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신질환자 수용시설인 ‘수심원’. 장애와 인권 발바닥 행동
차별받기 때문에 장애인 “장애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하나로 묶일 만한 객관적인 기준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장애인 대 비장애인, 이 분류가 이상하다고 <장애학의 도전>을 읽기 전까지 한 번도 느끼지 못했다. 이른바 ‘정상’이라고 불리는 특정 형태의 몸 이외에 다른 몸은 모두 한 꾸러미에 담는 이 분류는 백인 대 유색인 분류만큼 이상하다. 청각장애인과 시각장애인이 부닥치는 현실은 다르다. 장애인 대 비장애인을 가르는 선은 권력이다. 백인 중심 사회에서 흑인이 노예가 되듯이 비장애인 위주로 꾸려진 사회에서 장애인은 이동할 수 없고 소통할 수 없다. “장애인이기 때문에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차별받기 때문에 장애인이 된다.” 내가 살고 싶지 않은 시설에 너는 살라는 건 보호가 아니라 배제다. 시설 밖에서 사람으로 살 수 있어야 시설은 ‘선택’이 될 수 있다. 발달장애인 시설에서 30년 산 여자가 나와 소통하지 못한 건 그의 몸 탓인가? 소통의 책임을 양쪽이 져야 한다면, 나는 왜 나를 기준으로 그의 장애 때문에 소통할 수 없다고 생각하나?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는 문재인 정부가 출범 초기에 공약한 대로 탈시설 강구책을 짜라고 권고했다. 인권위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2017년 기준으로 장애인·정신질환자·노숙인 등 4만4700명이 시설에서 산다. 장애인 시설 거주자 67%는 비자발적으로 입소했고, 58%는 10년 이상 시설에서 살았다. 특히 시설 거주자 가운데 78%는 발달장애인이다. 인지능력이 떨어지니 어쩔 수 없나? 북유럽 발달장애인들은 원하는 만큼 활동보조를 받으며 지역사회 속에 산다. 한국은 노르웨이가 아니라고? 예산이 없다고? ‘안 되면 되게 하라’는 말은 왜 돈 버는 일에만 통하나? 누군가 해준 밥 먹고, 누군가 지은 집에 살면서 돈만 벌면 의존하지 않는 줄 알았다. 모두 의존하는데 몸의 의존만 의존이라 손가락질당한다. “자립은 ‘의존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의존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세상이 장애인용으로 돼 있지 않으니 장애인은 의존할 수 있는 것이 무척 적습니다.”(구마가야 신이치로 일본 도쿄대학 첨단과학기술연구센터 부교수 <경향신문> 인터뷰 재인용) 바이러스는 배제당한 곳을 가리켰다 바이러스는 사람을 배제하지 않았다. 배제당한 곳을 가리켰다. 어떤 몸을 내쫓는 곳에선 모두 불안하다. 모른 척, 아닌 척 해도 사실 다들 안다. 사람은 원래 취약하다는 걸 말이다. 우리는 취약함으로 연결돼 있다. 효율성 높은 몸이 기준인 곳에서 사람은 취약함을 떠올리게 하는 타인뿐 아니라 자기 안의 약함도 없애버리려 자신을 쥐어짠다. 모든 인간이 존엄하다는 건 순 거짓말이고, 효율성 떨어지는 몸이 되는 순간 ‘비인간’으로 취급하는 곳에선 약하지 않은 사람도 자신으로 살 수 없다. 서울시 탈시설 정책에 따라 15년 동안 살던 시설을 나온 발달장애인 이상분씨는 책 <나, 함께 산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시설 가래, 니네는. 어떤 할아버지는 나한테. 도, 돌아다니지 말고 집에만 있으래. 그래서 화났어. 약한 사람이 살(수 있으)면 (그 사회는 누구나) 다 살 수 있는 거 아니야? 왜 없어지라고 그러지?” 김소민 자유기고가









