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뜻 보면 의대 정원 확대, ‘지역 완결형 필수의료 체계’를 구축해 의료 공백을 막겠다는 윤석열 정부의 의지는 전임 정부와 같은 듯하다. 그러나 정 전 원장은 “‘공공’이란 단어를 아예 찾아볼 수 없다. 공공병원 등 공공의료 부문의 기본적 확충 없이 어떻게 대안으로서 가능하겠나”라고 반문했다. 그는 “‘의료시장의 메커니즘’ 자체가 붕괴하는 상황에서 민간과 시장을 활용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한겨레21>은 2022년 초 임기를 마치고
정기현 전 국립중앙의료원장을 2023년 11월2일 만났다.
“소아과는 암진료처럼 멀리 가서 특별하게 보는 진료과목이라기보다 지역과 밀착해서 보는 과다. 그런 측면에서 인프라가 잘 작동해야 한다. 요새 자주 회자하는 ‘소아과 오픈런’은 산업구조나 생활양식의 변화 등 여러 복합적 상황이 작용한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는 의사와 병원이 충분하다면 아침 일찍부터 소아와 보호자가 병원 앞에서 줄 서는 현장은 줄어들 것이다. 또 소아의 경우 정상진료 시간 외에 소아를 봐줄 수 있는 의료기관이 없다. 결국 밤에 아이가 열이 나면 불안한 마음에 응급실로 찾아가는데, 우리 지역에 있는 권역응급의료센터는 야간에 소아 응급진료가 어렵다. 중증 또는 중등도 환자들은 멀리 광주까지 전원을 가게 되고 경증 소아가 응급실을 찾으면, 병원 입장에선 다른 응급환자를 보는 데 여러 지장이 생길 수도 있다.
소아 이전에 고위험 임산부의 의료 이용에도 문제가 있다. 연령대가 높은 임신부 등 고위험 산모의 경우 미숙아나 저체중 아이, 질환이 있는 아이를 출산하기도 한다. 신생아중환자실(NICU)에서 집중치료가 필요한 아이들이다. 이 신생아중환자실이 전남·광주 지역에 대학병원 두 곳, 종합병원·병원 각각 한 곳 등 총 네 곳이 있었다. 광주의 두 병원은 현재 신생아중환자실 운영이 어렵고, 대학병원에서도 신생아중환자실 병상 수를 줄이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광주의 대학병원을 빼면 전남 지역에서 신생아중환자실은 전남 동부권에 한 곳밖에 없다. 간혹 순천 지역에 아무 연고가 없는 임산부가 온다. 산모의 안전과 태어날 신생아에 대한 염려 때문에 여기까지 오는 것이다.”
“응급의료체계가 그런 것이다. 응급의학과 의사가 기준에 맞게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수술이나 다른 치료를 하려면 응급실 의료자원만으로는 부족하다. 응급 환자의 상태에 따른 적절한 치료가 가능한 배후진료 역량이 병원에 있어야 하는데, 사실 지역에서 한 의료 기관이 배후 진료의 완결성을 갖기 힘들다. 대학병원이 아닌 권역센터의 경우 중증필수의료를 담당할 인력을 확보하는 일 자체가 어렵다. 그러다보면 권역응급의료센터가 응급실 기준을 어떻게든 맞춘다고 하더라도, 실제 환자를 받으면 다른 병원으로 이송시키는 데 급급할 수밖에 없다.”
면적이 1만2360㎢에 이르는 전남 지역을 의료 권역별로 나누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크게는 서부, 중부, 동부로 나뉜다.(
그림 참조) 서부는 목포시를 중심으로 무안·신안·영암·완도·진도·해남군까지, 동부는 순천·고흥·광양·구례까지 묶인다. 서부와 동부권은 도서 지역을 포함한 취약지역 인구 비중이 높다. 전남 중부권(강진·곡성·나주·담양·보성·영광 등)은 대학병원이 있는 광주광역시로의 접근이 상대적으로 쉽다. 3차 의료기관이 없는 서부와 동부권은 의료 취약성이 수치로도 드러난다. 2021년 기준 중증 응급환자의 타 지역 유출률을 살펴보면, 광주(15.6%)와 비교해 전남 서부 33.8%, 전남 동부 34.8%로 격차를 나타냈다. 전국 수치(21.7%)와 비교해도 높다.
‘인구 몇십만 명당 권역응급의료센터’로 해결되겠나
—지금 상황으로는 한국 의료체계가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보나. “그렇다. 지역의료를 보면 이미 많이 허물어졌다. 지역의료 붕괴는 이미 시작했고, 앞으로 가속이 붙을 수 있다. 지역은 빠른 속도로 고령화하면서 인구가 줄어든다. 이른바 ‘의료시장 메커니즘’이 붕괴하는 상황이다. 우리나라는 공공병원이 거의 없기 때문에 민간병원이 도산하거나, 기능을 축소하거나, 인력·시설 기준에 맞지 않게 비정상적으로 운영하면 지역의 의료 수요를 충족할 수 없다. 그러면 삶의 기반이 와해된다. 주거·소득·고용·교육 등 지역 소멸과 관련한 문제가 여럿 있는데, 당장 건강과 돌봄이 가장 피부에 와닿는 문제다. 지역민이 역외로 나가는 과정에서 의료비 부담이 여러 형태로 가중되고, 지역 의료기관은 환자가 계속 지역 밖으로 빠져나가니 경영난을 겪는다. 악순환의 고리에 빠지는 것이다. 이렇게 의료시장이 붕괴하면 의료기관은 의료기관대로, 환자는 환자대로 각자도생하게 된다. 지역마다 환자는 알아서 서울에 있는 병원에 가고, 지역 병원들은 고사하게 된다. 어떤 면에선 비정상적으로 운영되는 요양원·요양병원 문제가 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의료시장이 붕괴하면 민간과 시장을 활용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나는 안 될 것 같다고 본다. 수익이 안 나는 구조에선 민간이 들어갈 수 없다. 시장 메커니즘에 미련을 두고 수가를 더 주거나 하는 정책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현재 민간 의료기관에서도 협력이 안 일어나는 이유는 각 의료기관이 병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지나친 경쟁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정부와 국가의 개입이 불가피하므로 상당수 지역은 (지방자치단체가) 공공병원을 운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올 것이다.”
