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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바람처럼 남편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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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6-1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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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년 5월에 보도한 어느 라이따이한들의 애타는 소망, 31년 만에 이루어지다

사진/ 킴리 가족의 사연을 전한 <한겨레21> 258호.
“네∼에?” 할머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뭐라고요? 그럴 리가….” 그는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맨발로 뛰쳐나왔다. 마침 택시에서 할아버지가 막 내리고 있었다. “아이고… 정말이네… 정말이네… 맞아, 저 양반 맞아… 아이고나… 아이고나… 많이 늙었네….”

얼마나 애타게 기다려왔던 만남이었던가. 31년 동안 단 하루도 잊은 적이 없던 남편. 한국은 물론 일본·프랑스·필리핀까지 수소문하며 흔적을 찾았던 딸들의 아버지. 그런 그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바람처럼 나타났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현실이 눈앞에 있었다. 할머니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남편의 품에 안겨 울먹이기만 했다.

불쑥 <한겨레21>로 찾아오다


사진/ 31년 만에 딸과 사위, 손자들과 함께한 박호균·킴리 부부(가운데).
응웬 티 킴리(61). 베트남 호치민 근교의 송베 어우커 거리에서 쌀국숫집을 운영하는 평범한 할머니. 이 할머니의 평범하지 않은 사연이 처음 소개된 것은 <한겨레21> 258호(99년 5월20일치)였다. 보도 직전 그는 전쟁 시절 자신과 가정을 꾸렸던 한국인 남편을 찾고 있었다. 단서는 이름 석자와 옛날 한국 주소, 그리고 태어난 해가 22년이라는 것뿐이었다.

우연히 킴리의 사연을 접한 <한겨레21>은 국내에서 그 남편의 행방을 추적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한국에 있지 않았다. 박호균(80)씨. 보도 당시 한국인 가족들의 익명 요구로 박OO씨로 표기돼야만 했던 인물이다. 66년 5월 베트남으로 건너간 박씨는 미국 해군 건설회사의 주방일과 미군 1사단 PX 총감독 일을 하면서 킴리와 가정을 이뤘다. 물론 한국에도 부인과 1남3녀가 있었다. 킴리와 사별한 전남편의 두 아들까지 거뒀던 그는 후에(33)와 투란(28) 등 두 딸을 낳으며 비교적 단란하게 생활했다. 그러나 71년 5월 박씨는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남베트남 해방세력의 공세가 심상치 않은 상황이었다.

<한겨레21>의 보도가 있던 99년 5월, 박씨는 큰아들 집인 미국 워싱턴 근교 메릴랜드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는 <한겨레21>과의 전화인터뷰를 통해 “71년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미국 마이애미로 건너가 세계 각지를 도는 관광선의 식당 총감독 일을 했으며, 지금은 정년퇴직한 상태”라고 밝힌 바 있다. 그는 또 “베트남 가족들을 만나고 싶지 않으냐”는 질문에 “지금은 그런 능력이 없다”고 말했다.

그런 그가 지난 3월 초 불쑥 한국으로 돌아와 <한겨레21>을 찾았다. 그는 “베트남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한국의 자식들도 다 이해한다. 이제는 갈 때가 됐으니 도와달라”고 덧붙였다. 그의 한국 부인은 79년 세상을 떠났다. 큰딸은 지금도 “아버지의 두집 살림으로 인한 화병 때문이었다”고 믿는다. 하지만 자식들도 세월이 지나면서 “돌아가시기 전에 만나보라”는 쪽으로 누그러졌다. 결국 지난 6월10일 오전, 박씨는 인천발 호치민행 비행기에 올랐다. “부인과 딸들이 이해해준다면 눌러살겠다”는 말을 남긴 채.

“미안하다. 용서해달라…”

킴리 처지에서 본다면 팔순이 돼서야 돌아온 박씨의 행적은 무책임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남편의 얼굴을 쓰다듬는 킴리의 얼굴엔 기쁨만이 돋아났다. 함께 사는 두 딸에게 “누우시도록 베개를 가져오라”고 했고 낮은 베개를 가져오자 “이 양반이 얼마나 베개를 높이 베는 줄 아느냐”면서 타박했으며, 냉커피를 타오자 “노인양반한테 얼음 주면 어떡하냐. 다시 뜨겁게 타오라”고 채근했다. 그러면서 그는 옛 사진과 밥그릇 등 35년 전 추억의 소품들을 꺼내보이며 그 시절을 떠올렸다. 온 가족이 소풍 가던 일, 집에 두대나 있던 자가용을 부부가 한대씩 운전하고 다니던 일…, 그러나 남편이 떠난 뒤 아이들을 먹여살리느라 재봉질로 밤 12시까지 허리를 펴지 못하던 일, 너무 슬퍼 담배까지 배웠던 일 등등. 상을 차리느라 분주하게 시장과 부엌을 오가던 딸들도 “아버지 정말 잘 오셨다”며 두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였다. 묵묵히 앉아 있던 박씨는 그저 “미안하다. 용서해달라”는 두 마디를 했을 뿐이다.

남북의 이산가족들과는 달리 자신의 선택에 따라 만나고 함께 살 수 있는 한-베트남의 이산가족들. 킴리 가족에게 꿈결처럼 들이닥친 기쁨은, 그러나 아직은 소수 라이따이한들만의 것이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호치민=구수정 통신원 chaovietnam@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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