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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이에는 이, 파업엔 가압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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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6-1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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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 분열 노리는 사용자들의 새로운 전략… 32곳 사업장서 고통

사진/ 파업에 참여한 50여명한테 떨어진 13억원의 가압류로 고통받고 있는 레미콘 노동자들. (한겨레21)
지난해 4월부터 레미콘 노동자들은 ‘노동조합활동 보장’ 등을 내걸고 160여일에 걸친 장기파업을 벌였다. 기나긴 싸움인 만큼 자신들의 생계를 담보로 한 파업이었다. 지난해 9월 파업은 끝났다. 그러나 파업 뒤 사용자들은 여전히 노조활동을 부정하면서, 이제는 되레 생계를 담보삼아 파업에 굴레를 덧씌우고 있다. 파업에 참여한 50여명의 재산에 죄다 가압류 조처를 취한 것이다. 건설운송노조 오희택 사무차장은 “사용자들이 파업에 따른 손해배상액 13억원의 담보로 노동자들의 재산을 가압류했다”며 “조합원들이 갖고 있는 레미콘 차량까지 가압류하는 바람에 해고당한 조합원들이 다른 데 가서 일할 수도 없는 처지”라고 말했다.

노조간부들 “차라리 몸으로 때울래”

사진/ 한 발전노동자한테 떨어진 31억원의 가압류.
경기도 용인에 있는 레미콘 업체인 CKI인프라시스 노동조합은 가압류로 결딴날 처지에 놓였다. CKI인프라시스 노조에 남아 있는 조합원은 7명. 애초 48명에 이르던 조합원 중 상당수가 조합을 떠났다. 회사 쪽의 가압류 때문이다. “노조활동을 포기하면 가압류 대상에서 빼준다”는 회사 쪽의 회유에 겁먹은 조합원들이 대거 조합을 탈퇴하고 만 것이다. CKI인프라시스 노조의 석원희(57) 분회장은 “회사 쪽의 가압류 조처는 노조를 분열시키고 깨기 위한 것”이라며 “오랜 파업 기간에 생계를 위해 큰 빚을 졌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내게 떨어진 가압류 금액만 1억5천만원”이라고 한숨지었다. 결국 석씨는 유일한 생계수단인 레미콘 차량을 내다팔 수밖에 없었다. 아들 결혼자금을 마련하려고 대출받으려 했지만 재산을 몽땅 가압류당해 대출 길이 막혀버렸기 때문이다.


사진/ 가압류 선별해제 공문.
파업이 벌어지면 기다렸다는 듯 사용자들이 노조와 조합원을 상대로 가압류·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발전노조 파업에서 극단적으로 나타났다. 지난 4월 파업을 끝내고 복귀한 발전노조 조합원들은 회사 쪽의 무더기 가압류로 급여의 50%를 떼이고 있다. 여수화력발전소의 경우 노조지부장은 64억원을 가압류당했고, 해고된 조합원 10여명의 월급통장에는 -31억원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 물론 통장거래는 정지됐다. 통장에 -31억원이 찍힌 이준상씨는 “엄청난 가압류 금액에 조합원들이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있다”며 “각종 공과금 이체도 막혔고, 급여통장에서 생활비를 빼내 쓰던 조합원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처지”라고 말했다. 발전노조가 파업에 대한 민사책임으로 3차례에 걸쳐 압류당한 금액은 총 425억여원. 1차로 노조간부 109명을 대상으로 가압류에 들어갔던 회사 쪽은 평조합원 3900여명한테도 모조리 가압류 조처를 밟았다. 최근에는 파업기간 중에 조기 복귀한 조합원 400여명을 골라 가압류를 풀어줬지만, 이는 사용자 쪽이 가압류를 노조분열의 도구로 이용한다는 점을 보여줄 뿐이다.

요즘 파업이 벌어지면 으레 뒤따르는 게 사용자 쪽의 가압류·손해배상소송이다. 업무방해 등 주로 형사고발에 그친 과거와 달리 가압류 조처 등 무조건 민사상 책임부터 묻고보는 식이다. 여기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지시가 뒤틀린 형태로 깔려 있다. 지난 5월 김 대통령은 “불법폭력 노조운동을 용납해서는 안 되지만 구속만이 최선은 아니다”며 “민사소송 등 여러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되도록 인신구속을 피하라는 뜻이었지만 사용자들은 민사대응을 노동조합을 손쉽게 무력화시키는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래서 노조간부들이 “파업이 불법이라면 아예 나를 구속시켜라, 대신 돈으로 물리지 말라”고 호소할 판이다. 민주노총에 따르면 손배소송·가압류에 시달리는 사업장은 총 32곳(총 1207억원)에 달한다.

회사쪽, 손배소송은 질질 끌기 일쑤

사진/ 조합비를 가압류당한 철도노조는 할 수 없이 조합원들한테 돈을 꿔 운영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사업장마다 파업이 발생하면 민사로, 즉 돈으로 대응하는 까닭은 뭘까. 사용자들의 가압류·손해배상 대응은 파업을 원천봉쇄하기 위한 신종 노조 무력화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법원이 가압류를 받아들이고 난 뒤, 정식재판은 회사 쪽이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해야 시작된다. 그러나 회사 쪽은 손해배상청구소송은 내지 않은 채 가압류 사건을 질질 끌기 일쑤다. 그동안 조합원들은 재산권 행사가 제한되고 임금 가압류로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한다. 민주노총 박강우 정책국장은 “사용자가 일단 가압류·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면 노조가 재판에서 승소할 때까지 상당 기간 재산권이 제약될 수밖에 없다”며 “승소하더라도 별다른 제재를 가할 수 없는 만큼 일방적으로 피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는 처지”라고 말했다.