—윤석열 정부의 의료정책도 ‘지역 완결형 필수의료’를 지향하지 않나. 이전 정부와 뭐가 다른가.“‘지역 완결’이라는 같은 단어를 썼지만 목표나 세부 내용은 다르다. 윤석열 정부의 의료정책에서는 ‘공공’이란 단어를 아예 찾아볼 수 없다. 공공병원 등 공공의료 부문의 기본적인 확충 없이 어떻게 대안으로서 가능하겠나. 정부는 국립대 병원을 중심으로 권역이라는 큰 틀에서 지역의료 안전망을 만들어 해결하겠다고 한다. 거기에 함정이 있다고 본다. 말은 ‘지역 완결’인데 권역 이야기만 한다. 지역에 다리 역할을 할 수 있는 중소병원들의 역할은 없고, 지자체 참여를 보장하려는 노력도 안 보인다.
결국 효율성 논리에 기초한 것이다. 지역 인구가 감소하는 상황에서 ‘인구 몇만 명당 지역응급의료기관을 둔다’ ‘인구 몇십만 명당 권역응급의료센터를 둔다’는 식으로 해서 해결되겠나. 비수도권은 지역 간 이동이 쉽지 않다. 실제 그 지역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보고, 그 지역의 특성과 진료권을 보면서 (병원을) 넣어줘야 할 곳은 넣어줘야 한다. 그렇기에 지자체의 역할이 중요하다. 지역주민의 권리라는 차원에서 지자체가 주민의 목소리를 잘 전달해야 한다. 주민의 요구와는 무관한, 중앙정부의 효율성 논리에 기초해서 인위적으로 조정하려고만 한다면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정기현 전 국립중앙의료원장이 2021년 12월 서울 중구 을지로 국립중앙의료원에서 〈한겨레〉와 인터뷰 도중 코로나19 확진자 상태 분류와 의료체계 운영 방식을 설명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지방에 공공병원을 더 짓고, 의대 정원을 늘려 공공의대를 만들자는 것인가.“공공병원은 무너져가는 비수도권 지역의 의료 상황 때문에 일정량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시장 메커니즘이 붕괴하고 있기에 시장만 갖고서는 안 된다. 하지만 단순히 ‘공공병원을 더 지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예, 아니요’로 답하자는 것이 아니다. 공공병원만 짓자는 게 아니라 가능한 민간병원을 공익형으로 바꾸는 등 여러 모델이 있을 수 있다.
뭘 하든 간에 일단 최소한 ‘일정량’이 필요하다는 합의부터 해야 한다. 다른 나라의 경우와 급속한 인구구조 변화 등 미래 예측을 통해 의사가 인구 대비당 얼마나 있어야 하는지, 공공의료 비중이 전체 의료기관에서 최소한 얼마나 있어야 하는지, 어떤 역할과 기능을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합의가 있어야 그 속에서 출발할 수 있다. 의대 정원 증원도 ‘찬성이냐 반대냐?’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말하겠나.
다만 기본적인 양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정원 자체를 늘리는 것은 찬성한다. 그의대 정원 증원은 지역의료 붕괴를 막고 의료 공공성을 강화하려는 하나의 수단일 수는 있다. 이건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다.
아울러 같이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다. 부실한 의료서비스 제공, 지역 격차 심화라는 문제의 원인 중 일부는 의과대학 교육과 인력 양성의 질에 있다. 굳이 말하자면 (의대 교육은) 의학의 기술적 측면 필요에 집중돼 있다. 상급종합병원·대형병원 중심의 실습, 지역사회 등 인구 단위의 건강 문제에 대한 교육 결핍, 향후 기대수익에 집중된 수련 과목 선택 등의 문제가 있다. 이 때문에 국가적 필요에 맞는 정책 연구를 할 수 있는 전문가 양성이 부실할 수밖에 없었다. 전문가적 소양 및 인문·윤리학적 가치 함양 교육 결여 등이 더 진지하게 논의됐으면 한다. 따라서 양질의 교육 과정, 수준 높은 경력을 개발할 수 있는 다양한 경로 운영이 중요하다. 의대 교육을 넘어 보건의료인력 처우 개선·역량 강화·비전 제시가 함께 기획돼야 한다고 본다.
그렇다고 ‘난마같이 얽힌 다른 문제들도 해결해야 의대 정원을 늘릴 수 있다’면, 그러면 다른 문제들을 같이 논의하고 해결할 때까지 언제까지 기다릴 건가. 지금 20~30년 동안 그렇게 하자면서 논의를 안 했다. 순차적으로 정책을 집행하면서 보완책을 찾아가야 한다고 본다. 의료계가 ‘새판 짜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의료계가 모든 문제를 다 끌어안고 반대만 한다면 모순에 봉착하면서 해결은 안 되고, 국민의 신뢰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 공공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 있어줘야 나머지 시장 메커니즘도 잘 작동할 수 있고, 의사들도 자유로울 수 있다.”
서혜미 기자 ha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