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고삐리 문사들의 고향이었던 종로서적은 무엇을 잉태하고 사라지는 걸까
모든 장소의 기억은 세대론적이다. ‘홍대앞’과 ‘이대앞’이라는 지명이 어찌 동시대의 기억을 저장할 수 있겠는가. 명동과 압구정의 번화(繁華)에는 문명사적으로 한 100년쯤의 간극이 가로놓인다. 장소뿐만이 아니다. 7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나는 예컨대 ‘분식센타’라는 단어에 숨어 있는 아방가르드를 아랫세대들에게 도저히 납득시킬 수 없다. 반드시 나팔바지여야 하는 ‘사복’을 입고, 대여섯명씩 떼로 몰려가, 팝송을 트는 디제이나 여학생들을 훔쳐보는 대한극장 건너편 진양분식센타의 첨단 문화를 요즘 중딩·고딩들이 들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아, 그때 우리는 중삐리·고삐리라고 불렸다.
우리의 근대와 종로서적
또 하나의 세대론적 기억의 저장소가 사라지는 모양이다. 종로서적이 부도로 문을 닫는다고 한다. 불편한 매장과 편의시설의 미비, 사주 가족들 간의 불화에 따른 경영난조와 강성노조 문제, 온라인 서점의 활성화 등등 부도의 원인도 다양하다. 하지만 문을 닫게 된 진짜 원인에는 내 탓도 크다. 몇주 전에도 나는 분명 거길 갔다. 그러나 그곳은 ‘종로’서적이었지 종로‘서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 우리들의 종로서적은 언제부터인가 항상 약속장소였다. 종로에서 보자, 하는 말은 ‘종로서적’에서 만나자는 말과 동의어였다. 종로서적아, 정말 미안하다. 미안하지만 잠깐, 이 미안함은 너의 책장사에 대한 것은 아니다. 종로서적의 의미는 이미 그것을 넘어서 있지 않은가.
SINCE 1907년. 반만년 역사 어쩌고 하는 나라에 이쯤 되는 내력을 지닌 곳이 드물다. 3·1운동, 6·25전쟁, 4·19혁명이 모두 그 앞을 스쳐갔다는 말이다. 한용운이 온종일 서서 책을 읽고, 모자로 얼굴을 감춘 박헌영이 암호를 주고받으며 동지를 만나고, 대낮부터 술취한 김수영이 소란을 피웠는지도 모를 장소다. 옛것은 조오흔 것이여? 에이, 그러나 과장은 말자. 떠올리면 언제고 ‘암연히 수수로운’ 역사의 기억을 지닌 채 일상을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종로서적은 존재했지만 나의 혹은 우리들의 종로서적은 다분히 1970년대를 의미한다. 아니, 차라리 70년대가 종로서적스럽다고나 할까. 사회문화사적으로 대한민국의 출발점은 1970년대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이전의 수십년간은 고대왕국에서 현대국가로 넘어가는 간이역 같은 시기였다. 대형화·물신화·제도화가 70년대에 급격히 이루어졌다. 한국인이 최초로 근대(modern)를 살아본 ‘체험 삶의 현장’으로서 70년대가 증명하는 바는 너무도 많다. 가령 대중적 관심사는 아니겠지만, 출판물의 경우가 그렇다. 한때 모든 시인 지망생이 읽던 민음사의 ‘오늘의 시인총서’라는 게 있다. 출판사에서 기획해서 대상 시인을 선정하고 동일한 장정에 일련넘버가 붙은 시리즈로 시집을 출간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놀랍게도 시집에 인세를 지급한다! 그 첫회분으로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 김춘수의 <처용> 등이 나온 게 1974년이었다. 