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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한강대교 아치 위에 걸린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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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6-0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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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그네틱스 여성 노동자들의 호소…단체협약 어기고 근무 불가능한 곳으로 공장 이전하다니…

사진/ 한국시그네틱스 여성 노동자 4명이 한강대교 아치 위해서 농성하고 있다. 이들은 파업 300일을 넘긴 지금 모두 해고된 상태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2002 한·일 월드컵 개막을 불과 이틀 앞둔 지난 5월29일 오후 5시. 강바람이 불어오는 10m 높이의 서울 한강대교 아치 위를 4명의 여성들이 사다리에 의지해 올라갔다. 아찔한 그 위에서 그들은 떨리는 손으로 플래카드 4장을 내걸었다. “죽어가는 회사 살렸더니 정리해고 웬말이냐.” “장형진 회장은 파주 이전 수용하라.” 아치 아래에는 노조원 100여명이 모여 이들을 안타깝게 지켜봤다.

이들은 반도체 조립회사인 한국시그네틱스의 여성 노동자인 임영숙(35), 윤민례(34), 정승현(34), 이미경(32)씨다. 아이가 둘셋씩인 이 ‘아줌마’ 노동자들의 요구는 간단했다. 99년 회사가 노조와 약속한 임단협을 지켜 폐쇄된 서울공장 노동자들을 파주공장에서 고용해 달라는 것뿐이다. 회사의 실제 소유주인 영풍그룹이 약속을 지키라며 지난해 7월23일 파업을 시작한 166명의 조합원들은 파업 300일을 넘긴 지금 모두 해고된 상태다.

회사 살리려 고통분담 했건만


곧이어 어둠이 깔리고 쌀쌀해진 밤공기가 밀려들었지만 이들은 경찰과 대치하며 밤샘농성을 벌였다. 아내를 설득하기 위해 사다리차를 타고 아치에 올라간 윤민례씨의 남편 김선희(37)씨는 “아내에게 내려가자고 했지만 아내는 ‘내가 내려가면 후대에도 노동자는 가진 자들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 애들의 미래를 위해서 내려갈 수 없다’고 했다”며 눈물을 흘렸다.

66년 설립된 한국시그네틱스는 꼼꼼하고 섬세해야 하는 반도체 조립의 특성상 생산직의 70% 이상이 여성들이며, 대부분이 10∼20년씩 이곳에서 일해온 기혼 노동자다. 필립스 계열이던 회사를 95년 인수한 거평그룹이 무리하게 부채를 끌어 파주에 대형 공장을 짓다가 98년 구제금융 위기를 맞아 워크아웃 기업이 되었다.

그러자 노동자들은 회사를 살리기 위해 상여금 300% 반납, 퇴직금 누진제 폐지, 호봉승급 6개월분 반납, 주택자금 등 복지제도 중단 등의 고통분담에 동의했다. 그리고 서울 염창동 공장 부지를 팔아서 회사 빚을 갚고 파주공장으로 이전하자는 회사 계획에 따라 파주공장으로 옮겨 계속 고용을 하기로 회사 쪽과 99년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2000년 워크아웃을 조기 졸업한 ‘모범생’이 된 회사를 채권은행이 나서 영풍그룹에 매각한 뒤 문제가 생겼다. 회사가 노조와의 협약을 무시하고 안산으로의 공장 이전을 발표한 것이다. 그러나 생활근거지가 대부분 서울공장 근처이고, 밤 10시나 새벽 6시에 교대하는 근로조건에서 가사·육아를 책임지고 있는 여성 노동자들은 출퇴근 시간만 하루 3시간 넘게 걸리는 안산공장 이전이 사실상 정리해고나 다름없다고 받아들였다.

게다가 노조가 2001년 5월 입수한 투자계획서에서 파주공장에는 300억원의 투자계획이 잡혀 있지만 안산공장에는 투자계획이 전혀 없는 것이 확인됐다. 회사의 주력인 파주공장은 현재 생산직 450여명 모두 시그네틱스가 99.7%의 주식을 가진 하청회사 STI에 소속돼 간접고용 용역직으로 일하고 있고, 지난해 12월과 올해 2월에도 인력업체를 통해 용역직을 계속 충원하는 광고를 냈다.

이 때문에 노조는 회사가 생산능력도 거의 없는 안산공장으로의 이전을 발표한 것은 서울공장의 노조를 깨고 기혼여성 장기 근속자들을 정리해고하려는 조치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 영풍그룹은 “그룹은 책임이 없으며 시그네틱스 양수재 사장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또 양 사장은 “인사권은 사장의 권한인데 무조건 가라면 가는 것”이라는 입장을 바꾸지 않고 있다.

용역깡패의 가혹한 린치

파업은 노조원들에게 가혹했다. 서울공장에서 철야농성을 하던 지난해 8월9일 새벽에는 100여명의 용역깡패들이 들어와 노조원들을 폭행하고 성추행했다. 올해 2월에는 회사가 30여명의 아이들이 다니던 직장 어린이집을 두번에 걸쳐 완전히 부숴버렸다. 업무방해 등의 혐의로 노조 간부 6명에게 체포영장이 발부됐고, 조합원 91명이 재산을 가압류당했다. 4월2일에는 채권단인 산업은행 앞에서 항의농성을 벌이다 연행된 여성 노조원 가운데 7명이 구로경찰서에서 알몸수색을 당하기도 했다.

농성 시작 이튿날 오전 경찰이 노조원들을 해산시키려 하자 아치 위에 있던 이들은 “노조원들을 다치게 하면 뛰어내릴 것”이라고 절규했다. 결국 경찰이 영풍그룹에 연락해 회사가 6월1일 면담을 약속하고서야 내려온 이들은 용산경찰서로 곧장 연행됐다. 아치 위 농성 시작 21시간 만이었다. 영풍그룹 쪽은 약속한 면담일에 처음으로 얼굴을 내비쳤다. 그러나 그룹 쪽은 똑같은 말만 되풀이했고, 노동자들의 파업도 기약 없이 계속되고 있다. 그 사이 지구촌 축제는 막이 올랐다.

박민희 기자/ 한겨레 민권사회1부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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