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12일 서울 서초구의 한 부동산 중개업소에 전세매물 정보가 게시돼 있다. 연합뉴스
전세(傳貰)라는 용어가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일제가 1913년에 발행한 <관습조사보고서>이다. 조선시대 전세기간은 지방에서는 통상 1년,
한성부(조선왕조의 수도)에서는 100일이었고, 전세기탁금은 가옥 가격의 반액에서 7·8할까지였고, 전세권자는 권리를 양도하거나 전당할 수 있고 이에 대해 가옥주는 이의제기가 불가했다.
(윤대성, <한국전세권법연구> 참조) 전세는 월세만 있는 일본이 지배한 35년 동안에도 살아남았고, 도시의 주택 부족이 심각하던 시절에 중요한 임대차계약이자 자금조달 방법으로 역할을 해왔다. 전체 가구의 30%가 전세로 살던 때(1995년)도 있었고, 2020년에도 15.5%가 전세로 거주했다(인구주택총조사). 월세 대부분은 보증금이 있으니 사실상 전세의 영향을 받는 임대차계약은 전체의 80%가 넘을 것이다.
오랜 세월 우리나라에서 중추적 구실을 한 전세가 전대미문의 위기를 맞았다. 주택 매매가와 전세가가 폭락하면서 잠재한 전세의 위험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전세를 끼고 무자본 갭투자로 수십, 수백 채를 소유한 임대인들의 보증금 돌려막기가 불가능해지면서 많은 세입자가 보증금 전부 또는 일부를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전세의 허점을 이용한 전세사기 전모가 속속 드러나면서 ‘전세는 위험하다’는 인식이 급속히 퍼지고 있다.
장차 전세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정말 사라질까? 2000년대 중반 전세난이 심화했을 때도 ‘전세종말론’이 힘을 얻었지만, 비중은 줄었어도 여전히 전세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대규모 전세사기로 전세제도의 위험이 생각보다 훨씬 크다는 것이 드러난 지금, 전세의 월세화는 가속할 것이다. 그렇지만 현재 전체 보증금이 1천조원 넘어 이를 모두 월세로 전환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반전세화’ 경로를 거쳐야 하므로 단기간에 전세가 사라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전세는 장점도 많은 제도다. 먼저 주택시장의 충격을 흡수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실직한 세입자들이 월세를 장기간 체납하자 많은 나라에서 특별법을 만들어 강제퇴거를 막았다. 그러나 우리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전세는 월세 미납 위험 자체가 없고, 보증부 월세도 보증금 규모가 월세의 수십 배에 이르니 월세를 못 받아도 상당 기간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전세는 맞춤형 계약을 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일정 소득은 있지만 아직 목돈이 없는 젊은 세대에는 월세가 유용하다. 반대로 모아놓은 자산은 있지만 월소득이 적은 은퇴자에게는 전세가 더 매력적이다. 집주인 처지에서도 목돈을 활용하는 경우엔 전세, 월 임대료 수입이 필요한 경우엔 월세로 계약할 수 있으니 자신에게 맞는 보증금과 월세의 조합을 선택할 수 있다. 월세만 있는 나라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주택 정보는 있는데 임대인 정보는 없는 등기부
그렇다면 전세제도를 어떻게 개선해야 할까? 우선 정보 비대칭을 해소해야 한다. 해당 주택 정보는 등기부로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는데, 임대인 정보는 확인하기 어렵다. 특히 임대인이 보증금을 반환할 능력이 있는지 알 수 없다. 임대인 본인의 설명이나 중개인의 말을 믿는 수밖에 없는데, 진실 여부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
더 큰 문제는 임대인이 임차인에게 아무런 통보 없이, 임차인의 동의를 받지 않고 소유권을 넘길 수 있다는 것이다. 세입자이자 채권자인 전세권자는 당연히 채무자가 바뀌는 것을 알 권리가 있다. 만약 전세계약 당시 임대인은 보증금 반환 능력이 있었는데 바뀐 집주인은 신용불량자에 보증금 반환 능력이 전혀 없다면 세입자는 갑자기 위험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임대인 변경시 세입자에게 통지하고, 세입자가 계약을 종료할지 지속할지 선택하도록 기회를 줘야 한다.
필요한 지역이나 유형에 대해 전세가율(매매가 대비 전세가) 상한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투기 우려가 있는 지역에서 주택담보대출비율(LTV) 규제를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일반주택의 전세가율은 대략 50~70%를 오르내리며 매매가와의 격차를 유지했다. 그러나 ‘깡통주택’이 많아지면서 무갭투자(전세가가 매매가보다 높거나 같아 본인 돈 없이 주택을 매입하는 방식)와 보증금 미반환 위험을 키우고 있다. 깡통주택을 매입하는 데는 자기자본이 전혀 들지 않으므로 자기 자본이 없는 개인도 수백, 수천 채를 사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들은 처음부터 보증금 반환은 안중에도 없고 시세차익을 노릴 뿐이다.
전세가율 상한제는 무분별한 무갭투자를 원천봉쇄하므로 전세사기 예방 효과도 있다. 만약 전세가율을 70% 이하로 제한하면 2억원짜리 주택을 매입할 때 적어도 6천만원을 투입해야 한다. 100채면 60억원이다. 자연스럽게 자기 자본 또는 자본조달 능력이 있는 주체만이 다주택을 보유하게 된다. 그 주택이 경매로 넘어가면 집주인이 투자한 30%는 포기해야 하므로 보증금 반환을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다.
전세권이나 임차권 등기 의무화도 필요하다. 매매하면 등기부에 매매 일시와 금액, 매수인 정보가 모두 등재된다. 반면 전세권을 설정하려면 임대인 동의가 필요하고 비용이 들므로 대부분 확정일자를 받는 것으로 대신해 등기부상에 아무런 정보가 기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다가구주택의 경우 본인보다 앞서 들어온 세입자들의 보증금 규모를 알 길이 없다. 전세권 등기를 의무화하고 비용을 대폭 낮춰 누구든 등기부를 보면 해당 주택의 과거 전세 이력과 내용을 확인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출근하다 사고가 날 수 있다고 회사를 안 갈 수는 없다. 안전시설을 보강하고 교통법규를 정비하듯이, 전세제도가 가진 위험을 줄이면서 장점을 최대화하도록 개선하는 것이 최선이다. 얼리어답터가 많고 세계적으로도 가장 똑똑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직 전세제도를 활용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김진유 경기대 도시교통공학과 교수(한국주택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