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안-태평양계 인권재단’ 만들고 할머니들과 함께 싸우는 교포청년 김도현
그의 이름은 김도현이다. 나이는 스물넷이다. 친구들은 그를 디케이(DK)라고 부른다. 어눌하게 한국말을 할 줄 알고 맞춤법은 틀리지만 한글도 쓸 줄 안다.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태어나 줄곧 그곳에서 자란 디케이는 탬파시에서 금융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이민 1세대인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28년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한다. 아버지는 조경사업을 하고, 어머니는 채소가게를 경영한다.
가슴을 떨게 한 할머니들의 증언
디케이는 코리안-어메리칸인 부모와는 달리 어메리칸-코리안이다. 부모는 한국사람으로 미국에서 살고 있지만 그는 미국인으로서 한국인 부모와 산다. 그러나 그는 자기 유전자 속에 한국인의 집단 무의식이 전해져 내려온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으면 일본군 강제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의 증언에 가슴을 떨며 눈물을 쏟아내지 못했으리라.
“군인들이 왔다. 한명씩 부르면 방으로 들어가야 했다. 칼로 옷을 찢고 성폭행을 했다. 반항을 하면 사정없이 때렸다. 주말이면 20∼30명을 상대해야 했다. 너무 아팠고, 너무 배가 고팠다.” 무대 위에서 절절한 증언이 쏟아져나왔다. 5월17일 미국 플로리다주 탬파시의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숨겨진 진실: 2002년과 정신대 문제’ 행사장이다. 한국 나눔의집에서 초청된 이옥선 할머니가 16살에 중국 옌볜의 위안소에 끌려가 겪은 일을 증언하고 있다. 미국인 반, 한국인 반인 500여명의 방청객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듣는다. 무대 위에는 성노예로 끌려가 맞아죽고, 굶어죽고, 총살당한 여성들의 넋을 기리는 노란 장미가 한아름 놓여 있다. 할머니의 증언이 끝나자 사회를 맡은 지역방송의 중국계 앵커가 행사를 주관한 한 청년을 불렀다. 디케이 김도현씨였다. 그는 “위안부 문제는 한·일간의 과거사 문제만이 아니라 전 세계 양심과 인권의 문제”라며 “산 증인인 할머니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하루빨리 제대로 해결됐으면 한다”고 짧은 소회를 말했다. 92년 워싱턴에서 정신대문제대책위원회가 결성된 이래 98년 6월 연방의원회관 전시회를 시작으로 미국 곳곳에서 일본군 강제위안부(Comfort Women)의 참상을 고발하는 순회 전시회가 열렸다. 일본 쪽의 전 방위적인 방해로 행사가 무산되는 일이 많았고, 그나마 가능한 개최 장소는 대학 캠퍼스였다. 이번 행사는 민간단체가 대중적인 공간에서 최초로 위안부 관련행사를 열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이 민간단체는 디케이가 세운 아시안-태평양계 인권재단(APAAF·Asian/Pacific American Awareness Foundation of Tampa Bay·www.apaaf.org)이다. 현지의 반응도 뜨거웠다. 탬파시장은 행사가 열린 5월17일을 ‘위안부의 날’로 공표했다. 방송은 30분짜리 특집물을 내보내고 신문은 주요 기획뉴스로 위안부 문제를 다뤘다. 스물네살의 젊은이가 이 모든 일을 해냈다는 사실에 교포사회는 술렁이고 있다. 단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일…
이날 행사장에는 미국 전역에서 찾아온 한국계 젊은이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이들은 로스앤젤레스-워싱턴-조지아-탬파를 잇는 네트워크를 통해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여론형성 작업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들은 저마다 다른 정서와 경험이 있다. 디케이와 함께 탬파시에서 행사를 준비한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김선영(20)씨는 대학 생물학과 3학년이고, 정광진(27)씨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다. 두 사람은 교포 2세대다. 제니(29)는 대학 여성학부 조교이고 한국에서 입양됐다. 하지만 이들은 위안부 문제에 충격을 받고 행동에 나섰다는 공통점이 있다.
