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3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압승을 하였다. 유감스러운 것은 ‘이 정권 들어와서 영남 지역 주민들이 특히 심한 고통을 받아왔다’는 이회창 후보의 발언은 매우 위험한 정치적 선동이었다는 점이다.
우리 집의 아홉살 난 딸은 불쌍하다. 마흔을 바라보는 엄마, 아빠 두 어른은 가혹하다. 둘의 대결에서 점화된 억하심정은 어린아이에게 사나운 불길로 뿜어져나온다. 물론 언제나 아이를 가르친다는 또는 버릇을 고친다는 이유로 행해진다. 상처입은 완력은 약한 아이의 ‘도발’이라는 호기를 맞아 본때를 보인다. 당돌하긴 하나 연약한 아이는 이내 저항을 포기하고 복종한다. 그리고 어른들의 광포한 무의식의 소용돌이는 비로소 포식을 한 야수처럼 나른해진다.
소수정권에 대한 심판이 왜곡된다면
가엾은 아이가 잠이 들려고 하는데, 아직도 거리에서는 함성이 솟구친다. 축구 변방의 지진아인 한국의 선전은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러나 나라를 들썩이는 흥분의 도가니는 무언가 의심쩍은 데가 있다. 젊은이들의 열광 속에서 그들의 삶에 깊이 팬 험한 계곡들을 본다면 너무 예민한가? 가정과 학교에서 치이고 쌓였을 수많은 상처와 울분이 스포츠, 게다가 애국이라는 아주 합당한 명분으로 분출되어 나오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보편적 스포츠맨십을 통해 성취되는 인간의 경지에 대한 대동(大同)의 감동까지 오르지 못하고, 단지 권력의지의 연장인 승부욕에만 그친다면 이는 오히려 두려워할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대견하다. 그 엄청난 에너지를 어떻게 잘 간수하며 지내왔을까? 불꽃놀이처럼 터지는 저 함성이 폭력의 승화물이라고 생각해보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누가 말하였던가, 문화는 심리적 억압의 승화라고.
어찌 문화만이겠는가, 정치의 본질 또한 인민의 억압과 분노라는 자기장 속에 있는지 모른다. 피압박대중이 굴레를 떨치고 일어나 자유를 쟁취해온 도정이 바로 인류 정치사였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인간관계상의 심리적 억압은 대부분 그릇된 체제와 실패한 정책에 기인하는 것이며, 그것을 개선하는 것이 바로 가정과 학교의 폭력을 줄이는 근본 처방이 된다는 점도 잘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나아가 대중의 정치행위가 일상의 억압을 해소하려는 권력욕에서 나오는 것일 수 있다는 점은 생각하기 쉽지 않은 듯하다. 하지만 사실 민주헌정질서는 민주주의의 탁월성과 아울러 위험성에 대한 깊은 통찰의 산물이다. 인민들의 정당한 저항과 존엄의 쟁취에서 시작된 역사상 위대한 혁명들이 어째서 그 끝에는 왜곡된 권력의지의 관철에 집착하는 야심가들과 그에 추종하는 비겁한 도당들에게 떨어지고 말았는가? 최선의 국가에 대한 다수의 열망은 곧잘 최악의 국가만을 낳고 말았다는 아이러니는 헌정질서의 난해한 물음이었다. 그 결과 민주헌정질서는 사회적 목적의 강제적 시행보다 공권력에 대한 규제에 우선적 가치를 두며, 국민주권을 기초로 하지만 그것은 다수의 힘의 관철이 아니라 권력에 대한 다수의 심판이라는 형태를 띠게 되었던 것이다. 6·13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압승을 하였다. 유감스러운 것은 ‘이 정권 들어와서 영남 지역 주민들이 특히 심한 고통을 받아왔다’는 이회창 후보의 발언은 매우 위험한 정치적 선동이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것이 ‘부패하고 무능하고 부도덕한’ 소수정권에 대한 다수의 정당한 심판으로 귀결되었다면 거기까지는 당연히 우리 민주헌정질서에서 받아들일 수 있다. 대중들의 피해의식은 정치적 심판의 동력으로 충분히 유효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권력에 대한 심판을 넘어서, 이후 권력행사의 정당화로까지 이어진다면 사정은 달라질 것이다. 경력과 학식 등에서 우월하고 수적으로도 여유 있는 이른바 이 사회의 주류들이, ‘보잘것없는’ 소수에 의해 부당하게 당했다는 억하심정과 왜곡된 권력의지로 통치에 임한다면 과연 민주헌정질서가 요구하는 힘의 절제가 얼마나 달성될 수 있을지 매우 의심스럽다. 주류의 북한에 대한 경멸감 국내 정치에 관한 한 그래도 우리 민주주의의 저력이 헌정질서를 지켜주리라고 믿어볼 만하지만 더 심각한 것은 대북관계가 아닌가 한다. 대외적인 관계에서는 민주헌정질서와 같은 권력의 절제를 기대하기는 더욱 어려운 법이기 때문이다. 어려운 가운데 지원하였는데 보답은커녕 약속도 안 지킨다는 배신감, 북한 체제의 후진성과 비민주성에 대한 혐오감, 게다가 북한을 ‘싸고도는’ DJ에 대한 반감 등이 더해져 우리 사회 주류의 북한에 대한 경멸감은 점점 고조되는 듯이 보인다. 여기에 미국이라는 초강자가 든든하게 뒷받침해주고 있지 않은가? 아니 미국이야말로 그들의 상처난 자존심을 북한과 같은 ‘불량국가’들을 응징함으로써 보상받으려고 설쳐대고 있지 않은가? 주류의 분발을 환영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다만 그들의 맹세대로 민주헌정질서에 충실해주기를 당부할 따름이다. 특히 그것을 우리의 민주헌정질서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대방에 대하여도 적용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반도의 평화가 달려 있기 때문에. 새 아침, 우리 가정에도 빛이 들게 하소서.

