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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전태일의 후예, 객공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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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5-1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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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녀복기능인협회’조직하는 김명관씨 “하청회사 넘어 본사와 직접 단가교섭 하겠다”

사진/ 선생과 제자처럼 함께 일하는 김명관·최막래 가족. 최막래씨는 남편한테 일을 배우면서도 일 못한다고 야단맞아 많이 울었다고 한다. (이정용 기자)
지난 노동절 무렵, 모르는 사람에게서 한통의 편지를 받았다. “제 나이는 43살, 아내와 중3 딸, 초6 아들을 둔 그냥 평범한 사람입니다. 옷을 만드는 일을 아내와 같이 하는데 흔히 ‘객공’ 이라고 부르지요. 먹고사는 데는 불편이 없는 편입니다. 며칠 뒤에는 결혼한 지 꼭 16년 만에 집을 마련하여 이사도 합니다. 노동 쪽은 쫙 꿰고 계신 분이니까 객공 일을 하는 사람들의 상황을 어느 정도 아실 거라는 생각을 깔고 얘기를 하겠습니다.”



‘서동요 작전’으로 이룬 결혼

그렇게 시작된 긴 편지는 그가 ‘객공’들을 모아 ‘숙녀복기능인협회’를 조직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이어졌고, 나는 그 편지를 읽는 동안 ‘전태일 열사가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면 아마 객공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한두번 답장을 주고받다가 우리는 어느새 친해져 급기야 우리 부부는 그 집의 집들이에까지 초대되는 영광을 누렸다.


지금은 숙녀복 ‘객공’으로 일하는 김명관(43)씨는 86년 아시안게임이 열리던 해 작은 봉제공장을 잠시 운영한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 취업하러 온 부인 최막래(42)씨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친구들이 놀러오면 “앞으로 나와 한이불 덮고 잘 사람”이라고 농담반 진담반 소개하면서 분위기를 잡아갔다. 이른바 ‘서동요(薯童謠) 작전’이다. 그 작전에 힘입어 87년에 결혼했다. 부부가 한목소리로 “결국 결혼하러 그 회사에 간 셈이었죠”라며 웃는다.

부인 최막래씨는 결혼 뒤 집에서 살림을 하다가 작은아이가 유치원에 다닐 만큼 자랐을 때부터 다시 회사에 나가, 봉제공장을 정리하고 다른 하청회사에 들어가 객공으로 일하고 있는 남편 김명관씨와 같이 일하기 시작했다. 객공은 ‘선생’과 ‘제자’가 한팀이 되어, 제자가 선생에게서 하나하나 일을 배우는 방식으로 호흡을 맞추며 일한다. 그래서 부부가 함께 일하는 경우가 많기도 한데, 사실 요즘과 같은 시대에 그렇게 힘든 일을 하면서 살아가려는 젊은이들이 많지 않아 사람 구하기 어렵다는 것이 ‘부부 객공’이 많은 진짜 이유다. 대략 전체의 80%가량이 부부 객공이다.

최막래씨가 남편에게 일을 배운 지는 벌써 6년이나 되었지만 20년 동안 그 일을 한 김명관씨는 부인을 가리켜 “하산하려면 아직 멀었다”고 했다. 함께 일하는 직장 동료들 앞에서 최막래씨가 남편 이야기를 할 때 사용하는 호칭은 여전히 깍듯이 ‘우리 선생님’이다. “배우기 어려운 만큼 한번 배워두면 부가가치가 높은 기술이에요. 앞으로 세월이 가면 갈수록 희소가치 때문에 부가가치는 더욱 높아질 겁니다”라고 말하는 김명관씨 옆에서 “남편한테 일을 배우면서도 일 못한다고 야단맞아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몰라요. 그렇지만 그렇게 한번 배워두기만 하면 결코 우스운 별 볼 일 없는 기능은 아니에요”라고 거드는 부인의 표정에서 뿌듯해하는 자부심이 느껴진다.

옷 만드는 쪽은 쫙 꿰고 있는…

사진/ 작업장에서의 김명관씨. 객공일은 배우기 어려운 만큼 한번 배워두면 부가가치가 높은 기술이다. (이정용 기자)
객공이 일하는 곳은 일종의 하청회사다. 하청회사 사장이 원청회사 ‘본사’에 가서 일감을 받아와 객공팀에 배정하고 본사에서 받는 노임단가를 하청회사 사장과 객공팀이 50:50으로 나눈다. 하청회사가 본사에서 옷감과 상표 등 옷 만드는 데 필요한 자재를 모두 받아오면 객공팀은 그 재료들을 받아 옷 한벌 만드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해내야 한다. ‘샘플’과 ‘패턴’(옷본)을 한번 척 보기만 해도 그 옷을 가장 빨리 잘 만드는 순서와 방법을 알아내는 것이 ‘객공 선생님’의 탁월한 능력이다. 옷 만드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꿰고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김명관씨가 나에게 보낸 첫 편지에서 나를 “노동 쪽은 쫙 꿰고 계신 분”이라고 표현했지만, 객공이야말로 “옷 만드는 쪽은 쫙 꿰고 계신 분”들이다.