고교시절부터 여러 과외활동에 두각을 나타낸 디케이는 대학에 들어가서 아시안계 학생대표를 했다. 조직력과 추진력이 뛰어난 이 청년은 98년 3월 스탠퍼드대학에서 열린 전미주한인학생총회에 참석했다가 인생을 뒤바꾸는 경험을 한다. 위안부 출신 김윤심 할머니의 증언을 들은 것이다. “저는 계속 울었어요. 다른 참석자들도 모두 울었어요. 단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일이었어요.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배상은커녕 사과도 하지 않았고, 우리 정부는 가만히 있다는 게 놀라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뭔가가 있을 것 같았고, 꼭 그것을 해야 할 것 같았어요.”
2000년 학교를 마친 디케이는 이듬해 한국을 찾았다. 9개월간 연세대 어학당에서 한국말을 배웠다. 한국에서 온갖 아르바이트를 한 그는 새음반 출시 라디오 광고에 출연한 것을 가장 인상적인 일로 꼽는다. 목소리를 굵고 낮게 깔며 근사한 영어 멘트를 날리는 일이었다. 재미있는 일은 많았지만 한국은 ‘미국 플로리다 사람’인 그가 살기에 너무 추웠고 낯설었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금융 컨설팅 일을 시작한 디케이는 내내 “해야 할 숙제를 못한 기분”이었다고 한다. 위안부 할머니의 육성이 자꾸 가슴을 쳤기 때문이다. 증언을 들은 뒤 꼭 2년이 된 지난해 7월 드디어 일을 벌였다. “금융 컨설팅일은 미뤘다 할 수 있지만 위안부 문제는 서둘러야죠. 생존자들이 한분 두분 돌아가시잖아요. 제가 모든 걸 할 수는 없지만 시작은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증언회든 전시회든 여러 곳으로 번지면 위안부·강제징용 피해보상 소송에 힘이 실릴 것이라고 디케이는 생각한다. 미국은 배심원 재판의 특성상 여론이 재판 결과에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나치 피해자들이 독일기업을 상대로 집단소송을 제기해 70억달러에 이르는 배상금 조성에 합의했던 데에도 미국과 전 세계의 여론이 큰 영향을 끼쳤다. 독일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져 독일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이 번질 태세였다. 결국 99년 말 독일정부와 기업이 반반씩 배상금을 부담했고, ‘기억·책임·미래’ 재단은 이 기금을 피해보상과 역사교육에 값지게 쓰고 있다.
99년부터 미연방의 외국인불법행위배상청구법과 캘리포니아주의 징용배상특별법에 따라 제기된 위안부·강제징용 피해자의 집단소송은 소송기각이라는 험난한 산을 어렵게 통과하고 있다. 황금주 할머니를 대표 원고로 한 위안부 소송의 경우 9·11 테러 직후인 지난해 10월4일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한 미국 행정부의 개입으로 결국 기각됐다. 현재 한국-미국-일본의 인권단체들은 항소심 법정에 “피해자들이 법에 호소하고 가해자들을 법정에 세울 기회를 빼앗지 말라”며 법정 조언서를 내고 있다.
“한국사람이 가장 힘들게 했어요”
“탬파시에는 한국사람들이 1만3천명쯤 사는데, 맨주먹 하나로 남부땅을 개척한 분들이죠. 그런데 이상해요. 필리핀회관도 있고 중국회관도 있는데 한국회관은 없어요. 한국사람들 잘 못 뭉친다는 얘기를 많이 하는데, 뭉칠 일을 안 해봤기 때문이 아닐까요.” APAAF 설립과 위안부 증언회를 앞두고 디케이를 가장 힘들게 한 사람은 아시안 상공회의소에서 일하는 한 한국인이었다. 그는 일본 쪽 인사들이 위안부 관련행사를 방해한 것처럼 집요하게 행사를 무산시키려 했다. “장소 대관부터 언론접촉에 이르기까지 너무 힘들었어요. 일본 영사와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왜 그렇게까지 방해했는지 알 수 없어요. 하지만 방해공작은 맞서 싸우면 돼요. 더 무서운 것은 무관심이에요.”
