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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월드컵에서 재보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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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7-0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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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신하고 자질 있는 인재’에 대한 언급에 기대를 걸고 공천 신청자 명단을 들여다본다. 구태의연한 이름들 속에 ‘참신하고 자질 있는’ 여성들이 서너곳 들어가 있을 뿐이다.

사진/ 최보은 ㅣ 영화월간지 <프리미어> 편집장. (이정용 기자)

1.TV는 눈과 귀가 아니다

이탈리아전이 끝난 뒤, 회사 창문을 뚫고 날아든 함성에 이끌려 강남역으로 뛰쳐나갔다. 기차놀이를 수십번 했고, 수백수천쌍의 손바닥에 내 손바닥을 맞부딪쳤다. 거리를 메운 붉은 티셔츠 물결은 TV 화면을 통해 보고 또 봤다. 그런데 TV로 보는 붉은악마는 그날 강남역 네거리에서 경험한 붉은악마와 달라보였다. 오감으로 느낀 축제행렬의 자유와 해방감, 두 귀로 직접 들은, 소리의 헹가래 위로 육신을 들어올리던 초현실적인 함성은 카메라와 마이크를 통과한 뒤 ‘비슷해보이는, 그러나 전혀 다른’ 2차원의 그림과 소리가 되어 있었다. TV는 결국 진짜와 비슷한 가짜그림과 가짜소리들을 전달하는 전자제품일 뿐이었다. 20여인치 화면 안에 갇힌 축소판 세상에 눈과 귀가 너무 길들여지다 보니, 가끔 TV가 결코 인간의 눈과 귀 자체는 될 수 없다는 엄연한 현실을 망각하고, 그러다 보니 이런 괴리 앞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왜 그럴까?’ 잠시 황망스러워지는 것이다.

2.‘누락’보다 ‘왜곡’이 낫다?

거기 비하면, 이번 서해교전을 둘러싼 언론들의 시각 차이는, 월드컵에 대한 각국의 보도태도만큼이나 선명해서 차라리 ‘안전’하게 여겨질 지경이다. 어쨌든 중요한 문제라는 사실은 알려주고, 매체의 말이라고 섣불리 믿기보다는 진위를 끝까지 따져서 가려야 한다는 경각심은 일깨워주니까 말이다. 평상시의 매체에서 사실과 진실, 현실과 가상현실, 뻥튀기와 축소, 조작과 누락을 두 눈 부릅뜨고 가려내기란 잘 알다시피 쉽지 않다. 여성문제는 주요 의제로 설정이 되지 않는, 대다수 남성 언론인들이 문제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미필적으로 의제에서 누락·축소되는 대표적 사안 중 하나다. 30년 새 출산율이 3분의 1로 떨어지고, 이혼율이 7배나 증가했다는 통계가 나오기까지는, 여성들이 출산과 결혼을 부담스러워할 수밖에 없는 사회여건에 무관심한 언론도 한몫했지 싶다.


월드컵 기간에 몇몇 매체로부터 “여성들이 거리에 쏟아져나온 이유”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 여성이라서가 아니라 한국인으로서 나온 게 아니겠느냐, 여자건 남자건 거리에 나온 사람 중 평소 축구팬이 얼마나 되겠느냐고 했더니 “혹시 남성들이 미인대회에 대해 그런 것처럼, 축구선수들의 근육과 남성미에 대해 여성들이 매혹을 느끼기 때문이 아닌지?”라는 구체적인 물음이 돌아왔다. 물론 나는 전문가가 아니므로 입을 다물었다. 여성 당선자 비율이 4415명 중 142명으로 3.2%에 지나지 않은 이번 6·13 지자체 선거의 결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왔더라면 할말이 많았을 것이다.

지난 7월1일, 외무고시 합격자의 45.7%가 여성이라는 보도가 단신으로 취급되었다. 98년 16.7%이던 여성 합격자의 비율이 해마다 늘어 올해 과반수에 육박하는 합격자를 낸 것이다. 124개 재외공관을 통틀어 여성 공관장이 단 한명도 없는, 정부 수립 이래 여성 대사로는 이인호 전 러시아 대사가 유일무이한 현실에서, 그 배경이나 의미에 대한 한줄의 보충 설명도 없는 기사가 몹시 아쉬웠다. 외교통상부 한 간부에게 “여성들에게 유리한 특별한 선발기준이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여자들이 똑똑해서”라는 답이 돌아왔다. 외교관 업무가 여성들이 오히려 더 잘 할 수 있는 일일 뿐만 아니라, 어학에 여성들이 재질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전엔?” 하고 묻자, “그땐 관직의 성차별 현실을 감안해 아예 응시를 포기했던 것 아니겠느냐”고 했다.

3.히딩크 철학과 재보선

8월8일 13곳에서 재보궐선거가 실시된다. 국회의원 선거를 필기시험으로 치른다면 굳이 여성 할당제를 얘기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싶다. ‘미니총선’을 앞두고 각당에서 ‘거물급’ 또는 ‘대어급’ 인사를 영입하기 위해 애쓴다는 보도다. 어딘가 마음에 걸려서 ‘거물급 여성’ 또는 ‘대어급 여성’이라고 소리내어 말해본다. 귀에 설다. 좀처럼 같이 묶이지 않는 단어짝인 탓이다. 카메라가 자주 비추어야 영웅도 되고 거물도 되고 대어도 된다는데, 카메라에 자주 얼굴을 내밀려면 주요 당직을 맡거나 권력 실세이거나 ‘싸우는 모습’을 연출해야 한다는데, 세 가지 다 여성 정치인들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일이라고 한다.

그래도 ‘참신하고 자질 있는 인재’에 대한 언급에 기대를 걸고 보도된 공천 신청자 명단을 들여다본다. 구태의연한 이름들 속에 ‘참신하고 자질 있는’ 여성들의 이름이 서너곳 들어가 있을 뿐이다. 나라 전체가 학연 등의 연고주의를 배제하는 히딩크 전략을 배우자고 한목소리를 내는 이때, 정계는 여전히 과거의 기준으로 이 이름 저 이름 재면서 사서 ‘인물난’을 겪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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