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모 김교신 함석헌 그리고 서영훈
등록 : 2002-05-22 00:00 수정 :
서영훈(80) 대한적십자사 총재. 그가 아무리 바빠도 매주 한번도 거르지 않고 발길을 옮기는 곳이 있다.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15일 저녁에도 그는 공식적인 업무를 끝내자마자 다른 일정을 일찌감치 접고 어김없이 이곳을 찾았다. 장충동 먹자골목 비탈길에 자리잡은 ‘공동선아카데미’. 그는 여기서 젊은이들을 상대로 동서양 철학과 사상을 가르쳐왔다. 벌써 8년째다. 지난해 10월부터는 <성경>(신·구약) <논어> <중용>을 끝내고 지금은 노자의 <도덕경>을 설파하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폼나는 정규학교 졸업장 하나 따지 못했다. 그의 지식들은 대개 독학으로 일궈낸 것들이다. 올해 팔순이 되었지만 카랑카랑한 그의 목소리는 30대 청년 못지않게 우렁차다. 노자의 <도덕경> 가운데 25장 ‘근원으로서의 도(道)’라는 부제가 달린 한자성어를 거침없이 풀어나갈 때는 무아지경에 빠진 듯 눈을 지그시 감는 모습이 마치 시를 외우는 문학소년을 연상케 한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습니다.” 한국방송공사 사장, 새천년민주당 대표 등을 거쳐 지금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맡고 있는 그의 화려한 이력과는 사뭇 대조적인 모습이다.
그의 소원은 이 땅에 ‘공동선’을 실현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일꾼을 길러내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새로운 일꾼은, 모든 생명 공동체의 질서와 가치를 존중하는 사람, 참되고 선한 인간성과 인간 본연의 도덕성을 회복하며 인류가 더불어 사는 삶을 일궈내는 사람이다. ‘공동선아카데미’는 이런 새로운 일꾼을 길러내는 일종의 사관학교인 셈이다. 그는 지금까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단체들과 직·간접적으로 인연을 맺어 왔다. 하지만 이 학교만큼 애착이 가지는 않았다.
서 총재가 함석헌 선생에게서 현대 한국사상의 맥을 이은 몇 안 되는 수제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공동선아카데미를 거쳐간 그의 제자들은 얼마 전 서 총재의 철학과 사상을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며 평소 글들을 모아 <평화의 계단>이란 책으로 펴냈다. 서 총재는 이 책을 통해 동서양을 아우르는 철학과 사상, 종교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토대로 인류와 한민족이 나아갈 방향으로 공동선, 생명질서 사상 등을 철학적 지표로 제시하였다. “세상을 살면서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는 말되 세상을 좀더 좋게 만들기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공동선아카데미 ·02-2263-3011).
임을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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