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 원조’의 비극적 최후
등록 : 2002-06-05 00:00 수정 :
20세기 최고의 스파이로 불린
시드니 라일리(1874∼1925)가 옛 소련 비밀경찰에 살해당했다고 영국정보부(MI5)가 최근 공개한 비밀서류에서 밝혔다. 소련으로 잠입하다 사라진 그의 죽음에 대한 온갖 이견이 있었으나 영국이 소련 살해설을 공식 확인한 것이다.
살인면허를 갖고 있던 라일리는 영화 <007> 시리즈의 주인공 ‘제임스 본드’에 가장 가까운 실제 인물로 여겨졌다. 러시아의 오데사에서 유대인 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의 본명은 지그문트 로젠블룸이었지만 M15에 채용돼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전 독일군 최고사령부에 침투한 그는 영국의 가장 중요한 비밀요원이었고, 여성과의 염문으로 유명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경찰 자료에 따르면 라일리는 최소한 6명의 여성과 결혼했다. 자신과 염문을 뿌린 여성의 남편을 항상 갖고 다니던 독약과 무기로 살해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사업가로 귀족행세를 했고, 러시아 비밀경찰인 ‘체카’의 고위 관리와 친분이 있는 것으로 꾸미기도 했다.
라일리의 임무 가운데 하나는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이끈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을 암살하고 사회주의 정권을 전복하는 일이었다. M15는 1918년 그를 소련으로 보냈고,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반혁명을 일으켜 레닌을 감금해 살해하려고 했다. 자신은 소련의 지도자가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의 야심은 수포로 돌아갔다. 유대계 여성인 도라 카플란이 연설하던 레닌을 저격했지만 레닌은 죽지 않았다. 이는 라일리가 꾸민 일이 아니었지만 그는 핀란드로 도망쳐야 했다.
25년 핀란드 장교의 도움을 받아 금과 예술품 밀매업자들과 함께 다시 소련으로 잠입할 수 있었지만 비밀경찰은 이를 알고 있었다. 경찰은 그를 감옥에 집어넣고 소련을 위한 이중간첩 일을 시키려 심문하고, 협박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자 한적한 숲에서 살해했다.
라일리의 스파이 활동은 지난 83년과 84년 영국과 미국에서 <라일리, 최고의 스파이>라는 텔레비전 미니시리즈로 방영됐다.
황상철 기자/ 한겨레 국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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