디케이가 ‘맨땅에 헤딩하듯’ 모은 APAAF의 기금 가운데 85%는 미국인과 미국기업이 낸 것이다. 한국사람들의 후원은 10% 정도에 그쳤다. 물론 이 단체는 범아시안계를 아우르는 단체다. 디케이는 공통의 역사적 체험을 한 아시안계는 함께 할 일이 많다고 여긴다. 위안부 소송에 한국과 중국, 필리핀, 대만의 피해자들이 공동원고인 것처럼 말이다. “미국도 올해가 지방선거의 철이거든요. 한국계뿐만 아니라 아시안계는 수로도 무시 못할 유권자인데 투표를 잘 안 해요. 그러니까 정치인들이 등한시하는 것 같아요. 영어를 잘 몰라서 투표를 못하는 어르신들도 적지 않아요. 자원봉사자들을 모아 영어를 가르치고 투표참여를 홍보할 생각입니다.”
‘로비의 나라’ 미국에서는 정계와 의회에 꾸준히 압력을 넣어야 소수자의 권익도 인권을 바로세우는 작업도 가능하다. 디케이는 위안부 소송의 승리를 일본과 결탁한 미국 주류사회를 흔들 정치적 행동으로 본다. “올해가 한국인의 미국 이민 100주년이 되는 해에요. 오늘은 내일의 과거라는 말이 있잖아요. 부모님들은 먹고살기 힘들어서 역사와 인권문제에 끼어들지 못했다고 치더라도 그 자식들은 왜 가만히 있었는지 나중에 후손들이 물을 때 대답할 말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교포청년 디케이의 꿈은 “아시안계 친구들과 함께 조급하지 않게 그러나 꼭 이기는 싸움을 하겠다”는 것이다.
미국 플로리다 템파=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사진/ 위안부 사진전시장 앞에 선 교포청년 디케이. 5월17일 하룻동안 모두 1600여명이 전시장을 둘러보았고, 탬파 시장은 이 날을 위안부의 날로 선포했다.

사진/ 나눔의집 대표로 참석한 이옥선 할머니의 증언이 있었다. 미국 각지에서 온 한국계 젊은이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군인들이 왔다. 한명씩 부르면 방으로 들어가야 했다. 칼로 옷을 찢고 성폭행을 했다. 반항을 하면 사정없이 때렸다. 주말이면 20∼30명을 상대해야 했다. 너무 아팠고, 너무 배가 고팠다.” 무대 위에서 절절한 증언이 쏟아져나왔다. 5월17일 미국 플로리다주 탬파시의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숨겨진 진실: 2002년과 정신대 문제’ 행사장이다. 한국 나눔의집에서 초청된 이옥선 할머니가 16살에 중국 옌볜의 위안소에 끌려가 겪은 일을 증언하고 있다. 미국인 반, 한국인 반인 500여명의 방청객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듣는다. 무대 위에는 성노예로 끌려가 맞아죽고, 굶어죽고, 총살당한 여성들의 넋을 기리는 노란 장미가 한아름 놓여 있다. 할머니의 증언이 끝나자 사회를 맡은 지역방송의 중국계 앵커가 행사를 주관한 한 청년을 불렀다. 디케이 김도현씨였다. 그는 “위안부 문제는 한·일간의 과거사 문제만이 아니라 전 세계 양심과 인권의 문제”라며 “산 증인인 할머니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하루빨리 제대로 해결됐으면 한다”고 짧은 소회를 말했다. 92년 워싱턴에서 정신대문제대책위원회가 결성된 이래 98년 6월 연방의원회관 전시회를 시작으로 미국 곳곳에서 일본군 강제위안부(Comfort Women)의 참상을 고발하는 순회 전시회가 열렸다. 일본 쪽의 전 방위적인 방해로 행사가 무산되는 일이 많았고, 그나마 가능한 개최 장소는 대학 캠퍼스였다. 이번 행사는 민간단체가 대중적인 공간에서 최초로 위안부 관련행사를 열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이 민간단체는 디케이가 세운 아시안-태평양계 인권재단(APAAF·Asian/Pacific American Awareness Foundation of Tampa Bay·www.apaaf.org)이다. 현지의 반응도 뜨거웠다. 탬파시장은 행사가 열린 5월17일을 ‘위안부의 날’로 공표했다. 방송은 30분짜리 특집물을 내보내고 신문은 주요 기획뉴스로 위안부 문제를 다뤘다. 스물네살의 젊은이가 이 모든 일을 해냈다는 사실에 교포사회는 술렁이고 있다. 단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일…

사진/ 디케이 김도현씨와 함께 언론홍보에서 의회로비까지 치밀하게 행사를 준비한 한국계 청년들. 왼쪽부터 디케이, 제니, 정광진, 김선영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