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 우리 사회가 미국과 서구 열강의 힘에 압도당하기 시작한 이래 줄기차게 키워온 ‘서구적 부국강병’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기형적으로 획일화된 풍토에서는 ‘다름의 공존’이란 불가능하다.
‘문화간 교배’가 화두로 떠오르는 지구화 시대의 열풍에 우리 사회도 휩싸였다. 국경을 넘어서는 다양한 형태의 교류가 급증하고 이와 함께 TV에서도 외국문화를 소개하는 프로그램들이 꾸준히 늘어나면서 이제 외국의 다양한 풍물들도 마냥 낯설지만은 않게 되었다. 또한 (잊을 만하면 다시 불거지는 ‘보신탕’ 논란의 교육적 효과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각 민족 나름의 고유한 문화적 잣대를 존중해야 한다는 문화상대주의적 태도도 점차 일반화되어 가는 듯하다. 같은 맥락에서 이번 월드컵을 세계 여러 민족들이 서로의 차이를 넘어 한데 어우러져 화합하는 평화의 축제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들에도 자주 접한다. 이러한 일련의 현상들은 이제 우리 사회에도 다양한 ‘차이’에 대한 관용의 태도가 점차 자리잡아간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일까?
원주민 여성의 가슴은 가슴이 아닌가
이 질문에 거리낌없이 “그렇다”라고 대답하기엔 석연찮은 점들이 너무 많다. 외국의 풍물을 소개하는 TV 프로그램들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대부분의 방송에서 아프리카나 라틴아메리카의 부족사회를 소개할 때 원주민 여성들의 노출된 가슴은 아무런 여과 없이 방영한다. 이에 대해 까다롭기로 소문난 우리나라의 방송위원회는 어떤 제재도 가하지 않으며, 또 대부분의 시청자들도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이런 현상은 프로그램 제작자와 방송위원회 위원들, 또 일반 시청자들이 문화상대주의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왜 서구사회의 백인 누드 캠프를 소개하는 TV 프로그램에서는 ‘그들’에겐 자연스러운 여성의 가슴 노출이 일괄적으로 ‘모자이크’ 처리되어 방영되는 것일까? 노출의 여과 없는 방영이 그 사회의 풍습에 대한 존중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하체의 완전한 노출은 그 사회의 풍습에 관계없이 그대로 방영되는 경우가 없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이러한 현상들은 서구가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며 퍼뜨린 문화적·인종적 편견을 그대로 받아들여 내면화한 우리 사회의 차별적 시선이 빚어낸 일이기 쉽다. 즉 ‘문화적으로 미개’한 ‘오지’에 사는 ‘인종적으로 열등’한 ‘흑인’ 여성들은 ‘흰 피부’를 지닌 ‘문명국’의 성원들에게는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성적인 존재로서의 위엄과 가치조차 제대로 부여받지 못한다. 이러한 관점을 내면화하게 되면, 백인 여성과 원주민 여성을 다르게 다루는 방송 카메라의 차별적 응시는 특별한 주의를 끌지 못한다. 우리가 문화상대주의에 ‘원칙적’으로 동의한다고 해서 우리 안에 내면화되어 있는 문화적·인종적 편견들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우리도 서구의 제국주의적 팽창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지금 우리가 비서구 민족에 대해 지니는 서구의 차별적 시선을 내면화하여 이를 토대로 흑인들을 차별한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예를 들면 백인들이 피부색의 차이를 근거로 우리를 열등한 존재로 규정하려 할 때, 우리가 주체로서의 자긍심을 지키기 위한 대응방식은 흑인들과 같은 입장에 서서 “별 희한한 얘기 다 듣네” 하고 코웃음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보이는 모습은 그러한 백인들의 규정에 반발하지 못하고 풀 죽어 있다가 갑자기 뒤돌아 흑인들을 향해 득의에 찬 미소를 띠며 “너희들은 우리보다 더 열등하대” 하는 형국이 아닌가. 스스로와 남을 비하하는 이러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는 문화적 공존의 시대를 주체적으로 준비해야 한다. 서구적 부국강병에 대한 강박관념 이를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 우리 사회가 미국과 서구 열강의 힘에 압도당하기 시작한 이래 줄기차게 키워온 ‘서구적 부국강병’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 다양한 가치를 존중하고 키워나가야 한다. 