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설혜심 ㅣ 연세대 강사·서양사 (박승화 기자)
따라서 이 연구의 본질적 의미는 수면과 멜라토닌의 생성, 그리고 그것이 질병에 미치는 영향일 것이다. 그런데 왜 언론은 ‘유방암’과 ‘야근’이라는 타이틀을 뽑아 마치 여성들만이 그 대상이 되는 듯 보도하는 것일까. 사실 이 연구는 그 자체로 객관성을 주장하기에는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연구의 대상 자체가 유방암에 걸린 ‘여성’만으로, 유방이 없는 남성은 원천적으로 배제되었다. 나아가 ‘작업내력’만을 분석의 틀로 삼고 있기 때문에 강산이 바뀌어도 너무 많이 바뀌었을 지난 40년이라는 세월이 품고 있는 변수들이나 기타 수많은 다른 변인들은 고려하지 않는 셈이다. 실제로 야근을 많이 한 여성 근로자들 사이에도 작업환경, 섭생, 일의 종류, 생활환경, 그리고 유전이나 성격 등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을 텐데 말이다. 이렇게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는 연구를 보도하면서 ‘여성들의 야근’과 ‘유방암’을 구체적으로 연결지어 말한다는 것은 어떤 효과를 가져올까? 유방암을 들먹이며 야근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얼핏 여성을 보호하는 것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여성의 몸을 야근에는 적합지 않은 것으로 구별짓고, 치열한 산업현장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규정하여, ‘집으로 돌려보낼 수 있는’ 좋은 구실을 찾으려는 의식적인 혹은 무의식적인 의도가 감추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의학은 수백년 동안 이런 성차별의 든든한 이론적 근거가 되어왔다. 현대의학의 토대를 이루는 서양의학사를 살펴보면 여성의 몸은 끊임없이 여성의 열등성을 강조하는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 지금으로서는 믿기 힘들겠지만 과거 서양의학에서는 여성의 자궁을 몸 속에서 떠다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몸 속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심지어 머리까지 올라오는 자궁 때문에 여성은 알 수 없는 많은 질병을 앓는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여성의 몸은 지극히 불안정한 것으로 여겨졌고, 이성이 자리잡기에는 자궁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큰 것으로 풀이되었다. 19세기에는 여성의 두뇌구조가 남성과 다르다는 의학적 연구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여성들은 감성이 발달한 반면, 이성은 부족하기 때문에 참정권을 줄 수 없다는 ‘과학적’ 근거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산업화가 가속화할 당시에는 여성의 뼈의 굳기나 골반의 구조와 같은 것들이 세세하게 연구되면서 여성의 신체구조가 산업현장에는 어울리지 않는 열등한 것으로 강조되었다. 첨단의학 정보를 의심하라 이런 역사적 사실들이 말도 안 되는 것으로 들리는 지금에도, 유방암에 대한 위의 보도와 같은 것들은 과거의 성차별적 과학이 여전히 살아서 기승을 부린다는 느낌을 준다. 사실 지난해 10월 언론에서는 캐나다 앨버타 암센터 연구소의 보고서를 인용하며 ‘집안일’처럼 몸을 적당히 움직이는 여성이 유방암에 걸릴 위험이 훨씬 낮다고 보도한 바 있다. 그 기사는 ‘아무 일도 안 하고 빈둥거리는 여성’보다는 적당한 일, 그것도 구체적으로 ‘집안일’과 같은 일을 하는 여성은 유방암이라는 위험으로부터 보호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유방암에 대한 이런 연구결과들은 결국 ‘집안일’은 유방암의 확률을 줄이는 예방책이지만, ‘야근’을 동반할 수 있는 직장일은 여성의 몸에 치명적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다. 첨단의학이나 통계와 같은 과학적 외피를 쓰고 이런 연구들은 다시 한번 여성의 몸을 ‘집에 적합한 존재’로 규정한다. 건강에 대한 관심이 남다르고, 따라서 이른바 ‘첨단 의학정보’가 홍수를 이루는 지금, 건강에 대한 기사는 그 어떤 메시지보다도 더욱 개인에게 중요하고도 실제적인 정보로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정보들이 어떤 성차별적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어떤 파급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독자도, 언론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