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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밟힌 자는 아프다고 소리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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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6-0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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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운동의 개척자이자 여성신학운동의 선구자인 이우정 선생이 선택한 가시밭길

1960년대 초반 어느 날 밤 한국신학대학(한신대 전신) 여자기숙사. 저녁 6시가 지나면 남녀 학생들의 만남이 엄격히 금지되던 때다. 기숙사 사감인 이우정 교수는 복도를 지나가다 한 학생의 방 앞에서 남자 구두를 발견했다. 현관 쪽에서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그는 구두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다른 교수가 볼새라 옷 안에 감추고 나와 풀숲에 던졌다. 그의 성격의 일면을 엿보게 하는 일화다. 다정다감한 이우정 사감 밑에서 성장한 학생들은 그 뒤로 민주화운동, 여성신학운동, 여성운동 전반에서 그의 든든한 동반자가 되었다.

유교적 훈육의 그늘 속에서

사진/ 1975년 기장여신도회 전국연합회 총회에서. 나이 쉰줄에 투사로 거듭난 그는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여성신학 운동, 여성해방 운동을 펼치기 시작한다.
지난 5월30일 향년 79살로 타계한 이우정 선생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대병원 영안실에는 많은 후학과 후배들이 고인의 자리를 지켰다. 검은 상복의 여성들은 저마다 보랏빛 수건을 목에 두르고 고인의 뜻을 기리는 추모식을 올렸다. 고난과 박해를 뜻하는 보랏빛은 이우정 선생이 80평생 이어온 여성·평화운동의 상징이기도 하다.


한국 여성운동의 개척자이자 여성신학운동의 선구자인 이우정 선생의 삶은 한편의 역사소설과도 같다. 1923년 경기도 포천에서 <자유종>의 작가 이해조의 손녀딸로 태어난 그는 경기여고를 졸업할 때까지 부친의 엄격한 유교적 훈육과 조부의 자유주의적 기질 사이를 오가며 자란다. 그의 성장기는 일제 강점기 아래 놓인 한국 사회의 정신적 혼란을 그대로 비춘다. 아흔아홉칸 대갓집이던 가문의 배경은 그에게 특권의식을 심어줬지만 여고를 졸업하던 날 아버지가 들고온 사주단지는 그에게 여성으로서의 억압을 절감하게 했다. 가출까지 감행하며 반항한 결과 결혼은 안 할 수 있었지만, 부친은 딸의 이름을 동적부에서 지워버린다.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때라 결혼하지 않으면 정신대로 끌려갈 판이기도 했다.

일제 말기 암울한 상황에서 그는 친구의 권유로 교회에 나간다. 그곳에서 눈에 비늘이 떼이는 체험을 한다. 광화문 종로교회에서 변홍규 목사의 설교를 들으며 민족애와 신앙심을 키우던 그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학도의 길을 걷는다. 조선신학교(한신대 전신) 시절만 해도 그는 땅만 보고 걸어다닐 정도로 ‘여자는 말없이 얌전해야 한다’는 유교적 훈육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1951년 부산 피난살이 속에서 학업을 마친 그는 캐나다 토론토 대학에서 유학생활을 한 뒤 한국신학대학의 전임강사로 부임한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지만 그는 독신주의자는 아니었다. ‘결혼을 위한 결혼은 하지 않는다’는 결혼관을 지킨 것뿐이다. 제자들이 ‘누가누가 선생님 좋아하는 것 같다’고 짓궂게 굴면 “그 남자는 다 좋은데 낭만이 없어서…”라고 말하며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 낭만적인 사람을 만날 일이 왜 없겠는가. 그러나 한국 현대사가 숨가쁘게 전개되는 동안 그는 자신의 정열과 에너지를 온통 역사를 직조하는 데 바친다.

1970년 학내분쟁 속에서 교수전원사퇴라는 초유의 상황에 휘말린 이우정 선생은 결국 17년간 일한 학교를 떠났다. 그는 학교를 떠나며 제자들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내가 낯가림이 심해서 강의하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온몸이 빼빼 마를 지경이었다.” 1993년 후학들이 펴낸 고희기념문집 <여성·평화·생명>은 그의 교수시절을 두고 “유교의 가부장적 여성윤리는 이우정의 삶 깊숙이 침윤돼 오래도록 그의 인간적 능력을 제한하고 있었다”고 적었다.

재야운동의 ‘스페어 타이어’

교수직을 떠날 때 그는 나이 쉰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사람들은 소극적이던 그를 기장여신도회 전국연합회로 불러낸다. 당시 여신도회는 기장총회에 여목사제를 요구하고 신학교에 여학생을 위한 교과과정을 설치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여성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현실을 바꿔나가는 ‘운동의 힘’을 목격한 소중한 기간이었다. 1973년 한국교회여성연합회 회장직을 맡은 이우정 선생은 공포정치상황을 역류해가며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외화획득의 명분 아래 관광기생으로 전락해가던 가난한 여성들, 수출역군이라는 팡파르 속에서 혹사당하던 어린 노동자들, 청계천·중랑천변의 철거민들, 유신철폐를 부르짖다 구속·수배·투옥·살해당하던 사람들에게 교회여성연합회를 안식처로 개방하고 발이 부르트도록 인권유린의 현장을 찾아 누볐다. 이때의 운동은 한국교회여성운동의 진로를 바꿔놓았고, 자신의 삶 역시 바꿔놓았다. 1974년 그는 서울여대 교수로 초빙된다. 그러나 그의 활동은 당국을 자극해, 결국 교수재임용제의 칼날 위에 서게 된다. 운동을 할 것인가, 강단에 설 것인가. 선택을 강요받던 그는 주저없이 학교를 떠난다. “교수직을 찾는 사람은 많지만, 고난의 현장을 찾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게 그 이유였다.

