터뷰를 시작할 수 있었는데, 팔척장신의 체격은 앉아서 기다리는 사람이 쳐다보고 있노라면 고개가 아플 정도로 훤칠하다. 얼마나 바쁘게 사는 사람인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나는 이제 어디 가서 바쁘다고 말하지 말아야지….’ 전화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리면서 마음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 파업은 기적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눈이 시퍼렇게 살아 있던’ 1960년대부터 80년대 초까지 남상헌씨는 고려피혁이라는 회사에서 노동조합 지부장을 12년 동안이나 맡았다. 이번 인터뷰에서는 그 무렵의 활동에 대해서 “나중에 자료를 참고하겠습니다”는 한 마디 말로 간단히 넘어갔는데,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발행하는 <노동사회> 2001년 12월호에 실려 있는 배지영씨의 기사에서 남상헌씨는 자신의 오랜 과거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조합간부가 되면서 뭔가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 그런데 1960년대는 어디 가서 물어볼 만한 곳도 없었거든. 답답한 마음이었지만 당시 한국노총은 회사와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라는 입장이었고…. 노동조합으로서 정당한 활동은 놔두더라도 우선은 회사로부터의 자주성이 가장 중요했거든. 자주성을 못 지키면 노조의 존재 의미도 없고, 조합원이 주인이 되어야 하는데 그게 안 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보았지. 약 12년간 지부장으로 있으면서 조합원들이 집행부를 믿어준 것은 회사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철저히 자주적이어야 하고, 조합원의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아….” 배지영씨가 정리한 당시의 상황 가운데서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노동조합 활동을 하기 쉬운 상황이 아니었다…(중략)… 고려피혁지부는 남 지부장이 당선되기 전까지 회사의 지원을 받아 노동조합을 운영해왔다…(중략)… 회사로부터 보조금을 받는 한 노동조합이 회사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남 지부장이 당선된 뒤 회사는 노조에 대한 보조금 지급을 중단했다…(중략)… 자재를 과도하게 독점하면서 회사는 두 차례의 부도를 겪었고, 1972년 대우그룹에 인수되었다. 회사가 부도나는 과정에서 2∼3개월 임금이 체불되었는데 평소의 임금으로도 생활하기 어려웠던 조합원들에게 임금체불은 버티기 힘든 상황이었다. 근로조건·생활조건 개선보다 체불임금 해결이 급선무였다. 체불임금 지급을 요구하며 전 조합원은 파업과 함께 사무실을 점거하여 2∼3일씩 몇 차례 단식농성을 하기도 했다.” 그 무렵이 얼마나 엄혹한 시기였는지 기억하는 사람들은 “전 조합원이 파업과 함께 사무실을 점거하여 2∼3일씩 몇 차례 단식농성”을 벌였다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거의 ‘기적’에 가까울 만큼 힘든 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 전태일기념사업회가 보관하고 있는 ‘민주노조 사수를 위한 고려피혁노동조합 투쟁’ 자료에 따르면 1970년 7월부터 80년 9월까지 당시로서는 거의 ‘기적’에 가까운 ‘농성’, ‘특근 거부’ 등 모두 14차례나 되는 과감한 투쟁을 벌였다. “통일을 이루는 지혜가 필요해”
80년, 그 말 많았던 ‘정화조치’의 일환으로 남상헌씨는 결국 회사를 떠났다.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2개월 동안 몸무게가 11kg이나 빠졌다. 주변 동료들이 남상헌씨를 보고 “분명히 암에 걸렸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다. “잠깐 보자”고 불러내더니 아무 말도 없이 약보따리를 가슴에 안겨준 친구를 남상헌씨는 영원히 잊지 못한다.
해고된 뒤에는 우리나라 수많은 공개 노동운동단체의 시발점이 된 ‘노동자복지협의회’의 부회장을 시작으로, 전노협 상근지도위원(이 직함은 그가 전노협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는 것을 뜻한다), 해고노동자복직투쟁위원회 위원장으로 쉼없이 활동했다. 회의를 할 때마다 장소를 서너 군데쯤 마련하여 경찰과 숨바꼭질을 하며 계속 옮겨다니면서 만나야 했던 시절이다. 그 무렵에는 항상 체격이 건장한 사람들부터 출입구 쪽에 앉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적’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한명의 동지라도 더 빠져나가야 했으니까….
“그동안 생계는 어떻게 유지하셨어요?”라는 물음에는 역시 예상되는 답을 했다. “새우젓 장사, 마늘 장사도 해봤지만… 사실은, 아내가 작은 양장점을 계속 운영한 것이 큰힘이 됐지. 나한테 시집오면서 ‘다시는 가위를 잡지 않겠다’고 결심한 사람이었는데, 몇달 만에 다시 잡을 수밖에 없었지. 내가 좀 무책임했다고나 할까….” 그 면에 대해서는 크게 다를 바 없던 나로서도 더 이상 자세히 물어볼 수가 없었다.
