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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여가’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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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7-2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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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가는 단순히 일의 강제성에서 벗어난 시간이 아니라, 더 창조적인 삶을 위한 자기 계발의 시간이기도 하다. 독서를 ‘하고 싶은 여가활동’의 목록에서 되살려내자.

사진/ 설혜심 ㅣ 연세대 강사·서양사
한국이 월드컵에서 사상 첫 승을 거둔 지난 6월4일 종로서적이 부도가 났다. 지금 한국 사회의 중추를 이루는 세대들에게 책방 이상의 의미가 있던 종로서적은 월드컵 기사로 뒤덮인 신문의 한쪽 구석에서 초라하게 그 종말을 고했다. 주 5일 근무제에 따른 ‘긴 주말의 시대’를 맞아 응원열기의 폭발과 책방의 폐업은 여가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대조적인 두 단면을 보여준다.

소비 위주로 편성된 여가활동

서양에서 여가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여가의 본뜻이 ‘문화’에 가까운 것이었다. 여가는 인간의 본질 가운데 하나로, 예술과 학문, 나아가 철학적 성찰을 아우르는 말이었다. 그러나 ‘일’과 ‘여가’를 분명하게 구분하기 시작하는 산업화 시대를 맞아 ‘여가’는 종종 ‘일’보다 가치가 뒤떨어지는 것, 또는 생산을 지속하기 위해 필요악으로 주어져야 하는 것으로 여겼다. 고장을 피하기 위해서는 기계도 가끔 쉬게 해주어야 한다는 논리로 여가를 노동자의 생산성을 유지하기 위한 안전장치로 여겼다.


서구의 산업화에 급속하게 휩쓸려온 우리 사회에서 여가는 어떤 모습으로 비쳤는가. 지극히 일 중심적인 사회를 지향해오는 동안 여가는 종종 생산이 아닌 철저히 ‘노는 것’ 또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는 것’으로 인식되곤 하였다.

“시간이 나면 뭐하고 지내나?”는 한 설문조사에서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집에서 조용히 쉬거나 텔레비전을 시청한다고 답했다. 그들이 경험한 여가활동은 노래부르기, 비디오와 영화 감상, 그리고 독서의 순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앞으로 하고 싶은 여가활동으로 수영, 영화 감상, 해외 여행, 등산, PC통신과 인터넷, 노래부르기를 꼽았다. 그들이 ‘경험한’ 여가활동인 독서가 앞으로 ‘하고 싶은’ 여가활동의 목록에서는 빠진 것이다.

교육적 차원에서 독서의 중요성은 차치하고라도, 독서는 가장 오랜 여가 활동의 하나다. 그런데 설문조사 결과는 지금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여가가 독서와 같은 정신적 여가활동보다는 육체적인 것, 감각적인 것, 나아가 좀더 여흥에 가까운 것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최근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여가 관련연구는 주로 스포츠·여행·놀이동산·외식산업에 집중되어 있다. 이런 움직임은 바람직한 여가를 위한 사회적 인프라가 지나치게 ‘놀이’와 ‘소비’ 위주로 편성되어 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낳는다.

소비문화의 확산 속에서 여가활동 자체는 사회적 ‘구별짓기’의 중요한 척도가 되기도 한다. 곧 얼마나 많은 돈이 드는 레저활동을 하는가, 또는 얼마나 멀리 여행을 다녀왔는가가 한 개인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여가활동이 구매력과 소비패턴에 휘둘리고, 한 개인에게 여가는 값진 경험이기보다는 정체성 확보를 위한 경쟁적인 것이 되어, 매달리고 추종해야만 하는 또 다른 굴레가 된다.

유소년과 노인의 여가는?

또한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생산인력의 여가만을 이야기한다는 느낌도 든다. 유소년과 노인처럼 일단 생산활동에서 제외된 사람들의 여가는 진지하게 조명되지 못하는 것이다. 노령화 사회로 나아가는 지금, 특히 노인의 여가는 여가로 취급되기보다는 종종 ‘은퇴 뒤의 시간을 어떻게 때우느냐’의 문제로 치부되곤 한다. 이런 현상은 분명 ‘여가’가 ‘일’의 상대개념으로서만 이야기되기 때문이고, 사회의 문제의식이 생산과 여가의 짧은 순환고리에 묶여 장기적 안목을 갖추지 못한 탓이다. 여가는 긴 노령기를 포괄할 수 있도록 그 자체가 올바른 습관과 훈련, 사회적 보조가 필요한 것인데 말이다.

여가는 생산을 지속하기 위한 필요악적인 재충전만은 아니다. 이 말은 여가가 필수적인 것들을 수행한 뒤 남는 시간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여가는 자체가 본성이고, 삶의 일부다. 여가는 단순히 일의 강제성에서 벗어난 시간이 아니라, 더 창조적인 삶을 위한 자기 계발의 시간이기도 하다. 때문에 여가는 육체적인 것, 감각적인 것뿐 아니라 정신적인 성찰의 시간이기도 하다. 친구들과 책 한권을 돌려 읽으며 여백에 짧은 독후감을 적은 기억이 날 것이다. 세월이 흐른 뒤 그 책들을 펼쳐보면 그 시절 삶의 궤적과 꿈꾸던 미래가 보인다. 독서를 둘러싼 추억은 호화로운 여행지에서 찍은 한장의 사진보다 더 많은 것을 담아내곤 한다. 독서를 ‘하고 싶은 여가활동’의 목록에서 되살려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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