사진/ 정태욱 ㅣ 영남대 교수·법학
어찌 문화만이겠는가, 정치의 본질 또한 인민의 억압과 분노라는 자기장 속에 있는지 모른다. 피압박대중이 굴레를 떨치고 일어나 자유를 쟁취해온 도정이 바로 인류 정치사였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인간관계상의 심리적 억압은 대부분 그릇된 체제와 실패한 정책에 기인하는 것이며, 그것을 개선하는 것이 바로 가정과 학교의 폭력을 줄이는 근본 처방이 된다는 점도 잘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나아가 대중의 정치행위가 일상의 억압을 해소하려는 권력욕에서 나오는 것일 수 있다는 점은 생각하기 쉽지 않은 듯하다. 하지만 사실 민주헌정질서는 민주주의의 탁월성과 아울러 위험성에 대한 깊은 통찰의 산물이다. 인민들의 정당한 저항과 존엄의 쟁취에서 시작된 역사상 위대한 혁명들이 어째서 그 끝에는 왜곡된 권력의지의 관철에 집착하는 야심가들과 그에 추종하는 비겁한 도당들에게 떨어지고 말았는가? 최선의 국가에 대한 다수의 열망은 곧잘 최악의 국가만을 낳고 말았다는 아이러니는 헌정질서의 난해한 물음이었다. 그 결과 민주헌정질서는 사회적 목적의 강제적 시행보다 공권력에 대한 규제에 우선적 가치를 두며, 국민주권을 기초로 하지만 그것은 다수의 힘의 관철이 아니라 권력에 대한 다수의 심판이라는 형태를 띠게 되었던 것이다. 6·13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압승을 하였다. 유감스러운 것은 ‘이 정권 들어와서 영남 지역 주민들이 특히 심한 고통을 받아왔다’는 이회창 후보의 발언은 매우 위험한 정치적 선동이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것이 ‘부패하고 무능하고 부도덕한’ 소수정권에 대한 다수의 정당한 심판으로 귀결되었다면 거기까지는 당연히 우리 민주헌정질서에서 받아들일 수 있다. 대중들의 피해의식은 정치적 심판의 동력으로 충분히 유효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권력에 대한 심판을 넘어서, 이후 권력행사의 정당화로까지 이어진다면 사정은 달라질 것이다. 경력과 학식 등에서 우월하고 수적으로도 여유 있는 이른바 이 사회의 주류들이, ‘보잘것없는’ 소수에 의해 부당하게 당했다는 억하심정과 왜곡된 권력의지로 통치에 임한다면 과연 민주헌정질서가 요구하는 힘의 절제가 얼마나 달성될 수 있을지 매우 의심스럽다. 주류의 북한에 대한 경멸감 국내 정치에 관한 한 그래도 우리 민주주의의 저력이 헌정질서를 지켜주리라고 믿어볼 만하지만 더 심각한 것은 대북관계가 아닌가 한다. 대외적인 관계에서는 민주헌정질서와 같은 권력의 절제를 기대하기는 더욱 어려운 법이기 때문이다. 어려운 가운데 지원하였는데 보답은커녕 약속도 안 지킨다는 배신감, 북한 체제의 후진성과 비민주성에 대한 혐오감, 게다가 북한을 ‘싸고도는’ DJ에 대한 반감 등이 더해져 우리 사회 주류의 북한에 대한 경멸감은 점점 고조되는 듯이 보인다. 여기에 미국이라는 초강자가 든든하게 뒷받침해주고 있지 않은가? 아니 미국이야말로 그들의 상처난 자존심을 북한과 같은 ‘불량국가’들을 응징함으로써 보상받으려고 설쳐대고 있지 않은가? 주류의 분발을 환영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다만 그들의 맹세대로 민주헌정질서에 충실해주기를 당부할 따름이다. 특히 그것을 우리의 민주헌정질서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대방에 대하여도 적용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반도의 평화가 달려 있기 때문에. 새 아침, 우리 가정에도 빛이 들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