수십년간 사회운동의 현장을 지켜온 선배로서 요즘 후배들의 활동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걸음이 좀 늦을지 모르지만 우리 사회가 발전한다는 것은 분명해. 전체 노동자들이 ‘노동자가 주인’이라는 그런 확신과 희망을 가져야지. 70년대보다 노동운동의 논리는 ‘상당히 무성하다’고 표현할 수 있을 만큼 발전했는데… 사용자를 상대로 활동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통일성을 이루는 지혜가 아닌가 싶어. 마치 용광로에 용해되듯이 기본적인 목표를 이루는 데는 통일을 기해야 하고, 그렇게 합의한 것에 대해서는 책임감을 가지고 실천해야지. 노동조합을 조여오는 외형적인 상황이 힘들어지는 시기일수록 노동자들에게는 통일을 이루는 지혜가 필요해.”
“고생하지 않고 노동자가 안 됐다면…”
남은 생애 동안 꼭 이뤄보고 싶은 소원을 물어보았다. “노동자들의 연수원이나 교육원에서 후배들을 뒷바라지하는 일을 하면 좋겠어. 어떤 책임을 맡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 이를테면 ‘수위’를 한다든가….” 대답을 듣는 내 가슴이 조여왔다. “정문 수위라도 하면서 후배들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다가 죽고 싶다”라는 것이 바로 평소 나의 소원이었기 때문이다.
짧은 만남의 마지막을 남상헌 ‘선배’는 이렇게 정리했다. “큰 집에 살고 큰 차를 타면서 꽤 행세하는 친구들을 가끔 만날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어. 만일 내가 고생하지 않고 자라서 노동자가 되지 않았다면, 철저하게 ‘노동자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 과연 가능했을까? 불가능하지 않았겠는가…. 내가 노동자로 살지 않았다면 세상의 이치를 올바르게 깨닫는 것이 가능했을까? 힘들었지만 이렇게 노동자로 살아온 것이 참 자랑스럽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나 역시 반노동자적인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을 거야. 참 다행스러워.”
이야기를 마치고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실을 나설 때에는 제법 굵은 비가 쏟아졌다. “동대문상가에 가서 찍찍이(벨크로)를 좀 사야겠다”는 내 말에 남상헌씨는 우산을 받고 선 채 한동안 길을 자세히 가르쳐주었다. ‘더도 덜도 말고, 남상헌님만큼만 살면 좋겠다… 나도 저 나이쯤 되었을 때, 저런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비 내리는 거리에서 그런 생각에 잠겨 한참을 걸었다.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사진/ (박승화 기자)
박정희 전 대통령의 ‘눈이 시퍼렇게 살아 있던’ 1960년대부터 80년대 초까지 남상헌씨는 고려피혁이라는 회사에서 노동조합 지부장을 12년 동안이나 맡았다. 이번 인터뷰에서는 그 무렵의 활동에 대해서 “나중에 자료를 참고하겠습니다”는 한 마디 말로 간단히 넘어갔는데,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발행하는 <노동사회> 2001년 12월호에 실려 있는 배지영씨의 기사에서 남상헌씨는 자신의 오랜 과거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조합간부가 되면서 뭔가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 그런데 1960년대는 어디 가서 물어볼 만한 곳도 없었거든. 답답한 마음이었지만 당시 한국노총은 회사와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라는 입장이었고…. 노동조합으로서 정당한 활동은 놔두더라도 우선은 회사로부터의 자주성이 가장 중요했거든. 자주성을 못 지키면 노조의 존재 의미도 없고, 조합원이 주인이 되어야 하는데 그게 안 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보았지. 약 12년간 지부장으로 있으면서 조합원들이 집행부를 믿어준 것은 회사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철저히 자주적이어야 하고, 조합원의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아….” 배지영씨가 정리한 당시의 상황 가운데서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노동조합 활동을 하기 쉬운 상황이 아니었다…(중략)… 고려피혁지부는 남 지부장이 당선되기 전까지 회사의 지원을 받아 노동조합을 운영해왔다…(중략)… 회사로부터 보조금을 받는 한 노동조합이 회사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남 지부장이 당선된 뒤 회사는 노조에 대한 보조금 지급을 중단했다…(중략)… 자재를 과도하게 독점하면서 회사는 두 차례의 부도를 겪었고, 1972년 대우그룹에 인수되었다. 회사가 부도나는 과정에서 2∼3개월 임금이 체불되었는데 평소의 임금으로도 생활하기 어려웠던 조합원들에게 임금체불은 버티기 힘든 상황이었다. 근로조건·생활조건 개선보다 체불임금 해결이 급선무였다. 체불임금 지급을 요구하며 전 조합원은 파업과 함께 사무실을 점거하여 2∼3일씩 몇 차례 단식농성을 하기도 했다.” 그 무렵이 얼마나 엄혹한 시기였는지 기억하는 사람들은 “전 조합원이 파업과 함께 사무실을 점거하여 2∼3일씩 몇 차례 단식농성”을 벌였다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거의 ‘기적’에 가까울 만큼 힘든 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 전태일기념사업회가 보관하고 있는 ‘민주노조 사수를 위한 고려피혁노동조합 투쟁’ 자료에 따르면 1970년 7월부터 80년 9월까지 당시로서는 거의 ‘기적’에 가까운 ‘농성’, ‘특근 거부’ 등 모두 14차례나 되는 과감한 투쟁을 벌였다. “통일을 이루는 지혜가 필요해”

사진/ 남상헌씨는 노동자들의 연수원이나 교육원에서 '수위'라도 하면서 후배들을 뒷바라지하고픈 꿈을 꾸고 있다. (박승화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