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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떨꺼둥이’에게도 봄은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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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5-0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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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을 삶의 방식으로 인정하고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려는 ‘노실사’

“인권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빈곤은 인권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사회악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하다는 사실만으로 사회에서 배제된다. 또한 가난은 사회적 배제뿐만 아니라 마음의 평화를 빼앗는 영성의 가난을 동반한다. 노숙인들을 보라. 그들은 물질적으로 가난할 뿐만 아니라, 늘 마음의 평화를 빼앗긴 채 고통과 괴로운 소외의 불길 속에서 고통받고 있지 않는가. 그렇기 때문에 외부의 차별과 멸시는 물론 내면세계에서 스스로를 비난하고 멸시하며 차별하고 있다.”

술먹지 마라, 병원 가라… 그만!

사진/ 대다수 노숙인들은 자활에 앞서 상당 기간 치료와 요양이 필요한 실정이다. (강재훈 기자)
일교차가 심하긴 하지만, 어느새 낮 동안엔 여름이 느껴지는 계절이다. 겨우내 눈에 띄지 않던 노숙인들도 서서히 공원으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대낮부터 둘러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는 그들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리는 이들도 있다. 혀를 끌끌 차면서 눈을 흘기거나, 애써 외면하고 바삐 걸음을 옮기는 이들도 있다. 그들의 신산한 삶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최근 노숙인 인권문제 전문 계간지 <떨꺼둥이>를 창간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 ‘노숙인 복지와 인권을 실천하는 사람들’(이하 노실사·대표 문헌준)은 “노숙인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노숙을 또 다른 삶의 방식으로 인정하고,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노숙인의 삶에 다가가는 출발”이라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노숙인 문제가 우리 사회의 관심사로 떠오른 것은 외환위기로 사회가 얼어붙기 시작한 1998년 무렵이다. 당시 정부는 거리로 쏟아져나오는 노숙인의 수가 급증하면서 ‘자유의 집’, ‘희망의 집’ 등 임시 구호시설을 서둘러 마련했다. 하지만 일시적인 주거권 확보가 곧바로 노숙인의 생활을 바꾸거나 재기의 발판이 되지는 못했다. 노숙인 대책을 마련한 지 5년째로 접어든 지금까지 쉼터와 거리를 오가는 생활을 반복하는 노숙인이 대부분이다.

이원기 노실사 정책국장은 “노숙인 쉼터는 애초 자활하기 위한 응급구호적 성격이 짙다”며 “그러다 보니 단기간에 자활이 불가능한 대다수 노숙인에게까지 자활의 잣대를 들이밀게 됐다”고 말한다. 그러나 노숙인 가운데 70%가량은 알코올 중독자이거나 당뇨 등 만성 질환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 노숙인 인권운동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이 국장은 “대다수 노숙인들은 자활에 앞서 상당 기간 치료와 요양이 필요한 실정”이라며 “그들에게 ‘씻어라, 옷 갈아입어라, 술 마시지 마라, 병원 가라’고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고 말했다.

거리생활자들이 쉼터 등 구호시설을 기피하는 까닭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게다가 노숙인이 쉼터와 거리를 오가는 동안 그들의 건강은 더욱 악화된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가 올 초 내놓은 자료를 보면, 외환위기 뒤 지난해까지 서울 시내 거리에서 숨진 노숙인은 모두 1672명에 달한다. 해마다 300∼400명의 노숙인이 쉼터를 가까운 곳에 두고도 거리에서 죽어간 셈이다.

서울시 지원 쉼터 21곳 문 닫아

이 때문에 노실사는 ‘노숙인의 필요와 요구를 담아내고, 그들의 자발성을 끌어낼 수 있는 쉼터’ 설립을 장기적인 과제로 삼고 있다. 노실사 활동가들은 “상당기간 가족과 친구에게서 떨어진 채 사회적 관계를 단절하고 살아온 노숙인이 자연스럽게 이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5∼10명 정도의 그룹홈 형태가 바람직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는 정반대로 흐르고 있다. 지난해 6월30일 동작이수복지관 쉼터를 시작으로 올 4월까지 서울시가 예산을 지원하는 쉼터 21곳이 운영상의 이유로 문을 닫았다. 특히 지난 3월에는 한달 동안 무려 7곳의 쉼터가 폐쇄되기도 했다. 입소인원 10명 미만의 쉼터는 통폐합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판단에서다.

추위와 굶주림 속에 지옥 같은 겨울을 이겨낸 노숙인에게도 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러나 의지하고 지내던 곳에서 맨손으로 쫓겨난 ‘떨꺼둥이’들의 얼굴에서 환한 봄날 같은 웃음은 찾아볼 수 없었다. (02)833-2331, www.homelessaction.or.kr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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