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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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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4-1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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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회사쪽에서 발전노조원들에게 ‘굴욕적인 서약서 강요’로 파업 후유증 계속

사진/ 지난 4월 2일, 발전파업을 둘러싼 노·정 합의안에 대해 발전 조합원들이 설명을 듣고 있다. (박승화 기자)
“지난 38일간의 파업이 발전민영화에 대한 분노에서 터져나왔듯이 파업은 분노에서 비롯하는 겁니다. 지난 파업은 사실상 태업 수준이었지만 회사 쪽이 서약서를 계속 강요하면 2차 파업은 기계를 다 멈추고 맞장을 뜨는 식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4월12일 오전, 명동성당 한 귀퉁이에서 48일째 농성 중인 한 발전노조 수배자가 울분에 찬 목소리로 내뱉었다. 4월2일 노·정 합의에 따라 일반 조합원은 현장으로 복귀했지만, 수배자 처지인 발전노조 지도부 25명은 아직 두꺼운 옷을 껴입은 채 농성장을 지키고 있다. 발전노조는 전날 “회사 쪽이 업무에 복귀한 조합원들한테 ‘파업불참’을 약속하는 서약서 작성을 강요하고 있다”며 “조합원에 대한 징계철회가 수용되지 않으면 2차 파업에 들어가겠다”고 선언했다.

파업 끝나자마자 초강경 대응


이렇듯 파업은 일단 끝났지만 발전노조 사태는 파업 이후에도 몸살을 앓고 있다. 발전노조 집행부가 노·정 합의안에 반발하며 여전히 농성 중인 것도 있지만, 복귀한 조합원들한테 회사 쪽이 서약서를 강요하면서 사업장마다 갈등에 휩싸여 있기 때문이다. 이번 파업기간 중 3월25일까지 업무에 복귀하지 않은 조합원 가운데 적극가담자로 분류된 348명은 징계에 회부돼 이미 해임됐다. 회사 쪽은 이어 4월2일 노·정 합의에 따라 복귀한 3400여명을 모두 4차 징계대상자로 올려 징계절차를 밟는 중이다. 이에 따라 5개 발전자회사마다 임시 감사팀을 구성해 발전사업소별로 복귀자들에 대한 일대일 면담을 진행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이뤄지고 있는 게 서약서 작성이다. 한국동서발전(주) 황일호 부장은 “회사 규정상 7일 이상 무단결근하면 해임사유가 된다”며 “3400여명을 다 해임할 수는 없고, 선별해 징계수준을 정하기 위한 방법으로 서약서를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바꿔 말하면 서약서에 도장을 찍지않으면 불이익을 주겠다는 얘기다.

그러나 서약서 내용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잘못했으니 용서를 바란다”는 식의 투항문서나 다름없다. 한국남동발전(주) 및 한국서부발전(주)의 이름으로 된 서약서는 ‘불법파업행위를 종료하고 복귀하면서… 징계사유에 해당하는 잘못을 범하였으며… 실정법을 위반한 사실을 인정한다’거나 ‘회사가 가중징계를 결정하더라도 아무런 이의 없이 감수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혹독한 반성문에 다름 아니다. 서약서는 나아가 △향후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한 이유 없이 회사의 정상조업을 방해하는 파업·태업·설비점거 등 일체의 불법행위를 하지 않겠다 △파업 참여에 따른 민·형사상의 책임을 포함하여… 징계조치에 그대로 따르겠다 △회사의 제반 사규를 준수하고 상사의 업무상 명령에 복종하겠다는 내용을 덧붙이고 있다. “싸움에 패배했으니 이제 ‘파업에 절대 참여하지 않겠다’는 것을 약속하라”는 투의 굴욕적인 항복문서인 셈이다. 이에 대해 한국동서발전(주) 관계자는 “경찰에서 조사받고 훈방될 때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라고 반성문을 쓰는 이치와 같은 맥락에서 보면 된다”고 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노·정 ‘합의’로 파업을 풀었음에도, 돌아온 노동자들에게 일방적인 복종을 강요하고 힘의 논리를 관철시키겠다는 회사 쪽 의도가 깔려 있다. 이번 참에 조합원들한테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발전노조는 파업이 끝나자마자 회사 쪽이 기다렸다는 듯 서약서를 동원해 감정섞인 초강경 대응에 나선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누구는 서약하고 누구는 버티고…

사진/ 발전노조는 회사 쪽이 서약서 작성을 강요하며 초강경 대응에 나선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 4월 2일 노·정 막판 협상.(박승화 기자)
이런 서약서 강요에 대해 사업장은 저마다 우왕좌왕하고 있다. 울산·삼천포·평택·태안·인천화력발전소 등은 조합원들이 강하게 버티면서 서약서를 거부하고 있는 반면 보령화력발전소 등은 전 조합원이 이미 서명을 마쳤다. 같은 사업장 안에서도 일부는 강요에 못 이겨 서명하고, 일부는 “무릎꿇고 항복하는 문서에 도장을 찍을 수 없다”고 버티면서 노동자들 사이에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 파업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해임된 이준상(여수화력)씨는 “우리 노조지부는 탄압을 막기 위해 노조에서 서약서를 일괄 보관하고 있다”며 “노·정 합의 이전에 복귀한 조합원은 대부분 서약서를 쓴 상태라 혼란스런 상황”이라고 전했다. 이런 와중에 회사 쪽은 당근과 채찍을 함께 휘두르고 있다. 한국동서발전(주)의 서약서 문건을 보면 ‘서약서를 남보다 우선 제출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적고 있다. 선착순으로 빨리 내면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면서 회유하는 것이다.