‘객공 선생님’이 최대한 능률적으로 재봉작업을 할 수 있도록 ‘객공 제자’는 원단에 심지를 붙이는 일부터 시작해 재봉 박을 장소에 테이프를 붙이고, 박음질이 한번 지나간 곳에 다림질을 하고, 오바로크 처리를 하고, ‘칼봉’(칼 달린 재봉틀)으로 시접을 잘라내는 일 등을 한다. ‘선생님’은 앉아서 일하지만 ‘제자’는 하루 종일 거의 서서 일해야 하므로 저녁이면 다리가 붓는다. 앉아서 일하는 ‘선생님’ 역시 결코 편한 것은 아니다. 허리에 무리가 가는 자세를 취할 때가 많아 하루에 12시간 이상 10여년씩이나 그렇게 앉아서 일을 하면 허리에 병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아침 9시부터 저녁 9시까지 일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퇴근시간을 넘기는 날이 대부분이다. 다른 노동자들의 임금보다 수입은 높은 편이라고는 하지만 부부가 함께 일하고 절대 노동시간이 많으며 노동강도가 높은 것에 비하면 꼭 그렇다고 볼 수만도 없다. 김씨 부부는 지금까지 회사 가까운 곳을 떠나 살아본 적이 없고, 새 집 역시 회사 근처에 마련했다. 만든 옷의 양에 따라 수입이 달라지기 때문에 출퇴근시간이 길면 그만큼 손해다.

김명관씨가 최근 심혈을 기울이는 일은 ‘숙녀복기능인협회’(숙기협)를 조직하는 것이다. 자신의 이름과 함께 “우리 객공들은 뭉쳐야 합니다”는 등의 문구가 적힌 명함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한 지는 벌써 10년도 넘었다. 부인은 남편의 그런 모습을 옆에서 “썩 괜찮은 느낌”으로 지켜보았다.

그 활동은 아주 소박한 바람에서 시작되었다. 주변을 돌아보면 다른 사람들은 달력의 빨간 날에는 집에서 쉬거나 가족과 함께 놀러다니기도 하는데 자신들은 허구한 날 쉬지 않고 일해온 것이다. 동료들을 봐도 어쩌다 시간이 나면 술을 마시거나 당구를 하는 것말고는 책 한권 읽을 여유가 없었다. “이건 정상이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가장 큰 문제는 임가공 단가의 인상이다. 하청회사 사장들도 임가공 단가를 올리기 위해 노력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세간에는 “봉제회사 사장 10명 중에 두 사람은 돈 벌고, 세 사람은 본전이고, 다섯 사람은 손해 보면서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여건이 어렵다. 일감을 주는 본사 입장에서야 다른 많은 하청회사들이 있으니 아쉬울 것이 없다. 객공들이 “하청회사는 우리의 타깃이 아니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객공들이 조직화하여 본사와 직접 임가공 단가 교섭을 벌일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 현재 ‘숙기협’의 목표다. 정식으로 활동을 시작한 지 3개월 만에 벌써 30명의 회원을 확보했다. 인터넷 ‘다음’(daum)카페에서 ‘객공’이라고 치면 쉽게 이 사람들과 만날 수 있다.

클래식 기타의 새로운 세계

김명관씨는 ‘숙기협’ 네명의 추진위원 중 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 ‘숙기협’이 최근 곤란한 문제에 부닥쳤다. 김명관씨가 “노사모 활동에 열중해야 하기 때문에 12월까지 추진위원 활동을 잠시 중단하겠다”고 선언해버린 것이다. 집들이하던 날에도 ‘숙기협’ 회장 손영호씨와 동료들이 “노사모는 수만명이지만 ‘숙기협’ 추진위원은 단 네명뿐이다. 당신 한 사람이 빠지면 우린 전체 병력의 4분의 1의 손실을 입는 것이나 마찬가지다”면서 설득했지만 결국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모임을 끝내고 말았다.

“정치인들 하는 짓거리야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 사람들이 만드는 법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일상생활에 속속들이 영향을 끼치는 것인데 국민이라면 당연히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지요. 정당은 ‘민주노동당’을 지지합니다. ‘사회당’도 알고 있지만 ‘민주노동당’을 미는 쪽이 빠르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인물은 ‘노무현’을 지지합니다.” 역시 ‘대단한 노사모’라고 할 밖에는….

전태일 열사에 대해서는 10여년 전에 책을 통해서 알았다. 전태일 열사의 전통을 이어받은 ‘서울의류업노동조합’의 김정호 위원장 역시 ‘숙기협’ 조직에 힘을 보태고 있다. “전태일 열사의 후예 ‘객공’이라고 표현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펄쩍 뛰었다. “그분에 비하면 우리는 너무나 작은 몸부림에 지나지 않죠.”

김명관씨의 장래 소망은 뜻밖에도 “음악활동을 하며 사는 것”이었다. 오래 전 입원한 적이 있는 부산의 한 병원의 병실 동료에게서 클래식 기타를 배우면서 음악에 대한 새로운 지평이 열렸다. “언젠가는 남편이 경영하던 봉제공장에서 퇴직하는 아르바이트 직원을 집에 데리고 와 저녁을 함께 먹은 적이 있었는데, 그 직원이 클래식 기타를 배웠지만 기타가 없다고 하자 자기 기타를 줘보낸 적도 있어요”라고 부인이 귀띔한다. 진정으로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내친 김에 기타 연주를 한곡 청했다. 그는 “연주는 무슨 연주…”라며 사양하다가 “내가 반주할 테니 다 같이 노래를 한곡 부르자”고 제안했다.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그가 선창하기 시작했는데, 아, 열 사람의 목소리를 합친 것만큼이나 풍부한 남저음(男低音)이었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일어나 그의 주위에 둘러서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가 마련한 새 집에서 사람들이 부르는 노랫소리가 창문을 통해 온 동네에 퍼지기 시작했다. 그 노래 소리처럼 김명관·최막래씨 부부의 뜻이 온 세상이 널리 퍼지기를 바란다.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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