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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산재노동자의 벗으로 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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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5-0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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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정문 맞은편 골목길 안쪽으로 들어서면 조그만 건물 2층에 울산노동자신문 사무실이 있다. 이 사무실 한쪽 귀퉁이에 비스듬히 걸린 현판이 눈길을 끈다. ‘울산 산재추방운동연합’. 지난 4월23일 저녁, 울산 산재추방운동연합 현미향(33)씨가 SK(주) 근무일지, 기자회견문 등 두툼한 서류뭉치를 싸들고 사무실에 들어섰다. 울산 남구 SK(주)에서 일하다 림프암 진단을 받은 뒤 투병 끝에 숨진 송은동씨의 직업성 암 사망의 진실을 밝히려고 여기저기 발로 뛰며 모은 자료들이다. SK(주) 정문 앞에서 회사 쪽의 산재 은폐행위 중단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돌아온 길이었다.

“회사 쪽이 근로복지공단에 허위서류를 제출하고, 송씨의 투병기간에 측정한 유해물질 누출량을 마치 송씨가 일하던 당시의 자료인 양 속여 산재 은폐를 기도하고 있어요.” 며칠 뒤 SK(주)는 결국 “산재요양 판단의 근거자료로 제출한 서류는 우리의 실수였다”고 잘못을 시인해야 했다. 숨진 송씨가 근무 당시에 벤젠 등 유해 발암물질을 다뤄왔다는 사실을 입증할 근무일지를 현씨가 확보했기 때문이다. 현씨의 끈질긴 싸움으로 일이 커지자 노동부도 나섰다. SK(주) 전 공장을 대상으로 직업성 암 발병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역학조사에 들어간 것이다. “SK(주)에서 일하다 암으로 사망하거나 투병 중인 제보 사례가 23건이나 들어왔습니다. 일반적으로 10만명당 4명한테 암이 발생한다는데, 종업원 3천명인 SK(주)에서 이렇게 제보가 많다는 건 큰 충격입니다.”

울산에서는 조선소의 추락사나 감전사 등 원시적인 산재가 많지만 최근에는 자동차 공장에서 낮밤 맞교대 작업에 따른 과로사가 늘고 있다고 한다. “위장취업자를 가려내는 데 쓰인 노동현장의 블랙리스트에 요즘은 산재노동자가 주로 오르고 있어요. 조선소의 경우 한번 산재를 당한 하청노동자는 블랙리스트에 걸려 재취업이 어렵다고 합니다.” 학교를 마친 뒤 울산 노동현장에 몸을 던진 현씨도 한때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위장취업자였다. 조직사건에 엮여 쫓기는 신세 속에서 창원공단으로 몸을 피했던 현씨는 3년전, 이번에는 산재노동자들의 벗이 되어 울산에 돌아왔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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