특히 형사처벌은 확정판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가압류는 신속하게 이뤄진다. 사용자들이 민사적 대응을 선호하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또 형사처벌은 대상이 노조 지도부에 국한되는 반면 가압류는 마음만 먹으면 전 조합원한테 할 수 있다. 조합원에 대한 심리적·물질적 압박인 셈인데, 가압류가 가족 등 주변사람들한테까지 뻗치면 노조와 가족 사이에서 고민하다 결국 노조를 포기하는 경우도 생긴다. 가압류 철회 등을 내걸고 싸우는 광주시의 옛 동광주병원(현 광주병원)의 사례가 이를 보여준다. 파업 이후 병원 쪽은 조합원 64명에게 12억9천만원을 가압류하면서 입사 당시 재정보증을 선 가족 및 친척의 재산까지 가압류했다. 이어 몇몇 조합원한테 가압류를 철회해주는 조건으로 파업행위를 사죄하고 조합활동에서 빠지라고 회유했다. 가압류에 시달리다 못한 조합원들은 결국 노조를 떠났고, 일부는 다른 회사로 직장을 옮겼지만 가압류가 풀리지 않아 전혀 재산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보건의료노조 광주전남본부 강현옥 사무국장은 “현재 파업 중인 목포가톨릭병원에서도 병원 쪽이 재정보증인한테까지 책임을 묻겠다는 식으로 가압류 소문을 공공연히 흘리며 엄포를 놓고 있다”며 “사용자의 가압류 조처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고 말했다.

회사 쪽이 가압류 조처를 통해 노조를 흔드는 건 철도노조에서도 마찬가지다. 지난 2월 파업 이후 철도청은 파업으로 인한 재산손실의 책임을 추궁한다며 조합비 15억9천만원을 가압류했다. 파업때마다 파업지도부에 대한 형사처벌과 해고가 뒤따랐지만 가압류 조처가 들어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철도노조 이종열 국장은 “조합비를 압류당해 정상적인 조합활동을 할 수 없게 됐다”며 “그래서 할 수 없이 2년 뒤에 갚는 조건으로 조합원한테 5만원씩 차용증서를 써주고 조합비를 융통해 쓰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과연 법적으로 타당한가

가압류가 단체행동권을 봉쇄하는 수단으로 이용되는 대표적인 사례가 서울지하철노조다. 99년 파업과 관련해 15억원을 가압류한 지하철공사는 지난 2월 교섭 당시, 가압류한 6개월치 조합비를 지급한다는 안을 내놓았다. 파업철회의 조건 중 하나였다. 형사고발은 나중에 일부 취하했지만 가압류는 3년째 끝까지 쥐고 있다가 이때 써먹은 것이다. 서울지하철노조 김천호 실장은 “해고자에 대한 급여를 노조가 지급해주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고, 그래서 교섭 테이블에서 가압류 일부를 일시적으로 푸는 데 합의했다”며 “동네싸움으로 치면 ‘때려봐, 진단서 끊어 작살내줄게’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파업해볼 테면 해봐, 우리는 손해배상 낼 테니까” 하는 식으로 사용자가 가압류를 이용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파업에 따른 민사상 책임을 노조 또는 노조간부가 아닌 평조합원한테까지 물을 수 있는 것일까. 공공연맹 노항래 국장은 “파업은 집단적 결정이고 단체행동인데 그 민사책임을 개개인한테 묻는 건 법리상으로 맞지 않는다”며 “파업에 참여한 조합원 중 일부에게 가압류를 청구하는 것 역시 형평에 안 맞는 것”이라고 말했다. 파업을 기획, 주도하지 않은 단순 가담자에게 책임을 묻는 건 법률적으로 문제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민사상 가압류·손해배상소송은 불법파업에 따른 영업 및 재산 손실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고, 쟁의행위가 정당하면 민·형사상 책임을 물을 수 없다. 그러나 사용자 쪽은 파업만 들어가면 합법이든 불법이든 가리지 않고 무턱대고 가압류부터 하고 본다. 말 그대로 가압류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법원이 받아주는 관행을 악용하는 것이다. 발전노조가 “제조업과 달리 파업 중 전력공급 차질이 발생한 것도 아니다”고 항변해봤자 법정다툼은 장기화할 수밖에 없고, 그 사이에 노조는 무력화되고 만다. 가압류로 월급도 절반씩 떼인 상태에서 일부 조합원들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채 ‘가압류 선별해제’라는 사용자의 카드에 굴복하고 마는 것이다. 민주노총 권두섭 변호사는 “합법적인 파업권을 협소하게 해석하는 노동법 때문에 합법 파업은 노조가 최소한의 요구만 하거나 머리를 잘 쓰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며 “파업이 정당한 쟁의로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사용자들이 가압류란 칼을 마구 휘두르고 있다”고 말했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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