대성공을 거둔 이 최초의 현대적 기획출판물이 바로 대량화·물량화·제도화로 가는 사회적 상황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그 이전의 수공업적 자비출판 관행에 비추어 보면 이것은 시문학사상 개벽과 같은 변화였다. ‘오늘의 시인총서’ 초판이 나올 때 나는 고교 문예반으로 열정적인 시인 지망생이었다. 그 시리즈의 몇권은 동네서점에서, 나머지 대부분은 종로서적에서 샀다. 일단 서점은 흥정의 장소였다. 한권에 500원이었는데, 당시 책을 정가대로 사는 바보는 아무도 없었다. 신당동 광무극장 건너편 좁다란 집 골목에만 동네서점이 세 군데나 있었다. 주인 모두와 안면을 트는 건 필수였고 각각 어떤 할리우드 액션이어야 많이 깎을 수 있는지 치열한 두뇌체조가 필요했다. 그때 한 집, 문예반 시독회 때 발표된 내 습작시 프린트물을 보여주자 감탄하는 표정으로 대폭 값을 깎아주는 주인을 발견했다. 고교생 문사(文士)를 너그럽게 문인으로 대접해주는 작은 서점, 거기에는 70년대 이전이 공존했다. 그러나 종로서적은 달랐다. 우선 책 포장지가 중요했다. 도처에 분점이 생겨나기 전, 명동에만 있는 롯데나 신세계백화점 쇼핑백을 들고 다니는 게 세련의 상징처럼 여겨졌듯이, 김홍도 민속화가 그려진 밤색 종로서적 포장지로 표지를 싸서 들고 다니는 건 문화적 행보를 과시하는 행위였다. 그 시절 고삐리들은 정말이지 극성스럽게도 종로2가에 몰려들었다. 모든 단과반 학원들이 인근에 있었고, 태극당·고려당 빵집이 있었고, YMCA에서는 온갖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었고, 뒷골목에는 팝송‘만’을 신청해 듣는 분식센타(아, 그때의 슈퍼스타 남진·나훈아를 어떤 촌놈이 신청해 들으랴)와 밀가루떡 돈가스를 파는 경양식집들이 즐비했다. 그렇게 종로서적은 달랐다. 문화의 속도와 중심이 서점을 중심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아울러 양우당·삼일서적 같은 또 다른 대형서점들과 20여 군데가 넘는 인근의 작은 서점들과의 경쟁과 공존이 가능했다. 전성기의 종로서적으로 가보자
기억이 강보에 싸여 영탄의 물살로 흐르는 걸 경계해야 한다. 반면 70년대의 일상을 유신통치하고만 직결시켜 떠올리는 의식과잉도 리얼리즘에 대한 왜곡을 부른다. 나는 지금 한 서점의 종말을 떠올리고 있다. 경제적으로 일직선적인 도약이 꿈틀댄 70년대 전성기가 있었고, 거대자본을 배경으로 한 교보문고의 등장과 함께 80년대의 쇠퇴기가 있었고, 전 지구적 변화와 맥을 같이한 90년대의 카오스와 더불어 소멸의 운명에 처한 곳이다. 그 전성·쇠퇴·소멸과 비례 또는 반비례한 과정 속에 지금 각자의 삶의 처지가 놓여 있다. 당신의 인생은 종로서적과 비례했는가 아니면 반비례해 왔는가?
기억은 세대론적이지만 현재의 삶은 동등하다. 세대를 떠나, 직면한 오늘의 현실은 항상 우리 모두의 몫이다. 그러기에 이렇게 작은 목소리로 말하고 싶다. 우리 모두 한번 전성기의 종로서적으로 가보자고. 아버지를 죽여 새로운 권력을 창출해야 했던 변혁의 한 세대, 그 30년은 한 바퀴 돌았으니까. 아무도 뒤로 갈 수 없으니까 이제 뒤돌아보자. 과거사에 대한 자학적이고 멸시적인 부정으로 현실을 추동하는 에너지를 얻기는 더 이상 힘들다. 까까머리·단발머리들이 북적이던 전성기 종로서적의 70년대, 거기 무엇이 잉태되었기에 오늘날의 다이내믹 코리아가 가능한지 애정과 탐구심을 갖고 들여다보자는 말이다.
