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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세 아들을 위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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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5-1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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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최보은 ㅣ 영화월간지 <프리미어> 편집장 (이정용 기자)
'대통령의 아들들'이 전 국민의 안주가 되었다. 이상하게도 뉴스의 톤이 급박해질수록, 내 흥분은 가라 앉는다. 죄지으면 벌받는거라고는 당연히 알고 있지만, 지은 죄 이상으로 몰매 맞는 풍경은 그다지 즐기지 않기 때문일까. 어쨌든 '비리의 산삼뿌리 놔두고 홍삼뿌리 씹기'같은, 영양도 없고 살로도 안 갈 메뉴는 혼자만이라도 거절하기로 했다.

물론 처음엔 나도 이랬다. 아니, DJ 바보 아냐? YS가 현철이 때문에 그렇게 당하는 걸 봤으면서? 그러나 조금더 생각해보니 다른 답이 나왔다. 이승만의 양아들, 박정희의 차지철, 전두환의 전경환, 김영삼의 김현철, 김대중의 세 아들. X와 Y에 몇쌍의 수를 대입해도 같은 값이 나오는 이런 일차방정식을, 온 세상이 '공식'이 아니라 '사건'으로 파악한다는 사실이 놀랍다는 것이다. 친인척 관리의 부실이나 개인 도덕성의 높낮이에 대한 질타는 이제 그만두자, 우리 정치풍토가 만들어낸, 어떤 족보가 들어가도 대충 비슷한 답이 나오는, 들키느냐 마느냐 그것만이 문제인 정치판의 공식 앞에서 하나마나한 소릴 테니까.

재수없게도 들켰을 뿐이다

이·박·전씨의 경우엔 아들이 아니지 않느냐거나, 그렇다면 이 명단에서 빠진 노태우씨가 가장 도덕적인 대통령이었느냐고 되묻는다면, 이런 답이 떠오른다. 김영삼·김대중의 불행은, 자신들의 민주화투쟁 때문에 유년을 훼손당한 아들들에 대해 지나친 연민과 죄책감을 가진 데 있었다기보다는(오히려 안 그러면 이상하겠다, 나는). 그 아들들이 권력놀음을 할 수 있을 만큼 어른이 된 다음에 권좌에 오른 데 있었다고. 아들에게 수갑을 채우지 않을 수 있었던 나머지 권력자들은 아들이 없었거나, 새끼권력자가 되기엔 당시 그 아들들이 너무 어렸을 뿐이라고.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홍삼트리오' 찜쪄먹은 정치적 수양 아들은 언제나 몇 다스씩 있었다고.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서 '조건'과 결혼하고 '사랑'과 동침하는 연희는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말로 위선적 결혼제도를 정면으로 조롱한다.최근 절찬리에 상영 중인 희비극 '고비용 패거리 정치는, 미친 짓이다'의 주인공들은 위선적 정치제도를 숨어서 조롱하다가 재수없게도, 들켰을 뿐이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백결선생보다 백배는 청렴한 사람조차 당선을 위해서는 탈법적 자금조성이 불가피한 정치현실이라면, 나 같아도 '그 정도 혐의'로는 별 죄의식을 못 느끼겠다.


내가 이렇게까지 시니컬해진 데는, 최규선 사건의 발단이 우스운 탓이 크다. 이 사건이 정치권에 의해 터져나왔는가? 언론이 파헤쳐서 밝혀졌는가? 정형근 같은 초절정 하이커넥션 정보통을 보유한 한나라당도 아닌, 필요하면 자사의 취재진을 '정적'의 뒤를 캐는 심부름센터 탐정떼처럼 써먹을 수 있는 제도권 언론도 아닌, 고용주와 이해관계가 엇갈린 한 운전기사에 의해서였다. 이상하게도 한나라당은 운전기사 천호영씨가 자기네 게시판에 올린 글을 바로 다음날 지웠고, 그가 보낸 편지조차 묵살했다고 한다. 또 언론은 지난 4년여 동안 홍삼트리오에 대해 대체로 입을 다물어왔다. 알려고 마음만 먹었으면 모를 리 없었을 텐데, 그렇다면 한나라당과 언론조차도, 홍삼의 비리가 정치의 '일상'보다, '선대'의 현철보다, 앞장서 거품 물 정도의 죄질은 아니라고 판단했다는 말 아닌가?

왜 여성 정치인은 주목받지 못하나

아, 물론 홍걸씨 미국 저택 이야기는 전부터 나왔다. 고작, 고작 '몇억짜리 저택' 말이다(40여년 이 땅에 살아오면서 숫자에 관한 한 나도 어지간히 간이 커졌다). 맞아죽을 소리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역대 정권을 통틀어 권력형 비리로 걸린 사람들 중에서 죄질의 서열로 따진다면 홍삼, 그 중에서도 특히 홍걸씨는 비교적 '말석'쪽이 아닐까 어림잡고 있다. 벌할 때는 벌하더라도 죄의 경중은 따져야 하는 법이니까. 국가 요직의 인사권을 휘두른 것도 아니고, 국제공항 건설이나 대규모 도매시장의 인·허가를 거액의 리베이트와 맞바꾼 것도 아니며, 안기부 돈을 끌어다 표밭을 사들인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까지 호들갑이냐는 게 '그 정도쯤이야 한 30년 보고 산' 내 신경계에서 생산되는 반응의 전부다. 물론 대통령의 세 아들이니 온 세상이 합심해서 영화를 찍고 보고 할 만은 하지만, 아무리 인물과 줄거리가 드라마틱하더라도 때로는 극장 밖을 나와 진짜 현실을 바라봐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재판관이라면 이 세 아들 게이트의 법정에 어쩌다 들킨 초범보다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보험'을 통해 안들킨다는 자신감을 수십년 갈고 닦아온 한국 정치판 전체를 세우겠다. 그리고 나는 여자기 때문에 한편으로 이런 절망도 든다. 이런 판에도 정수장에 투입된 숯같이 '깨끗한' 여성 정치인들이 주목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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