분단 체제하에서 ‘선진조국’에 대한 강박관념은 일사불란한 국민동원 체제와 결합해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구현하도록 우리를 추동했다. 우리 사회의 정치·교육·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다른 목소리를 낸다는 것 자체가 불경시될 만큼 극도로 획일적인 문화적 풍토를 낳았다. 이렇게 기형적으로 획일화된 풍토에서는 세계화 시대의 화두인 ‘다름의 공존’이란 불가능하다. 모든 차이는 수평적 관계 속에서 공존하지 못하고 획일적인 잣대의 수직적 눈금을 따라 위계적으로 배열된다. 이때 차이는 곧 차별의 근거로 전환되게 마련이다. 이러한 우리의 인식이 변하지 않고도 우리보다 못살고 우리보다 피부색이 짙은 민족의 문화에 대한 관용과 존중의 태도가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사진/ 정진웅 ㅣ 성공회대 강사·문화인류학
그렇다면 왜 서구사회의 백인 누드 캠프를 소개하는 TV 프로그램에서는 ‘그들’에겐 자연스러운 여성의 가슴 노출이 일괄적으로 ‘모자이크’ 처리되어 방영되는 것일까? 노출의 여과 없는 방영이 그 사회의 풍습에 대한 존중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하체의 완전한 노출은 그 사회의 풍습에 관계없이 그대로 방영되는 경우가 없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이러한 현상들은 서구가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며 퍼뜨린 문화적·인종적 편견을 그대로 받아들여 내면화한 우리 사회의 차별적 시선이 빚어낸 일이기 쉽다. 즉 ‘문화적으로 미개’한 ‘오지’에 사는 ‘인종적으로 열등’한 ‘흑인’ 여성들은 ‘흰 피부’를 지닌 ‘문명국’의 성원들에게는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성적인 존재로서의 위엄과 가치조차 제대로 부여받지 못한다. 이러한 관점을 내면화하게 되면, 백인 여성과 원주민 여성을 다르게 다루는 방송 카메라의 차별적 응시는 특별한 주의를 끌지 못한다. 우리가 문화상대주의에 ‘원칙적’으로 동의한다고 해서 우리 안에 내면화되어 있는 문화적·인종적 편견들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우리도 서구의 제국주의적 팽창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지금 우리가 비서구 민족에 대해 지니는 서구의 차별적 시선을 내면화하여 이를 토대로 흑인들을 차별한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예를 들면 백인들이 피부색의 차이를 근거로 우리를 열등한 존재로 규정하려 할 때, 우리가 주체로서의 자긍심을 지키기 위한 대응방식은 흑인들과 같은 입장에 서서 “별 희한한 얘기 다 듣네” 하고 코웃음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보이는 모습은 그러한 백인들의 규정에 반발하지 못하고 풀 죽어 있다가 갑자기 뒤돌아 흑인들을 향해 득의에 찬 미소를 띠며 “너희들은 우리보다 더 열등하대” 하는 형국이 아닌가. 스스로와 남을 비하하는 이러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는 문화적 공존의 시대를 주체적으로 준비해야 한다. 서구적 부국강병에 대한 강박관념 이를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 우리 사회가 미국과 서구 열강의 힘에 압도당하기 시작한 이래 줄기차게 키워온 ‘서구적 부국강병’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 다양한 가치를 존중하고 키워나가야 한다. 분단 체제하에서 ‘선진조국’에 대한 강박관념은 일사불란한 국민동원 체제와 결합해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구현하도록 우리를 추동했다. 우리 사회의 정치·교육·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다른 목소리를 낸다는 것 자체가 불경시될 만큼 극도로 획일적인 문화적 풍토를 낳았다. 이렇게 기형적으로 획일화된 풍토에서는 세계화 시대의 화두인 ‘다름의 공존’이란 불가능하다. 모든 차이는 수평적 관계 속에서 공존하지 못하고 획일적인 잣대의 수직적 눈금을 따라 위계적으로 배열된다. 이때 차이는 곧 차별의 근거로 전환되게 마련이다. 이러한 우리의 인식이 변하지 않고도 우리보다 못살고 우리보다 피부색이 짙은 민족의 문화에 대한 관용과 존중의 태도가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