김갑수/ 시인·방송인

사진/ 굳게 닫힌 종로서적. 우리들의 종로서적은 언제부터인가 항상 약속장소였다. (이정용 기자)
SINCE 1907년. 반만년 역사 어쩌고 하는 나라에 이쯤 되는 내력을 지닌 곳이 드물다. 3·1운동, 6·25전쟁, 4·19혁명이 모두 그 앞을 스쳐갔다는 말이다. 한용운이 온종일 서서 책을 읽고, 모자로 얼굴을 감춘 박헌영이 암호를 주고받으며 동지를 만나고, 대낮부터 술취한 김수영이 소란을 피웠는지도 모를 장소다. 옛것은 조오흔 것이여? 에이, 그러나 과장은 말자. 떠올리면 언제고 ‘암연히 수수로운’ 역사의 기억을 지닌 채 일상을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종로서적은 존재했지만 나의 혹은 우리들의 종로서적은 다분히 1970년대를 의미한다. 아니, 차라리 70년대가 종로서적스럽다고나 할까. 사회문화사적으로 대한민국의 출발점은 1970년대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이전의 수십년간은 고대왕국에서 현대국가로 넘어가는 간이역 같은 시기였다. 대형화·물신화·제도화가 70년대에 급격히 이루어졌다. 한국인이 최초로 근대(modern)를 살아본 ‘체험 삶의 현장’으로서 70년대가 증명하는 바는 너무도 많다. 가령 대중적 관심사는 아니겠지만, 출판물의 경우가 그렇다. 한때 모든 시인 지망생이 읽던 민음사의 ‘오늘의 시인총서’라는 게 있다. 출판사에서 기획해서 대상 시인을 선정하고 동일한 장정에 일련넘버가 붙은 시리즈로 시집을 출간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놀랍게도 시집에 인세를 지급한다! 그 첫회분으로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 김춘수의 <처용> 등이 나온 게 1974년이었다. 대성공을 거둔 이 최초의 현대적 기획출판물이 바로 대량화·물량화·제도화로 가는 사회적 상황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그 이전의 수공업적 자비출판 관행에 비추어 보면 이것은 시문학사상 개벽과 같은 변화였다. ‘오늘의 시인총서’ 초판이 나올 때 나는 고교 문예반으로 열정적인 시인 지망생이었다. 그 시리즈의 몇권은 동네서점에서, 나머지 대부분은 종로서적에서 샀다. 일단 서점은 흥정의 장소였다. 한권에 500원이었는데, 당시 책을 정가대로 사는 바보는 아무도 없었다. 신당동 광무극장 건너편 좁다란 집 골목에만 동네서점이 세 군데나 있었다. 주인 모두와 안면을 트는 건 필수였고 각각 어떤 할리우드 액션이어야 많이 깎을 수 있는지 치열한 두뇌체조가 필요했다. 그때 한 집, 문예반 시독회 때 발표된 내 습작시 프린트물을 보여주자 감탄하는 표정으로 대폭 값을 깎아주는 주인을 발견했다. 고교생 문사(文士)를 너그럽게 문인으로 대접해주는 작은 서점, 거기에는 70년대 이전이 공존했다. 그러나 종로서적은 달랐다. 우선 책 포장지가 중요했다. 도처에 분점이 생겨나기 전, 명동에만 있는 롯데나 신세계백화점 쇼핑백을 들고 다니는 게 세련의 상징처럼 여겨졌듯이, 김홍도 민속화가 그려진 밤색 종로서적 포장지로 표지를 싸서 들고 다니는 건 문화적 행보를 과시하는 행위였다. 그 시절 고삐리들은 정말이지 극성스럽게도 종로2가에 몰려들었다. 모든 단과반 학원들이 인근에 있었고, 태극당·고려당 빵집이 있었고, YMCA에서는 온갖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었고, 뒷골목에는 팝송‘만’을 신청해 듣는 분식센타(아, 그때의 슈퍼스타 남진·나훈아를 어떤 촌놈이 신청해 들으랴)와 밀가루떡 돈가스를 파는 경양식집들이 즐비했다. 그렇게 종로서적은 달랐다. 문화의 속도와 중심이 서점을 중심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아울러 양우당·삼일서적 같은 또 다른 대형서점들과 20여 군데가 넘는 인근의 작은 서점들과의 경쟁과 공존이 가능했다. 전성기의 종로서적으로 가보자

사진/ 70년대 전성기가 있었고, 80년대 쇠퇴기가 있었고, 90년대의 카오스와 더불어 소멸의 운명에 처한 곳. 그곳에서 무엇이 잉태되었는가. (이정용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