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 없는 결단
등록 : 2002-05-08 00:00 수정 :
나이가 예순다섯쯤인가 되어서 일본 작가 시바 료타로는 말했습니다. “내 인생의 지갑에 지전은 다 떨어지고 동전 몇닢만 남았다”고. 살 날이 그리 많지 않다는 뜻입니다. 칠순 청춘도 적지 않은 세상이므로 아마 작가 자신에게 해당하는 연령 표현일 것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지난해 당 쇄신요구 때 민주당 총재직을 내놓았습니다. 큰 벼리를 놓은 것입니다. 그 뒤 탈당은 없을 것이라고 줄곧 밝혀왔습니다.
그래서 당의 울타리, 당이라는 효율적인 수단을 놓은 탈당은 큰 결단이라고 할 만합니다. 시바 료타로의 표현을 빌리면 김 대통령은 ‘정치인생의 지갑’에 몇닢 남지 않은 동전을 과감히 다 써버린 것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 자신 “전 정치인생을 바쳐온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기로 결심했다”면서 “평생의 정치생활 속에서 고락과 영욕을 같이한 동지들에게 그간의 지원에 대해 깊이 감사드린다”고 감회를 밝혔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김 대통령의 결단은 감흥을 주지 못하였습니다. 감동 없는 결단입니다. 대통령의 정치적 행위는 영향력이 큽니다. 그래서 일거수 일투족이 관심을 모으고 언론의 조명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번만큼 대통령과 그의 주변에는 큰일이지만 일반 시민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경우는 드물 것입니다. 청와대는 심사숙고해왔고 언론은 연일 지면을 내왔지만, 세상은 ‘탈당하거나 말거나’에 가깝습니다.
역대 대통령은 임기말만 되면 정당을 떠났습니다. 현직 대통령의 탈당은 내리 세 번째입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당시 여당이던 신한국당을 떠났고, 노태우 전 대통령도 민자당을 탈당했습니다.
이들은 중립적 선거관리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정과 비리로 궁지에 몰려 떠밀리다시피 당을 떠났습니다. 어쨌든 이들은 탈당을 다 내놓는, 무장해제당한, 그래서 어느 정도 초연해지는 마지막 방어패로 썼습니다. 그 카드는 인정 많은 국민에게 먹혔습니다.
그런데 두번, 세번 이런 일을 겪으면서 면역이 되었습니다. 김 대통령도 전임자들과 비슷한 처지에서 탈당 카드를 내밀었지만, 효과는 매우 작습니다.
탈당한다고 별로 달라질 것도 없거니와 그것이 결코 사태해결의 해답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대통령 친인척과 측근들의 비리의혹을 속시원히 밝히는 게 더 중요합니다. 이것과 당적 보유여부는 사실상 무관합니다. 한편에선 청와대가 ‘탈당 이벤트’로 국면전환을 꾀하는 것 아닌가, 정치적 해법으로 물타기하려는 의도는 아닌가 하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청와대는 중요한 정치적 결단을 하고 나면 이따금 사후반응을 체크하곤 합니다. 만일 “탈당 어땠어? 버린 만큼 감동을 주지 않았어?”하고 물어온다면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So what?”
한겨레21 편집장 정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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