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정진웅ㅣ성공회대 강사·문화인류학 (강재훈 기자)
미국은 매년 전세계 에너지 소비의 3분의 1을 뚝딱 해치우고, 또 자국의 어떤 한 주에서만 전세계 콩의 3분의 1을 생산하는 나라다. 그래도 미국은 (불공평하게도) 그러한 정도의 ‘흥청망청’으로는 급격히 망가지지 않을 만큼의 엄청난 땅과 자원과 환경을 지니고 있으며, 또 적어도 자국의 생태보존에 관한 한 대중적 관심의 정도도 높다. 이런 인류역사상 극히 예외적인 나라의 삶의 방식을 따르면서도 급속한 환경파괴를 겪지 않을 수 있는 나라는 오스트레일리아나 캐나다 정도를 제외하고는 지구상에 없다고 해도 별로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미국과 함께 일찍이 산업화를 이룬 서유럽의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국가들이 대부분 겨울에는 스웨터를 입고 지내야 할 만큼의 난방만 하고 살며, 작은 차를 타고, 우리보다 훨씬 적은 양의 생활용수를 소비하고 있다는 사실은 비슷한 생태적 조건에 처해 있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내가 과문한 탓일까? 설사 풍요로운 미국식 삶의 방식에 대한 선망이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할지라도, 그런 열망이 한 사회 전체를 획일적으로 휘몰아치는 강도에 있어, 또 그런 열망을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차별의 정도에 있어 우리 사회보다 더 심한 나라를 나는 알지 못한다. 몇년 전에 “달리던 티코가 섰는데 알고 보니 길바닥에 버려진 껌에 붙었더라”는 얘기로 대표되던 ‘티코 시리즈’가 유행한 적이 있다. 이런 얘기들은 그저 악의 없는 우스갯소리로 이해하면 되는 걸까? 우리 사회가 백화점이나 호텔의 주차장에서 비싼 외제차와 국산 경차를, 또 그 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아무런 차별적인 대우를 하지 않는 곳이라면 그렇게 이해해도 될 것이다. 하지만 끼어들기 경쟁에서 비롯된 운전자들 사이의 시비가 폭력으로까지 이어져 그랜저나 볼보와 같은 큰 차를 몰던 사람들이 티코나 프라이드 같은 작은 차를 몰던 상대방 운전자에게 집단폭력을 가하는, 심지어는 공기총을 발사하는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는 사회에서는 이런 얘기들이 유발하는 웃음의 의미는 화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더더욱 중층적이다. 사후대책보다는 생태적 의식을 우리 사회의 이러한 차별의 습속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 물질적 풍요로움을 욕구하게 한다. 작은 차를 몰다 의기소침하게 되는 경험을 하면 큰 차가 사고 싶어진다. 우리가 지난 몇년 사이에 소나타 같은 배기량 2000cc가 넘는 ‘큰’ 차를 ‘중형차’로 분류하는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나라군에 속하게 된 것은 이런 이유에 기인한 것은 아닐지? 단지 내의 작은 평수의 아파트에 살면 반상회에서 발언권마저 억압받는 것과 같은 종류의 무수한 일상적 차별의 경험들이 과시적 소비에 대한 우리 사회의 욕구를 부추기며 우리는 그 대가를 파괴된 환경으로 지불한다. 언론에서 생태파괴의 현장을 고발할 때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문구가 있다. “행정적 차원의 관리, 보존 대책이 시급하다”는 얘기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 사후처방적 대처방식으로 과연 우리의 산과 들이, 강과 바다가 보존될 수 있을까? 절약하면서 사는 삶보다는 절약할 필요가 없는 삶을 꿈꾸는 사회, 근검절약의 몸짓들이 더 이상 미덕이 아니라 구차함과 초라함의 기호가 되어 비하와 차별을 부르는 토양에서 생태적 의식은 어떻게 자라 꽃필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