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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하루하루가 투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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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09-2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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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천씨 인터뷰

참 대책없는 사람 같았다. 아웃팅을 당하고도 여전한 그의 솔직함에 가끔씩 움찔할 지경이었다. 어쩌자고 묻는 대로 대답해 그렇게 낭패를 보고도 여전히 묻는 대로 답하는지. 조금 영악해질 만도 하건만 그는 숨기는 걸 몰랐다. ‘솔직함’은 그의 체질인 듯했다.

-기사가 나간 뒤 생활은.

=(깊은 숨을 들이 마신 뒤) 하루하루가 투쟁이다. 나와의 투쟁이고, 모든 것과의 투쟁이다. 투사가 될 생각은 없었는데 어느덧 그렇게 돼버린 것 같다.

-동성애자라고 인정한 이유는.

=나니까. 거짓말할 수 없으니까. 그리고 잘못한 거 없으니까. 단지 그것뿐이고 또 그게 전부다. 얘기함으로써 얻는 불이익이 너무 많다는 걸 나도 뻔히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또 누군가 “남들 다 안 하는데 왜 굳이 나서느냐?”고 물으면 반박할 말도 많지 않다. 이게 난데… 다른 누구도 아니고…. 그 말밖에 더 없다.


그가 커밍아웃한 이유는 쉽게 ‘언어화’되지 않았다. 그 갑갑증은 ‘나니까’라는 옅은 탄식이 되어 흘러나왔다.

-언제부터 커밍아웃을 생각했나.

=딱히 언제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언젠가부터 꼭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있었다.

-왜 하필 지금인가.

=너무 이르지 않느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지금 아니면 못할 것 같았다. 하나님이 주신 때가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사회에 더 물들거나 좀더 입지가 굳어지면 도저히 못할 것 같았다.

-좀더 철저히 준비된 커밍아웃을 할 수도 있지 않았나.

=이것저것 생각하다보면 도저히 커밍아웃이 불가능하다. 뒤에 닥쳐올 일들 떠올리고, 파장을 염려하고…. 만약 주변사람과 의논한다면 그러라고 하겠는가? 아직 이 나라에서 치밀하게 계산된 커밍아웃을 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인 듯싶다. 최소한 연예인에게는.

-후회는 안 하나.

=지금은 잘 모르겠다. 사실 조금 두렵긴 하다. 전례가 없고,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나 혼자만의 문제면 괜찮지만 가족들이 힘들어하는 게 가장 마음 아프다. 사회가 워낙 견고한 벽을 치고 있으니까 구멍 하나 내는 것도 이렇게 힘든가보다.

사회의 벽과 부모님의 고통을 얘기할 때 언뜻 그의 눈가에 물기가 스쳤다. 커밍아웃을 가장 심하게 반대한 사람은 물론 그의 부모이다. 하지만 그는 역설적이게도 부모님의 가르침대로 살다보니 커밍아웃을 하게 됐단다. ‘비겁하지 않고 스스로에게 떳떳하게.’ 그가 기억하는 부모님의 가르침이다.

-한국은 동성애공포증이 쉽게 드러나지 않는 사회다. 혹시 당신이 그 첫 번째 피해자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사실 굉장히 걱정되는 부분이다. 길거리라도 마음대로 지나다닐 수 있을까 걱정된다.

-사람들이 시선이 부담스럽지 않나.

=그렇다. 벌써부터 느낀다. 오늘 방송기사 한 사람이 날 부르더니 정색을 하며 “진짜야? 아니지?”라고 묻더라. “네? 뭘 알고 싶으신데요?”라고 되물었더니 “그게 진짜라는 거야?”라며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더라. 그 방송기사는 오늘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의 눈초리나 언론의 관심에 대해.

=이건 내가 누구한테 “당신 잠자리 어떻게 하십니까?”라고 물어보지 않는 것과 같은 문제다. 정말 지극히 개인적인 얘기인데 왜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지 모르겠다.

-당신은 공인이고, 공인의 사생활이니 보도가 문제될 것 없다는 시각도 있다.

=그건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지니는 무게감을 몰라서 하는 소리다. 만약 연예인 누가 누구랑 사귄다는 얘기가 있다고 치자. 과연 불륜이 아닌 이상, 그것 때문에 캐스팅에서 제외되는가. 사람들이 제대로 그 기사를 믿기나 하는가. 근데 난 나쁜 짓도 안 했는데 불이익이 속속 돌아오고 있다. 후….

-허락없이 기사를 내보낸 그 언론에 대해.

=신문 좀 팔아보겠다는 건데 유치하다.

-마지막으로, 바라는 바는.

=일단 대중이 있는 그대로 내 모습을 받아주면 좋겠다. 커밍아웃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똑같다. 달라진 건 없다. 물론 앞으로도 기본적으로는 같을 테고.

대책없는 솔직함 탓에 낭패를 보긴 했지만 그는 스스로를 “언제나 즐겁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며 애써 웃었다. 피곤에 절은 얼굴에 스미는 미소가 오히려 더 애처로워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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