늦깎이 운동가에서 본격적인 투사로 거듭난 그는 1976년 3월1일 명동성당기도회에 참여해 ‘3·1 민주구국선언’을 낭독하기에 이른다. 그날 밤 11시 형사들에게 끌려간 그는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죄로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을 선고받았으나 형집행정지처분으로 풀려난다. 세계 각국의 여성들이 들고일어나 당국을 압박한 결과였다. 그 뒤부터 이우정 선생은 동일방직사건·원풍모방사건·YH무역사건 등 여성 노동자들의 처절한 투쟁에 줄곧 함께했다. 그의 빈소에 내로라 하는 유명인의 추모 리본이 걸려 있었지만, 가장 눈에 띄는 곳에는 살인적인 여성노동 착취의 시절 그와 동고동락한 여성 노동자들이 보낸 리본이 걸려 있었다.

80년 신군부의 등장으로 잠깐 복직한 서울여대에서 다시 해직당한 이우정 선생은 여성운동·여성신학운동에 두팔을 걷어붙이기 시작했다. 그는 주류 신학의 남성중심주의, 강자지배논리, 서구중심주의 그리고 추상적 사변주의를 비판하고 거부했다. 또한 추상적인 ‘민중’이라는 말 대신 체험적인 ‘밟힌 자’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 가난한 여성은 그에겐 가장 ‘짓밟힌 자’였다. “밟는 자는 밟힌 자의 아픔을 모른다. 그러므로 밟힌 자는 아프다고 소리를 질러야 한다”는 게 그의 소신이었다. 80년대 내내 그를 따라다니던 별명은 ‘스페어 타이어’. 남성 지도자들이 붙들리거나 위험을 피해 숨으면 단체활동은 마비되곤 했다. 그럴 때면 남성들은 여성이고 미혼인 이우정 선생에게 모든 ‘대책위’의 일을 떠맡겼다. 그는 그 짐을 그대로 짊어졌고, 세월이 좋아지면 그 자리를 다시 남성들에게 내주고 돌아섰다. 이런 경험은 87년 20여개의 진보적 여성단체들을 묶은 한국여성단체연합 결성에 큰 힘이 됐다. 여연의 초대회장을 역임한 그는 기독교 단체에서도 ‘여성의 몫’을 외치며 대표직을 수행하고 후배들을 키우기 시작한다.

여성이 정치를 정화시켜야

사진/ 6월3일 서울 수유리 한신대 교정을 돌아나가는 이우정 선생 운구행렬. 한국여신학자협의회 총무 등 많은 후학들이 보랏빛 수건을 목에 두른 채 그의 마지막 길을 지켰다. (김종수 기자)
90년대 들어 그의 활동은 평화통일 운동에 집중된다. 91년 서울에서 남북여성모임을 성사시켜 세계인을 놀라게 한 그는 이듬해 평양에서의 남북여성모임도 성공적으로 치렀다. 민족의 하나됨과 평화에 대한 바람은 노년에 접어든 그가 마지막 불꽃을 사른 일이었다. 나이 칠순에 그는 또 다른 시험무대로 자신을 던진다. 92년 총선에서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됐을 때 그에게는 자산총액 1300만원인 ‘무공해 정치인’이라는 수사가 따랐다. 그러나 남성들의 독무대인 정치판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가 정치 안에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 정치 밖에서도 그를 보는 시선은 전과 달라져 있었다. 돈과 조직을 갖지 못한 그는 한국 여성의 최대 취약점이 정치적 열세임을 절감하고 여성할당제의 깃발을 높이 든다. 정치인으로서의 삶은 그의 몸에 밴 신앙적 윤리와 갈등을 일으켰지만 그는 “정치는 호흡하는 공기와 같다. 그 공기를 정화하려면 더 많은 여성이 참여해야 한다”는 지론 속에서 계속 ‘버텼다’.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김윤옥 공동대표는 “선생은 선택의 순간마다 가시밭길을 택했다”고 회상한다. “당신은 왜 갈등과 번민이 없겠는가. 팔순 기념으로 자서전을 쓰라고 우리들이 그렇게 청했건만 계속 현장을 찾아 움직이셨다. 선생의 삶을 정리하는 일은 남은 사람들의 몫인 것 같다.” 꿈꾸던 세상은 열리지 않았고 싸우던 일들은 매듭지어지지 않았기 때문일까. 어쩌면 그는 삶의 마침표를 쉽게 찍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남 힘들지 않게 어느 날 훌쩍 가고 싶다”던 평소의 바람대로 이해동 목사 등 지인들과 함께 식사하던 자리에서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이우정 선생은 이틀 만에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식사자리에서 그는 자신이 몸담고 있던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의 과제와 언론에 대한 아쉬움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한자 이름처럼 어리석을만치(愚) 곧은(貞) 태도를 지켜왔다. 그의 평생을 밀고온 힘은 어쩌면 단순한 원칙인지 모른다. 자신이 경험하고 느낀 걸 그대로 실천하는 삶. 그런 그를 기리며 후학들은 사회장으로 그를 떠나보냈다. 여성운동 1세대로서 그의 평생 동지기도 한 이효재 선생은 6월3일 서울 수유리 한신대 교정에서 열린 장례식에 이런 영결사를 보냈다. “우리는 온화하면서도 강인했던 당신의 모든 것을 이어가렵니다. 당신은 당신이 필요한 모든 일에 몸과 마음과 혼을 바쳐 사셨기에 우리는 무거운 장송곡이 아닌 환송의 노래 속에서 이별을 고하고자 합니다.”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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