특히 4월5∼6일에 있었던 5개 발전회사 ‘사장단회의’결과는 서약서 제출이 파업 참가자에 대한 보복차원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인상을 짙게 풍긴다. 당시 회의결과는 △노사문제는 역학적으로 푼다 △(서약서를)회사의 조직력과 노조의 조직력을 파악하는 기회로 가진다 △힘이 든다고 피하면 계속 노조에 밀린다 △원칙의 단호함을 보여줘야 한다 △(서약서에) 불응할 때는 회사가 이길 수 있다는 점을 인식시키고 징계, 고소·고발, 가압류 등 인사·경영권으로 노조집행부를 압박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회사 쪽은 “파업 불참자, 조기 복귀자, 최종 복귀자의 화합을 위해 교육을 실시하고 ‘노사 한마음 대회’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 문건에 ‘노사 화합’은 오간 데 없다. 대신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노조를 철저히 무력화하겠다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명동성당에서 농성 중인 발전노조 간부는 “그동안 우리들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한 행동 자체를 모두 부정하란 말이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또 다른 발전노조 간부는 “사람은 양심의 동물이다. 자신이 그런 서약서를 쓰면 자연히 움츠러들고 앞으로 파업참여는커녕 노조 활동도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며 “애초에 이런 회사와 합의하고 파업을 푸는 게 아니었다”고 탄식했다.

지난 4월8∼9일 서울 공릉동 한전연수원에서 열린 분당화력발전소 노무교육에서는 파업을 풀고 복귀한 직원들을 노사화합이란 명분 아래 모이게 한 뒤, 서약서를 거부하면 개전의 정이 없는 것으로 알고 현장업무에 투입하지 않겠다고 위협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사 화합의 뒤편에서 회사 쪽이 ‘징계’라는 칼날을 휘두르며 서약서를 강요하고 있는 형국이다. 특히 한국동서발전(주)는 ‘근무투입 자원서’라는 문서까지 받고 있다. 여기에는 “일을 시켜달라”고 ‘부탁’하지 않는 노동자는 무보직상태로 둔 뒤 해임한다는 설명이 따라붙는다.

“양심침해” 인권위에 진정서 제출

더욱 놀라운 것은 발전회사마다 △사업소별로 개별조합원의 성향을 파악해 날마다 보고하고 △온건·중간·강성·구제불능으로 분류한 뒤 온건·순응 직원부터 서약서를 받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파업 지도부와 현장 조합원들을 분열시키고 이를 통해 회사의 규율에 따르는 ‘착한 직원’으로 길들이겠다는 의도다.

물론 발전회사 쪽은 “징계절차를 진행하는 마당인 만큼 무더기 해임사태를 막고 개별적으로 구제해주기 위해 서약서를 받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회사 쪽의 선의를 발전노조가 곡해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복귀한 조합원들이 서약서를 왜 써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대신 서약서를 안 쓰는 경우에는 못 쓰는 이유를 다시 사유서로 써내도록 요구하고 있다. 또 ‘파업참가 경위서’까지 작성하도록 강요해 적극 가담자를 색출해내는 방편으로 활용하고 있다. 발전노조 한 조합원은 “이번 파업은 공기업민영화 반대뿐만 아니라 공기업 간부의 관료주의에 대해 쌓인 불만이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라며 “그런 강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행태가 서약서 강요로 또다시 나타나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발전노조는 지난 12일 “파업 참가자에 대한 서약서 요구행위는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반인권적 행위”라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발전노조 상급단체인 공공연맹 노항래 정책국장은 “어떤 불만이 있어도, 어떤 경우에도 파업이나 태업을 못하게 강제하고 불법파업 참가를 시인하라는 서약서는 노동기본권 자체를 박탈하는 보복행위”라며 “이런 행태가 공기업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고 개탄했다. 회사 쪽이 조합원들의 자존심을 깔아뭉개면서 “백기 들고 투항하라”는 식의 전향서 제출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발전노조 김주헌 지부장(당진발전소)은 “이 같은 서약서 제출 협박은 과거 암울한 시절에도 없던 일”이라며 “파업권 침해뿐만 아니라 개인의 양심의 자유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행위”라고 분노를 터뜨렸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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